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토서판 기록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제1강
불멸을 향해 나아간 인간의 귀결
《길가메쉬 서사시》는 인류 최초의 서사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사시 하면 흔히 떠오르는 것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오뒷세이아》입니다. 호메로스는 서기전 8세기나 9세기의 사람으로 추정되며, 《길가메쉬 서사시》는 그보다 천오백 년 전에 나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사천 년 전에 나온 서사시라 하겠습니다. 사천 년이라고 하면 사실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저 굉장히 먼 옛날이라는 느낌만 듭니다. 이처럼 먼 옛날에 나온 서사시이므로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서사시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에서 겪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기쁨과 고난을 아주 먼 옛날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도 겪었을 것이고, 그것이 서사시에 반영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지금부터 사천 년 전이라는 시대와 고대 수메르 지역이라는 맥락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읽는다 해도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서사시가 보여주는 내용을 좀 더 면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시대와 배경을 좀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목적을 위해서는 조르주 루의 《메소포타미아의 역사》 같은 책을 본격적으로 참조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학 작품으로서의 서사시를 읽는 것이므로 이해를 위한 몇 가지 사실들만 짚어보기로 하겠습니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방금 말했듯이 ‘수메르’라 불리는 지역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이 지역은 이른바 4대 문명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생겨난 곳입니다.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는 ‘중간’이라는 뜻의 meso와 ‘강’이라는 뜻을 가진 potamia가 결합된 말로서 ‘강들 가운데’를 가리킵니다. 이 강들은 오늘날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입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많은 문명과 도시, 국가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는데 수메르는 오늘날 이라크 남부 지역에서 생겨난, 메소포타미아 지역 최초의 문명입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포함해서 오늘날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등은 일반적으로 역사책에서 ‘오리엔트’라 불리는 지역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핵심이 되는 지역들은 다음에 우리가 읽을 《오뒷세이아》의 배경이 되는 에게 해 지역과 《길가메쉬 서사시》와 구약 성서 〈욥기〉의 배경이 되는 오리엔트 지역입니다. 이 두 지역은 지리적으로 아주 다릅니다. 에게 해는 바다이며, 오리엔트 지역에는 사막과 거친 들판이 펼쳐진 육지가 있고 강들 사이에 농지가 있습니다. 이렇게 지리적 여건이 다른 만큼 각 지역에서 생겨난 문명의 성격도 크게 다릅니다. 이러한 문명의 성격 차이가 《오뒷세이아》와 《길가메쉬 서사시》라고 하는 두 서사시의 차이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서사시의 주제와 전개, 그리고 내용이 그 서사시가 생겨난 배경이 되는 문명의 성격과 온전히 상응하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으로 서사시를 읽을 때에는 어느 정도 이러한 배경에 대한 고려가 필요합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에 대한 인간의 생각과 반응이 시대마다 엄청나게 변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 해도 각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세계관의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문화적 태도나 세계관의 차이를 이해하고자 할 때에는 지리적 여건에 관한 이해가 반드시 요구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볼 때는 이 지명의 유래가 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강들에는 항상 일정한 정도의 유량流量이 흐르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강의 원천들이 설산雪山이라는 데 있습니다. 얼음이 많이 녹는 철이면 물이 급격하게 많아지고 날이 추워지면 물이 급격하게 줄어듭니다. 기술이 발전하지 못하여 자연환경이 주는 영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살아야만 했던 시대에는 이러한 상황이 인간의 삶에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겠지만 지역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관개 수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관개 농업이 오래 진행되면 물에서는 쉽게 염화 작용이 일어나고 농지가 피폐해지기 쉽습니다. 사람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수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안정된 정치체제가 오래도록 지속되지 않습니다. 이 지역에서 분쟁이 자주 일어났던 것은 지리적 환경 때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수메르 지역의 자연적 환경이 이러하다고 할 때 이 지역에 사는 이들의 기본적인 정서는 어떠할지 생각해봅시다. 앞서 말했듯이 수메르의 자연환경은 인간에게 앞날에 대한 섣부른 낙관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과연 여기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항상 걱정해야 하는 곳입니다. 