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내 자리는 있을까
당신을 사랑합니다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해서 제 딴에는 열심히 살아왔는데,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그저 허탈감만 들어요. 이렇게 공부하고 노력하면 과연 제 꿈을 이룰 수는 있는 건지, 멋진 어른이 될 수 있을지 답답합니다. 의원님은 진짜 힘들거나 지쳤을 때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요즘 저는 학교생활이며 사회생활이며 모든 게 너무 힘들어서, 자려고 누우면 눈물만 나요. 미래가 너무 걱정되고, 이대로 세상이 끝났으면 좋겠어요.
밤 11시쯤 귀가해서 확인한 페이스북에는 이런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힘내라는 답글을 쓰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글을 반복해서 읽는 동안 그가 처한 상황이 그려졌다.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트윗이나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도 누르고 때로는 포스트잇으로 의견을 말하지만, 막상 자신의 생활로 돌아오면 현실의 벽은 차갑고 높다. 스스로 한없이 강한 듯 느끼다가도 한없이 약해지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결국 누군가에게 넋두리라도 해야 잠이 들겠다 싶어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다.
답장을 받을 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며 기뻐하던 그대에게, 페이스북으로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여기 꺼내놓는다. 처음부터 힘겨운 현실을 이야기해야 하나 망설였지만, 그러기로 마음먹었다. 왜 우리가 희망보다 절망에 더 익숙한가를 살펴보아야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선언한다. 사람은 존엄하며, 성별이나 학력이 어떠하든, 장애나 재산, 능력의 있고 없음과는 무관하게 누구든 당연한 권리로서 인권을 보장받는다. 헌법 정신은 대통령과 국회와 행정부더러 국민을 향해 ‘당신은 존엄합니다, 당신을 보호하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선언할 것을 명령한다. 이 불가침의 인권은 사실 전 세계 사람들의 합의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대가로 얻은 소중하고 위대한 결과물인 것이다.
1914년부터 1945년까지 30년 동안 인류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며 서로 잔인하게 죽이고 죽임을 당했다. 1939년에 시작된,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라 불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최소 6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참혹한 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이들은 그 어떤 희망과 신뢰도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이런 참혹하고 잔인한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대답은, 사람을 존엄과 인격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자연 자원처럼 무언가의 수단이 되는 ‘자원’으로 취급한 탓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깨달음 끝에 인류의 대표자들, 즉 노동자 대표와 사용자 대표 그리고 정부 대표는 1944년 미국 필라델피아(마침 이 이름의 어원이 그리스어 ‘형제애’에서 왔다)에 모여 4가지 조항으로 된 ‘필라델피아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노동은 상품이 아니라는 그 선언에 힘입어 노동하는 사람의 인권 보장이 국가의 목표가 될 수 있었다. 개인의 무능력 때문이라고 하던 빈곤도 함께 힘을 모아 없애야 하는 사회적 문제로 바뀌었으며, 표현과 결사의 자유라든가 사회 안전망 같은 게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필라델피아 선언에 이어 1948년에는 국제연합 총회에서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된다. 모든 사람이 불가침의 인권을 가진 동등한 존재로서 어떤 차별도 받지 아니하여야 한다고 확인하면서, 전 세계는 이후 30년간 복지국가의 황금시대를 열게 된다. 사람을 자원쯤으로 취급하던 시대에서 사람을 인간으로 존중하는 시대로 변화해간 것이다. 예를 들어, 스웨덴에서는 사회 복지가 더 이상 자선이나 시혜가 아닌 시민의 권리로 자리 잡았다. ‘모든 아이는 모두의 아이다’라는 말로써 보육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할 뿐 아니라, 모든 시민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실업이나 질병, 가난에서 자유로워야 하며 일한 대가나 능력의 대가가 아니라 시민권이 있기에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권리를 갖는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시대정신은 대한민국의 헌법에도 그대로 녹아들었다. 