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혐오표현에 접근하다
이 책에서 내가 옹호하고자 하는 나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책을 시작하고자 한다. 내가 이 논쟁에 이끌린 이유도 얘기하고 싶다. 내 입장과 그 근간을 이루는 중요 사항들에서 시작해 보겠다.
존엄과 확신
일곱 살 아들과 열 살 딸과 함께 걷던 한 사람이 뉴저지에 있는 도시의 거리 구석을 돌다 어떤 표지판과 마주쳤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무슬림과 9․11! 그들을 섬기지 말고 그들에게 말하지 말고 그들을 들이지 말라." 딸이 말했다. "아빠, 이게 무슨 뜻이에요?" 자신을 포함한 가족 전체가 무슬림인 아이의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아이들이 더 이상 그런 표지판들을 마주치지 않도록 급히 조치했다. 일전에도 그는 거리에서 "그들은 모두 오사마라고 불린다"라는 슬로건과 함께 있는 무슬림 아이들의 큰 사진, "지하드 본부"라고 적혀 있는 이슬람 사원 외벽의 포스터를 본 적이 있다.
이러한 표지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를 대략 "혐오표현"hate speech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인종차별 낙서, 십자가 불태우기, "유대인과 개는 금지"처럼 플로리다의 부촌에서 유대인들을 쫓아내기 위한 초기 형태의 신호 등이 혐오표현의 범주에 속한다. 이러한 표지들을 혐오표현이라고 부를 때, 혐오표현의 주된 기능은 표현적expressive인 듯하다. 즉 혐오표현은 이런저런 인종차별 또는 이슬람혐오의 요소가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혐오를 분출하듯이 "발산되는" 식으로 기능한다. 하지만 실은 그 이상이다. 이러한 표지들은 수많은 메시지를 보낸다. 포스터와 소책자에 담긴 그 표지들은 공격받은 소수자 구성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낸다.
당신이 여기서 환영받으리라는 바보 같은 생각은 하지 마라. 당신을 둘러싼 사회는 친절하고 차별이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을 원치 않으며, 우리가 할 수 있을 때 언제라도, 당신과 당신 가족들을 회피하고 배제하고 두들겨 패고 쫓아내리라는 점이 진실이다. 우리는 지금부터 저자세를 유지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편하게 생각하진 마라. 과거에 당신과 당신 같은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기억하라. 두려워해라.
그 표지들은 공격 대상인 소수자 구성원이 아닌,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메시지를 보낸다.
당신들 중에 우리 안의 이들을 원하지 않는다는 데 동의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그들이 더럽다, 위험하다, 범죄자다, 테러리스트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음도 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 알아야 한다. 정부가 무어라고 말하건, 그들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실히 확인시켜 주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충분히 있다. 그들이 정말 어떤 사람인지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충분히 있다. 당신의 이웃들과 고객들에게 말해라. 무엇보다도 더 이상 그들을 공동체에 들이지 마라.
이것이 이러한 요지들의 요점이자, 혐오표현의 의미다.
즉, 혐오표현은 위와 같은 메시지를 보내고, 이러한 메시지를 영원히 눈에 보이는 사회구조의 일부로 만든다. 앞의 사례에서 아이와 함께 걷는 아버지는 언제 아이가 혐오표현 표지에 맞닥뜨리고, 아이에게 "아빠, 이게 무슨 의미예요"라는 질문을 받게 될지 알 수 없게 된다.
무슬림이 아닌 나의 여러 동료들은 자신은 혐오표현을 싫어하고 다른 사람들이 인종차별 구호나 반유대주의 표지 등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 동료들은 혐오표현을 싫어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혐오표현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흔치는 않지만, 압박을 받으면, 내 동료들은 위 사례에서 수정헌법 1조 학자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그들과 같은 다른 사람들 역시 이러한 표지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 동료들은 걱정스럽게 그런 말을 한다. 악랄한 욕설이 주는 고통을 참는 자기 능력에 주목하면서, 자신의 자유주의적 허세를 더 자주 확신한다. "나는 당신이 말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당신이 그것을 말할 권리는 목숨 걸고 방어하겠다."
