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정신분석 비평의 이념
적어도 프로이트가 「창조적 작가와 몽상Creative Writers and Daydreaming」을 발표했던 1908년부터는 정신분석적 문학비평이 존재해왔다고 가정한다면, 전반적으로 살펴볼 때 당시의 기획은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실제로 정신분석 비평이 골칫거리로 여겨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문학 연구에 적용된 정신분석이라는 개념은 창조적인 텍스트가 가지는 풍부함을 단조롭게 하여 흔해빠진 범주에 가둬버리며, 우리가 원하는 새로운 이야기들에서 상투적인 옛이야기만을 발견하게 되는 환원적인 조작을 환기시킨다. 나 자신도 “정신분석적 비평가”라는 꼬리표에는 저항감을 느끼고 마는데─명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음에도 좌우지간 내가 정신분석적 비평가라는 것만은 틀림없다─문학 텍스트 연구에 정신분석을 적용하는 경우, 그 적용이 타당성과 효력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는 형편이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정신분석적 비평의 시도가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비호를 받은 포스트구조주의적인 해석에 의해 미묘하게 갱신되었다고 할지라도 문제는 지속된다. 문학과 정신분석은 그 결합이 무엇을 약속하든지 간에, 여전히 기질이 맞지 않는 동거인─혹은 친구─의 감각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첫 번째 문제는 정신분석이 문학 연구에서의 분석 대상을 반복해서 잘못 선택해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어떠한 통찰을 낳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문학 텍스트의 구조와 수사학에 관해 가르쳐주는 것은 미미하다. 전통적인 정신분석 비평은 무엇을 분석 대상으로 선택할 것인가에 따라 일반적으로 세 가지 범주로 나뉘는 경향이 있다. 작가를 선택하는가, 아니면 텍스트에 등장하는 허구적인 인물을 선택하는가, 혹은 독자를 선택하는가. 이 중에서도 작가라는 존재는 언제나 정신분석의 오래된 관심 대상이었다. 작가의 전기적 연구는 현재 가장 평판이 나쁜 것임에 분명하지만 동시에 근절하기도 어려운 범주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의 소멸이 반복되어 고지되었다 할지라도, 해럴드 블룸Harold Bloom이 말한 문학사에서의 영혼의 전투psychomachia처럼, 작가의 돌연변이는 끊임없이 재출현하기 때문이다. 작가에 대한 전기적인 접근은 이미 우리 문화에서 영구적인 관심사가 되어왔으며, 전문적인 것에서 더없이 미숙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신분석적 방법론을 위한 기반을 제공해주었다.
작가와 마찬가지로 허구적인 등장인물은 텍스트 내부 코드들이 만들어내는 효과나 일종의 주제적 신기루에 불과한 것으로 해체되었고, 허구적 등장인물의 것이라고 상정되는 무의식을 대상으로 하는 정신분석적인 연구 또한 평판이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분석 방법에 대한 충동이 몇몇 페미니즘 비평가들의 동향 속에서 또다시 부상하고 있기도 하다. 이들은 여성적인 정신(그중에서도 당연히 여성 작가에 의해 창조된)이 남성적인 정신분석 교리의 지배적 개념들을 어떤 식으로 거부하며 문제시하는가를 재현하고자 한다. 실제로 젠더에 기초한 비평은 허구적 등장인물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종류의 정신분석을 낳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를 “상황-주제적” 정신분석 비평이라 부를 수 있을 텐데, 허구에 내재하는 오이디푸스의 삼각형, 삼각형 내부의 자리바꿈과 진화, 어머니와 딸의 역할, 양육과 유대의 상황 등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다. 이러한 유형의 비평은 프로이트식의 분석적 도구를 완전히 주제학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물론 이런 유형의 비평이 가지는 논쟁적인 힘의 일부이겠으나─에서, 그리고 정신분석 용어를 사용하여 인간관계의 정체성과 소속을 결정하고 구분하는 것을 독서의 과업이라 암묵적으로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방법론적으로 취약할 수 있다. 한편 작가와 등장인물에 이어서 정신분석적인 문학 연구의 세 번째 영역인 독자는 거듭 갱신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에 대한 연구가 발전하는 이유는 텍스트의 의미작용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 독자가 수행하는 역할이 오늘날 대단히 주목받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독자의 반응을 대상으로 하는 정신분석적 연구가 수용 가능하며 증명 가능한 방식의 독자라는 관념을 위해 저자라는 입증 불가능한 관념에 기꺼이 괄호를 쳐버리기 때문이다. 