연주가 일하는 햄버거 가게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좀 지루했다. 더구나 날씨마저 추웠다. 그러나 나는 가게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돈이 없기 때문에, 아니 돈을 아껴야 하기 때문이다. 돈을 아껴야 할 만큼 돈이 부족하니, 하기야 돈이 없다는 말이 맞다. 연주는 이따금 까치발을 하고 흘깃흘깃 내가 서 있는 바깥쪽을 향하여 고개를 들어 올리곤 했다. 나는 그때마다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려 보인다거나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거나, 그도 아니면 그냥 일부러 찻길을 바라봐 버리곤 했다. 연주가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면 어쩌나,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역시나, 연주는 일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야아, 날도 추운데 들어오잖구선.”
“야, 내가 들어가면 니가 일 못 하잖아.”
“신경 안 쓰면 되지.”
“그게 맘대로 되냐?”
“하긴.”
다행이다. 연주가 “너 돈 없어서 그런 거지?” 하고 물을까 봐 나는 조마조마했다.
“연주야, 우리 오늘은 좀 걷자.”
“야아, 나 다리 아프단 말이야.”
“난 걷는 게 좋은데.”
“난 어디 들어가 앉았음.”
“그래, 그럼 우리 라면 먹으러 갈까?
오늘같이 추운 날, 라면 좋잖아?”
“넌 만날 라면이냐?
하긴, 그게 멋있긴 하지만.”
또 다행이다. 연주는 내가 만날 걷거나, 라면만 먹는 것을, 부잣집 아이 폼 내는 것쯤으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아, 어쩌다 일이 이 지경까지 와 버렸나. 하여간 연주가 ‘부잣집 아이’로 알고 있을지도 모를 나 이민수는 ‘가난하지만 평범한 집 아이’(연주가 이렇게 말했다.) 김연주와 바람 부는 거리를 나란히 걸어 단골 분식집에서 라면 한 그릇씩 먹고 라면집 앞 공원으로 갔다. 밤바람이 차가워서인가. 연주는 이따금 몸을 후루루 떨었다. 그러고 보니 연주가 입은 스웨터가 몹시 낡아 보였다. 내가 보푸라기 잔뜩 인 옷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껴서인지 연주가 몸을 조금 움츠리며 말했다.
“중학생 때 산 거라서…….”
“야, 난 옷 오래 입는 사람들이 멋있더라.
요새 애들 뭐냐, 새 옷도 금방 버려 버리고.
우리 아파트 가 보면 옷 수거함에 새 옷들이
잔뜩 버려져 있더라.
에구, 청소년들이 이래 가지고
장래 나라 꼴이 어찌 될는지.“
연주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넌 꼭 할아버지들처럼 말해.”
“그래서 싫다구?”
내가 좀 예민하게 반응했나? 그러나 연주는,
“아니, 의젓해.”
그야말로 의젓하게 대답했다. 나는 큼큼, 목을 좀 가다듬고 고개를 한 바퀴 돌렸다. 이번에도 또 다행이다, 싶어서였다. 연주가, 지난번 백 일 하루 남겨 놓고 헤어졌던 진희 고 계집애처럼 따지고 들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란 말인가. 진희는 똑같은 상황에서 틀림없이 이렇게 종알댔을 것이다.
“야, 아파트 수거함에 버려진 옷들이
다 청소년들이 버린 거라는 증거라도 있냐?”
아니면
“애들, 애들 좀 하지 마, 꼭 꼰대 같아.”
진희는 내가 꼰대 같아서 ‘재섭다(재수 없다)’고 말하고 가 버렸다. 그러나 나는 안다. 진희가 나를 떠난 이유를. 그것은 내가 가난한 집 애이기 때문이다. 저를 위해 쓸 수 있는 돈이 내게 없기 때문이다. 그 애는 제 생일인데도 내가 선물을 사 주지 않았다고 잔뜩 삐쳤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여자애를 사귈 때는 절대로 솔직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나를 철저히 위장해야 한다. 위장하지 않으면 여자애들은 진희처럼 ‘재섭써.’ 한마디 남기고 떠나 버릴 거니까. 나는 진희를 미워하지 않는다. 가난한 집 애를 싫어하는 건 진희 취향일 테니까. 그러나 나는 진희하고 헤어지고 나서 마음잡기가 힘들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리끝으로 열이 뻗쳐올랐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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