참혹한 전쟁을 겪은 과거 세대가 미래 세대에게 바치는 사랑의 약속, 국가가 국민에게 헌정하는 존엄의 약속으로서 대한민국 헌법이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국가가 우리를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않는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들에서는 초등학교 정규 수업에 들어 있는 노동권이나 시민권 교육이 한국의 교육과정에는 없다. 한국의 대학교에는 취업 센터는 있을망정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취업한 학생들 또는 졸업생들을 위한 인권 센터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인터넷에서의 정보 교환 덕분에 최저임금이나 주휴수당에 대해 아는 사람은 늘어났지만 그것을 요구하거나 제대로 받고 있는 이는 드물다. 쏟아져 나오는 자기 계발서들에서 혹시나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헤매고 있을 뿐, 헌법이나 인권에 대한 책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게다가 정부와 재벌 기업들은 사람을 물건이나 자원으로 취급해 ‘쓸모’로써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삿짐을 쌀 때 쓸모 있는 물건을 챙기고 쓸모없는 물건은 버리고 가는 것처럼, 사람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버려도 된다고 정부가 나서서 권장한다. 노동 시장, 취업 현장이 이렇다 보니 취업 준비생인 청년들은 이미 어릴 때부터 스스로의 쓸모를 입증하는 일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점수와 등수, 스펙은 말할 것도 없고 외모, 인맥, 심지어 부모의 재산에서까지 고성과자가 되어야 한다. 더구나 오늘 쓸모를 인정받았다고 해서 내일도 그렇게 인정받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경기가 어려워지거나 경영 실패로 회사 사정이 나빠지거나 하면 갑자기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거리로 내몰린다. 명백한 헌법 위반이지만 그런 말조차 하기 어렵다. 정부가 나서서 강제하고 있는데, 경쟁과 효율성이라는 ‘가치’가 우리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데 한 사람의 개인이 무슨 수로 저항할 수 있겠는가. 겨우 반대의 목소리를 내봤자 무능력해서 경쟁을 싫어한다는 이야기나 듣기 십상이다.
(중략)
고용 없는 하청 사회
지난 20년간 한국은 나라 전체가 거대한 ‘하청 사회’로 바뀌었다. 끊임없이 쓸모 있음을 입증해야 하는 가혹한 경쟁 과정에서 저성과자나 능력 부족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은 비정규직, 하청, 영세 자영업자로 전락했다. 기업들은 경영이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주기적으로 일정 비율의 사람들에게 쓸모없음 딱지를 붙여 구조 조정하는 관행을 정착시켰다. 그 결과 청년들은 아예 경쟁의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하청 노동자, 알바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다.
하청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고용 없이’ 지배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고용계약이라도 맺고 일을 시켰다. 고용계약에 따라 임금과 근로조건을 정한 후 4대 보험과 퇴직금을 보장해주었다. 물론 임금을 체불하거나 최저임금 이하인 사업장이 많았지만, 최소한 고용계약에 근거해 불법이라고 고발하거나 노동조합을 결성해 집단적으로 항의할 수는 있었다. 또한 고용계약이 있으면 기업이 마음대로 해고하는 게 쉽지 않다. 희망퇴직이나 명예퇴직을 시키려면 위로금이라도 주어서 내보내야 하고, 정리 해고도 멋대로 남발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하청 사회로 바뀌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고용계약이 점차 ‘사업계약’으로 대체되는 탓이다. 노동자였던 시민들은 이제 개인사업자(특수고용이라고 불리는 자영업의 일종)가 되거나 하청 업체의 노동자가 된다.
예를 들어 재벌 대기업의 계열사인 대형 마트에서 판촉관리 업무를 하는 이영화(가명) 씨는 전에는 대형 마트의 직원이었지만 지금은 개인사업자이다. 그는 대기업 A에서 35만 원, 소규모 식품 업체 B에서 10만 원, 중소 납품 업체 C에서 25만 원 등 총 6개 업체에서 140만 원을 받는다. 통장으로 각각 들어오는 이 돈은 급여가 아니라 판촉관리 수수료이다. 물품 손상이나 산재가 발생하면 그의 부담이다. 이영화 씨는 대형 마트의 직원도 아니고 납품 업체의 직원도 아니지만 그들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정직원보다 더 정직원처럼 일하지만 개인사업자일 뿐이다.