독자에 대한 정신분석적 연구의 관심 대상은 (노먼 홀랜드Norman Holland의 『다섯 독자의 독서Five Readers Reading』에서처럼) 실제 독자이기도 하며, (사이먼 O. 레서Simon O. Lesser의 『허구와 무의식Fiction and the Unconscious』과 같이) 심리학적인 보편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타의 전통적인 정신분석 방법들과 마찬가지로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정신분석 또한 그 분석 대상을 텍스트가 아니라 심리적-역동적 구조로서의 인간으로 대체해버리고 만다. 내가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처럼 대상을 대체하는 방식인데─ 추후에 명확하게 할 생각이지만─내 생각에 정신분석적 비평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텍스트적이며 수사학적인 것일 수 있으며, 또한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석 대상의 대체가 정신분석적 문학비평의 중대한 실패라면, 또 다른 잘못도 존재한다. 바로 정신분석적 문학비평이 본래부터 설명적인 것이라는 근본적인 확신을 포기해야 하는 무능력함이다. 쇼샤나 펠먼Shoshana Felman이 다른 어떤 비평가보다도 효과적으로 지적한 것처럼, “문학과 정신분석”이라는 표현에서 핵심은 “~과and”에 있다. 대부분의 경우 이 접속사 and는 두 항의 만남이나 대면이 아니라, 한쪽 항이 다른 한쪽 항에 대해 가지는 특권적인 관계를 함의한다. 즉 “문학과 정신분석”이라는 표현에는 문학을 분석하여 설명하기 위한 개념 체계로서 정신분석을 사용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정신분석에 대한 참조는 논의를 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닫기 위해서, 텍스트를 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닫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사용법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대개 정신분석을 원용하는 자는 정신분석의 존재 이유raison d’être가 체계와 담화의 측면에서 분석적이지 못한 문학비평적 심리학보다 훨씬 예리하고 생산적인 통찰을 설명하고 정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사이먼 O. 레서는 이러한 사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비평 내부에서 지금까지 사용되었던 ‘상식적인’ 심리학이 유용한 적이 없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정신분석은 “대단히 뛰어간 허구적 작품들이 발생시키는 의미작용에서 보다 심층의 층위”를 탐구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러한 주장을 거부할 이유가 있을까? 정신분석이 설령 언어학처럼 형식적인 힘을 갖춘 “과학”과는 거리가 있다 할지라도, 몇 가지 정신분석적인 가설들은 충분히 정착되어 있으며 보편적으로 설명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학에서의 “전환사shifters”나 “이중분절double articulation”과 같은 개념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가설들을 선뜻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언어학적인 개념의 원용과 정신분석적인 개념의 원용이 완전한 대칭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언어학은 보편적으로 널리 퍼져 있음에도 그 도구와 개념 들은 “온당”하며, 사용역이 확대되어도 대단치 않게 받아들여진다. 이와 대조적으로 정신분석 개념들은 대부분 필연적으로 제국주의적이다. 프로이트의 작업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기호이며, 모든 기호는 해석 가능한 주체라는 점을 주제로 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호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등장인물dramatis personae과 동일한 내러티브 기능을 포함한 이야기다. 따라서 프로이트가 자신을 “정복자”라 부른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그는 인간의 온갖 행위와 상징적 행동을 망라하여, 기호의 제국은 물론이고 기호작용을 해독하는 작업 영역까지 모두 두드러지게 확장시켰다. 그리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든 별도의 학문 분야에 “정신분석적 설명”을 도입할 경우, 그 설명이 일종의 결정판, 즉 최종적인 해석학적 힘을 얻는다고 주장하게 될 위험성이 언제고 존재한다. 포스트구조주의적 비평이 무엇보다 유효하게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이 있다면, 바로 해석 과정과 역사에 있어서 소위 결정판에 대한 의혹과 거부다. 분석에 관해서는 어떠한 특권적인 입장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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