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작은 학교를 살리자
수곡초등학교
첫 출근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 구부가 눈물이로구나.”
돌문 선생은 가파른 피오 고개를 자동차로 넘으며 자기도 모르게 한숨과 함께 진도 아리랑 한 소절을 흥얼거렸다. 3월, 칠보면 수곡초등학교로 가는 산길은 구절양장 산굽이가 길기도 하다. 오리나무 연둣빛 순이 그새 풋풋하고 생강나무 노란 꽃도 보인다. 길가 단풍나무 끝이 빨갛게 물이 올라 싱싱하다. 칠보산 꼭대기 아래서 수청리 방향으로 고개를 넘으니, 푸른 바다처럼 넓은 수청 저수지에서 물안개가 피어난다.
고당산 아래 수청리에는 여러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수청 저수지에 잠겼다고 했다. 저 물 바닥에 마을의 집들과 돌담과 우물, 커다란 당산나무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수곡초등학교는 원래 수청리와 반곡리 아이들이 다니던 작지 않은 학교였으나, 수청리가 수몰되면서 학생 수가 줄어 정읍에 유일하게 남은 산간 벽지 학교였다. 게다가 첩첩산중 반곡리는 다른 산촌과 마찬가지로 젊은 사람들은 도시로 떠나고 마을에는 거의 노인들만 남아 있었다.
자욱한 물안개가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에 돌문 선생은 천천히 산길을 운전했다. 30년 선생 세월, 지나온 날들이 설핏 떠올랐다.
돌문 선생은 고등학교 때부터 학교 대표 축구 선수였다. 선생이 되자마자 틈만 나면 아이들과 축구를 하고, 토요일이면 산에서 개울에서 함께 놀았다. 아이들이 놀 때 얼마나 행복한지 자신이 놀아봐서 잘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행복하게 노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선생이 아이들을 몰고 개울로 물고기 잡으러 가는 걸 대부분 교장 선생님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다행히 젊은 돌문 선생은 열성적인 수업으로 신뢰를 받고 있었고 아이들도 선생님을 잘 따르니 크게 가로막지는 않았다.
“아이들 용의 검사를 했더니 때가 많아서 냇가에서 좀 씻어야겠는데요.”
토요일에 냇가에 가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 모르는 척 넘어가 주었다. 돌문 선생이 개울 물속을 헤엄쳐 깊은 바위 밑에 숨어 있는 큰 물고기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나오면 아이들은 금메달을 딴 것보다 더 크게 박수를 쳤다.
고향인 대흥리 앞개울에서 가만가만 헤엄쳐 손으로 물고기 잡던 실력은 대회만 있다면 금메달이 틀림없었다. 먹을 것이 많지 않던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물고기 반찬을 좋아하셨다. 동생과 함께 붕어와 메기와 피리까지 양동이에 잡아오면 어머니는 애호박을 분질러 넣고 고추장, 된장을 풀어 매운탕을 끓였다. 열 명도 넘는 가족이 밥상에 둘러앉아 매운탕에 숟가락을 달그락거리던 밥 때는 가난한 날들의 기억 가운데 몹시 즐거운 추억이다.
돌문 선생은 학교 선생이어서 좋았다. 냇가 모래밭에 둥글게 모여 앉아 수건돌리기를 하면, 행복하지 않은 아이들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었다. 가난한 집 아이도 공부 못하는 아이도 키 작은 아이도 엄마가 없는 아이도 아버지가 아픈 아이도 그 순간은 한목소리로 노래하며 꽃이 되고 새가 되었다. 그럴 때면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일찍 돈 벌러 간 옛 친구들 생각도 났다.
놀기 좋아하는 돌문은 선생이 되던 해부터 보이스카우트 지도를 맡았다. 자연에서 야영을 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텐트를 치고 식사를 준비하며 건강하게 협력하며 자라는 아이들 활동이었다. 지도자 생활 30년이 되던 지난 겨울, 한국스카우트 공로장 무궁화금장을 받았다. 그 상은 지금까지 받은 상 중에서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다. 수많은 야영을 하며 배운 노래들은 영어 노래까지 머릿속에 가득 저장되어 있어, 버튼만 누르면 사흘 밤낮도 부를 참이었다. 해마다 야영장에 모이는 수백, 수천 명의 보이스카우트 아이들을 춤과 노래, 우스갯소리로 쥐었다 폈다 하는 마이크잽이로 돌문 선생은 전국에 만만치 않은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수곡초등학교로 첫 출근을 하는 마음은 착잡했다. 만만치 않은 가격의 옷과 물품을 사야 하고 돈을 내서 야영도 가야 하는 스카우트 활동은 불가능할 게 뻔한 학교였다. 평교사 네 사람이 여섯 학년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 지난해 부임한 채형순 선생만 제외하고 올해 한꺼번에 새로 부임한 변원섭, 이상호 선생도 돌문 선생과 비슷한 심정이었다. 그나마 위로라면 네 사람 모두 스카우트 지도 교사로 이전부터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라는 것이었다.