이영화 씨의 예처럼 재벌 대기업은 하청 업체나 개인과 사업계약을 맺는다. 문제가 생기면 해고가 아니라 계약을 해지하면 된다. 청소 용역 노동자가 청소 중 콧노래를 부르거나 소파에 앉거나 지시한 세제를 사용하지 않으면 원천 기업은 그가 속한 하청 업체와 계약을 해지할 수 있고 그러면 그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는다. 서비스센터의 하청 기사는 고객의 요구라면 무엇이든지 빠르고 신속하고 친절하게 응대해야 하며 몸에 묶는 안전 밧줄이 없어도 옥상에 올라가 위험한 설치 작업을 해내야 한다. 고객은 A사 마크가 있는 작업복을 입고 같은 마크가 찍힌 명함을 내미는 기사를 A사 직원이라고 생각한다. 기사 역시 고객이 A사 직원이냐고 물어오면 그렇다고 대답한다. 고객은 해당 기사의 서비스 수수료를 A사로 입금한다. 그러나 기사는 A사 직원이 아니다. 하청 기사가 고객 서비스를 제대로 못하거나 원청 대기업의 지시를 거부하는 경우, 사업계약만 해지하면 그 하청 기사는 일자리를 잃고 만다.
개인사업자의 신분이 되면 노동자가 아니니 노조는커녕 상조회조차 만들 수 없다. 이러한 조항이 달린 사업계약서에 서명한 후에야 ‘개인사업자’로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 하청 업체에 취업한 노동자라면 개인사업자와는 달리 노조를 만들 수는 있지만 이 역시 그림의 떡이다. 하청 업체에 노조가 생기면 대기업 원청 업체가 해당 업체와의 계약을 해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개는 계약 업체가 바뀌어도 노동자들은 그대로 남아서 일을 했는데, 노조를 만들면 이러한 관행적인 고용 승계가 일어나지 않는다. 일자리가 사라지는데 누가 노조를 만들겠다고 나서겠는가. 게다가 노동자에서 개인사업자로 바뀐 사람들은 일을 알선해준 대가로 본사에 수수료까지 내야 한다. 또한 모든 위험 부담, 예컨대 택배 기사는 배송 물품의 분실이나 손상, 산재 등에 대해서도 혼자 책임을 져야 한다. 배송 유류비나 점심 식대, 홍보비는 말할 것도 없다. 질병으로 쉬어야만 할 때에도 회사에 내야 하는 수수료 때문에 입원을 꺼리게 된다.
아름답고 쾌적하며 널찍한 백화점은 하청 사회의 상징이다. 백화점 간판은 건물 주인의 이름일 뿐이다. 롯데나 신세계, 현대는 사실 토지와 건물을 소유한 채 모든 매장을 임대하는 건물 주인이다. 1층에 있는 화장품 매장을 임차한 또 다른 대기업은 매장 운영을 위해 정직원을 채용하기보다 판매 직원들을 대부분 파견업체로부터 파견받아 운영한다. 그래서 백화점 1층은 파견 매대라고 불린다. 2층부터는 일반적으로 의류 매장이 시작되는데 의류 매장은 매니저라고 불리는 개인사업자가 대부분이다. 판매에 따라 수수료를 받는 계약인지라 이 사람들에게는 근로 기록이 없고 4대 보험과 퇴직금이 없다. 그래서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도 어렵다. 백화점 카드 업무를 하는 사람도 역시 개인사업자이고 경비 보안시스템은 파견이거나 하청이며 계산원은 기간제, 청소는 하청, 주차는 아르바이트이다. 결국 이 아름다운 백화점에는 정직원이 거의 없고 비정규직과 하청만이 넘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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