이것이 내 동료들의 의견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다. 그들을 지금까지 언급한 표지, 우리의 공적 환경을 오염시키는 편견에 가득찬 욕설은 법과 무관한 문제여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자기 권리의 범위 내에서 완벽하게 혐오표현을 공표한다. 여기서 규제를 받거나 법이 관여할 바는 없다. 좋은 사회가 입법 장치를 활용해 금지하거나 절연해야 할 것은 없다. 대상이 된 사람들은 혐오표현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즉, 혐오표현을 당하는 사람들은 혐오표현이 만들어 내는 환경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자기 일을 수행하고 자신의 아이를 키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회적․법적으로 볼 때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제를 설명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우리 사회가 보증하고 약속하는 일종의 포용의 공공선public good of inclusiveness이 있다. 우리의 민족, 인종, 외모, 종교는 다양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차이가 있는데도 함께 살아가고 일하는 위대한 경험을 시작했다. 각각의 집단은 사회가 그들을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고, 다른 모두와 함께하는 집단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개인이나 각 집단 개별 구성원들은 적대, 폭력, 차별, 타인이 행하는 배제에 직면할 필요가 없다는 확신assurance 아래에서 자신의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확신이 효과적으로 전달될 때,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이는 마치 우리가 들이마시는 공기의 깨끗함이나 샘물의 수질처럼 모든 사람들이 신뢰하는 어떤 것이다. 우리가 사는 공간에서 안전의 이러한 의미는 공공선public good이다. 이는 좋은 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직관적이고 눈에 거의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기여하고 지속되도록 돕는 어떤 것이다.
혐오표현은 이러한 공공선을 파괴하거나, 혐오표현이 없을 때보다 공공선의 지속을 훨씬 더어렵게 만든다. 혐오표현은 차별과 폭력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이 사회가 과거에 어떠했는지, 다른 사회가 어떠했는지 끔찍한 기억을 생생하게 환기시킴으로써 공공선을 파괴한다. 혐오표현은 이러한 방법으로 사회 평화의 환경을 위협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천천히 작용하는 일종의 독처럼 혐오표현은 여기저기에서, 말과 말이 전해져 축적되고, 결국 사회의 선한 마음을 지닌 구성원들조차도 공공선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기 더 어렵게 만들고 부자연스럽게 한다.
문제를 설명하는 두 번째 방법은 혐오표현 때문에 문제가 된 확신에서 이익을 얻는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관점으로 문제를 보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이익을 얻게 되어 있다. 하지만 취약한 소수자 집단의 구성원, 최근에 사회 내의 다른 사람들에 의해 혐오나 경멸당했던 소수자에게, 확신은 자신의 구성원자격membership, 즉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정상적인 자격이 있음members of society in good standing을 확인해 준다. 그들은 근처에서, 공공장소에서, 길가에서, 가게에서, 일터에서 다른 사람들과 직접 교류하고, 다른 모든 이들과 함께 사회의 보호와 관심의 적절한 대상으로 대우받을 자격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자격을 나는 그들의 존엄성dignity이라고 부른다. 개인의 존엄성이 딱 칸트풍인 것은 아니다. 존엄성은 소수자들의 사회적 지위social standing이자,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사회에서 평등한 대우를 받는 자격이 주어지는 기본적인 평판의 기초이다. 존엄성이란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해야 할 일들을 해 나가며 가족을 부양하는 과정에서, 가능하면 내밀하고 떠들썩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들이 의존할 수 있는 무엇이다.
혐오표현의 공표는 이러한 존엄성을 훼손하고 손상시키도록 의도된 것이다. 혐오표현의 목적은 혐오표현 대상자의 관점과 다른 사회 구성원의 관점에서, 혐오표현 대상자의 존엄성을 위태롭게 한다. 게다가 내가 설명했던 바로 그 의미에서 혐오표현 대상자의 존엄성이 자리 잡고 유지되는 상황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어 버린다. 혐오표현은 민족, 인종, 종교와 같이 귀속적인 속성을 사회의 정상적인 구성원으로 대우받지 못하도록 자격을 박탈해야 하는 행위나 속성으로 연결시켜, 혐오표현 대상자들의 평판의 기초를 손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혐오표현이 취약한 사회 구성원의 존엄성을 모욕하도록 의도되었음과 동시에 포용의 공공선을 공격하도록 의도된 방법이라는 점을 보여 주는 수많은 사례들을 살피려고 한다. 책 앞부분에서 나는 독자들에게 혐오표현 논의에서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의미, 혐오표현을 제한하거나 규제하는 입법이 보호하려는 바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이러한 관심사를 설명할 계획이다. 또한 사례들을 자세히 다루고, 다양한 반대론에 관해 대답하려고 한다.
논증은 쉽지 않다. 많은 독자들은 일단 간단히 논증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왜냐하면 혐오표현의 공표가 표현의 자유로서 보호되어야 하고 우리는 이를 공표할 저자의 권리를 결사적으로 옹호해야만 한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사람들 대부분은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순간 논증은 끝났다고 생각하며, 내가 혐오표현 금지를 옹호하는 길을 걷기 시작할 때 실망스럽다는 말 대신 혼란에 빠진다. 나는 내가 걷고자 하는 길이 탐구해볼 가치가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설사 어떤 사람의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다. 우리가 반대하는 입장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주장을 명확히 밝히는 일은 언제나 좋다. 하지만 우리의 개입에 혼란스러워할 이들을 위해, 다소간의 지적 일대기를 이야기하는 데서 시작하려고 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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