2명뿐인 입학식
3월 2일, 단 2명이 쓸쓸하게 입학식을 했다. 은상이 아버지가 탄식을 했다.
“우리 큰아들 은수는 남자애덜 셋이서만 6년을 다니고 있당게요. 그란디 우리 막둥이 은상이는 유미와 단둘이서 6년을 다닐 생각만 허믄 억장이 무너지고 눈물이 난당게요.”
아버지가 많이 아프셔서 어머니가 일을 하러 다니는 유미네는 딸들의 앞날을 위해 칠보면 소재지로 차에 태워 학교를 데려다 줄 형편이 못 되었다. 다행히 유미가 언니를 따라 걸어가고 걸어올 학교가 가까이 있다는 것이 고마운 처지였다.
은상이 아버지는 수곡초등학교 졸업생이었다.
“알다시피 전교생이 60명 이하면 폐교 대상이여. 학교 문을 닫아불어야 헌다고 10년째 교육청에서는 야단인디. 알을 못 나믄 폐계라고 닭장 밖으로 던져부는 것 맹키로 아그들이 늘지 않으면 인자 우리 수곡은 폐교가 될 수밖에 없는디, 글먼 쓰것냐고. 입학생이 한나도 없어 학교가 없어지면 안되잖어.”
은상이 아버지는 동네 선배들의 간곡한 말을 뿌리치지 못해 울며 겨자 먹기로 큰아들과 둘째딸에 이어 막내아들까지 수곡초등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은상이 친구들은 면 소재지에 있는 칠보초등학교로 갔다.
운동장의 나무들은 30년 전보다 키가 더 컸지만, 교실과 화장실은 은상이 아버지가 다닐 때보다 더 낡았다. 아이들로 버글버글했던 운동장은 동네 사람들이 학교가 곧 문을 닫느다고 잔디를 떼어가 묘의 뗏장으로 덮는 바람에 더욱 볼썽사나웠다. 폐교를 막기 위한 볼모 아닌 볼모가 된 아들의 외로운 입학식에 온 은상이 아버지는 암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몇 년 뒤면 반곡리에서 입학할 아이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선생들도 마음이 무거웠다. 은상이를 위해서도 선생을 위해서도 아이들이 많아져야 했다. 그래야 교실도 한 학년에 한 칸씩 차지하고, 친구들과 노는 재미도 생기고, 가르칠 맛도 생길 것이다.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손을 댈 것인가. 폐교의 원인은 교사의 잘못이 아니라, 갈수록 사람이 줄어드는 농촌 현실 때문 아닌가. 먹고 살 길이 없으니 다들 농촌을 떠나고 돌아오지 않는다. 벽이 허물어지고 담이 무너진 집들이 늘어난다. 학교까지 문을 닫아 버린 마을에는 젊은 사람들이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수가 없다. 폐허가 된 학교 운동장에 개망초가 피면, 아이들 소리가 사라진 마을은 무덤처럼 보일 것이다. 폐교가 된 학교가 양계장이 되었더라는 소문도, 공장이 되었다는 끔찍한 소문도 들렸다. 학교가 문을 닫으면 소나 돼지를 기르는 축사가 마을에 쉽게 들어서고, 그러면 물과 공기도 금세 더러워져 동네가 망가졌다.
농촌과 산촌 어촌마다 사는 사람이 줄어드니 아이들 수도 점점 줄어 학교가 마침내 문을 닫는 건 시대와 나라가 문제였다. 선생들이 어찌 해볼 수 없는 문제였다. 도깨비방망이가 있다면 ‘금 나와라, 은 나와라’ 말고, ‘아이들 나와라, 뚝딱!’ 외치고 싶은 쓸쓸한 입학식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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