그런 까닭에 막연히 짐작해본다고 해도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정서는 비관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러한 비관에 이어 인간 자신에 대해 들여다볼 때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한성을 뼈저리게 깨닫게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이 서사시의 주인공인 길가메쉬는 처음에 굉장히 자신만만한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나옵니다. 나쁘게 말하면 오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무엇이든지 자신이 다 성취할 수 있는 듯한 자세를 보입니다. 그러나 서사시가 전개되어 갈수록 그는 불행을 겪으면서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되고 점점 신들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이러한 전개 과정을 함부로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길가메쉬는 이 서사시가 보여주려는 어떤 세계관을 반영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세계관 또는 인생관을 한마디로 말하면 신 앞에서 오만함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텍스트를 구체적으로 읽기 전에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의 “일러두기”를 살펴봅시다. 여기에는 이 서사시가 어떤 언어들로 쓰였고 어떤 판본들이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내용과는 별다른 관계가 없지만 아주 오래된 서사시인만큼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전승되었는지를 알아둔다는 점에서는 유념해서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사천 년 전에 사람들 사이에서 오고가던 이야기가 점토판에 쓰여 우리에게 읽힌다는 것은 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언어를 누군가가 해독하였고 그것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우리가 읽고 있으며, 읽으면서 어느 정도 공감하기도 한다는 것, 이건은 인류가 먼 옛날부터 어느 정도는 공동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 서사시가 기록된 매체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만한 점들이 있습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길가메쉬 서사시》는 본래 점토판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수메르 문명의 유물로서 가장 유명한 바로 그 점토판입니다. 유적지에서 수많은 점토판이 발굴되었으나 그 점토판들의 절대 다수는 주로 경제에 관한 것, 일상 생활을 기록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영수증, 청구서, 재산 목록, 땅의 측량 결과를 기록한 것들입니다. 그에 비해서 이 서사시는 극히 일부 점토판들에서만 발견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우리가 수메르 문명의 탁월한 업적 중의 하나라고 말하는 이 서사시가 사실은 수메르 인들의 삶에서 극히 일부일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해서 이 서사시에 나오는 세계관이나 삶에 대한 태도가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을 온전히 반영하고 있지 않음을 추정해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일러두기”에 있는 내용 중에서 다음을 잠깐 보겠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길가메쉬의 경우, 그가 우루크 제1 왕조 다섯 번째 왕위에 오른 해를 2004년을 기준으로 ‘사천팔백십육년 전’이라고 쓴 것이다. 이는 ‘서기전 2812년 전’의 일이 되는 셈이다. ‘서기전’이라는 불필요한 걸림돌을 제거하면 수메르 도시국가 우루크와 우루크 왕 길가메쉬가 얼마나 오래 전에 존재했었는지 더욱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 나온 텍스트라는 것을 새삼 강조하고자 이 말을 인용해보았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텍스트의 내용을 봅시다. 이 번역본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길가메쉬 서사시가 형성된 과정을 설명한 부분입니다. “차례”에서 “Ⅰ최초의 신화, 그 탄생의 비밀”이라는 제목이 달린 부분입니다. 그리고 서사시의 내용은 “Ⅱ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라고 되어 있는 부분에 있습니다. 이 부분을 어떻게 구성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일러두기”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가장 오래된 수메르 어 판본과 그 후대의 악카드 어 판본으로 구별되며, 악카드 어 판본은 다시 고바빌로니아 판본과 표준 바빌로니아 판본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 책의 악카드 어 판본은 필자가 일일이 두 판본의 내용을 대조하여 음역해보고 합친, 말하자면 통합 판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수메르 어 판본 역시 여러 단편들을 모두 모아 음역해보고 소개하였다. 그리고 산문 형식의 서사시를 좀 더 읽기 편하게 서술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 책의 2부가 완성된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서사시의 내용은 아래와 같이 나뉩니다.
1. 영웅 길가메쉬 왕
2. 엔키두의 창조
3. 엔키두의 개화
4. 길가메쉬의 꿈
5. 길가메쉬와 엔키두의 만남
6. 훔바바 살해 음모
7. 닌순의 기도
8. 삼목산 여행
9. 훔바바와의 싸움
10. 후와와의 죽음
11. 이쉬타르의 청혼
12. 갈기메쉬와 하늘의 황소
13. 길가메쉬와 아가의 전쟁
14. 엔키두의 악몽
15. 엔키두의 죽음
16. 길가메쉬와 엔키두의 저승 여행
17. 길가메쉬의 방황과 전갈 부부
18. 씨두리의 충고
19. 뱃사공 우르샤나비의 도움
20. 우트나피쉬팀과의 조우
21. 우트나피쉬팀의 홍수 이야기
22. 왕의 귀환
23. 길가메쉬의 죽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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