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유화
303동과 304동 사이 버려진 분홍 땡땡이 팬티
누구의 것일까
부끄러워 아무도 손대지 못한다
다 늙은 관리인이 치우며 슬며시 웃을까
그럴지 몰라 잊은 듯 잊지 않은 듯
호주머니에 넣고 다닐지 몰라
어느 창문에서 무슨 바람을 타고 어떤 사연을 날리며
날아온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꽃인 듯 한참을 바라보았던
가을 햇살을 눈부시게 갈라놓았던
그런데 어쩐지 젊음도 늙음도 그 안에는 없고
향기도 주인도 없다
종종 아이들이 불다 버린 본드를 보면
마음이 공연히 깡통처럼 뒹굴고
검은 비닐봉지를 밟은 듯 발이 꺼진다
벽에 죽죽 낙서를 하며 인생의 몇 페이지를 넘겼을지도 몰라
오늘 한권의 책이 바닥으로 무의미하게 떨어졌다
고개 숙인 사람들의 시선이 제 발 끝에 이를 때에도
죽음은 끝까지 눈물을 모르겠지
그런데 버려진 팬티라니
내 마음속에 꽃이 피었네
불가능한 꽃
불가해한 꽃
저만치 버려진 팬티는 내 것이 아니다
나를 모른다
그런데 내게 주어진 단 하나의 꽃잎은
누구에게 던질까
누가 될 거니
오늘 나의 산책과 명상에는 무늬가 없다
내일 우리의 논쟁과 수다는
테이블 위의 접시를 몇 번이나 갈아치울지
주인을 잃은 이름들이 하나둘씩 떠오르는데
비가 와도 젖지 않는
더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꽃잎의 어지럽고 어려운 방향을 따라가본다
택시는 의외로 빠르지 않다
창문을 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질식을 간신히 면할 만큼만 지독한 이것은 무엇인가
급한 마음에 흔들어댔던 오른팔을 진즉에 거두었지만
거둔 팔을 잘라 귀를 막고 싶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을 노래하는 기사님
날 가르치려는 학교 택시
사탕 같은 것이 가방 구석 어딘가 굴러다닐지도 몰라
혀를 차고 굴리고 반복하면
입안에 쓴 것을 삼킬 수 있을지도 몰라
호흡이 서로 달라져서 칼이라도 들이댄다면
서로 지지하는 정당이 달라서 창밖으로 내동댕이친다면
물론 그런 적은 없다
라디오 볼륨이 너무 크거나
채널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대꾸할 말을 쉽게 찾지 못해 졸거나
졸음 끝에 놀라운 각성과 교훈이 오거나
아무렇게나 구겨져 졸다가
뒷좌석에 두어번 토한 적이 있고
맨정신에 지갑을 흘린 적이 두어번 있다
번호판이나 기사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
골목을 빙빙 돌다가 아무 데나 버려진 것이겠지
그도 그럴 것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골목길에 버려졌을 것이다
그걸 택시 졸업이라고 해야 할까
오늘 길은 갈래갈래 뻗어 있고
쥐새끼 두더지 표범 하마 들처럼 줄지어 서서
어디를 무엇을 누구를 물어뜯을지 뻔한 표정으로
오늘 우리의 식탁 위에는
조작된 게임과 매끄러운 커튼이 있고
우스운 과거와 무시 못할 가족력이 있고
사업 실패와 약물 중독 사이 마주칠 수 없는 눈이 있다
그리고 택시는 의외로 빠르지 않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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