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용서의 상투성을 넘어서
만약 용서할 만한 것만 용서하겠다고 한다면,
용서라는 바로 그 개념 자체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 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용서,
그것은 쉽지 않다.
쉽다면 논의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가장 어려운 것이다.
─ 토니 커시너Tony Kushner
내가 용서의 개념에 대해 학문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글 〈용서에 관하여On Forgiveness〉를 접하면서부터다. 이 〈용서에 관하여〉는 현대사회 들어 세계 곳곳에서 논의되는 주제인 용서와 화해의 정치적·철학적·종교적 의미를 예리하게 다룬다. 데리다의 글은 윤리적·철학적 주제로서뿐 아니라 정치적 주제로서 용서를 다루며,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처럼 극심한 인종차별 정책으로 피비린내 나는 폭력과 살상을 경험했던 곳에서 이루어지는 화해와 사면이라는 형태의 용서를 논의한다. 데리다의 용서에 대한 논의에서 핵심은 “진정한 용서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라는 데 있다. 그런데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진정 가능할까? 나아가 데리다는 “만약 용서가 오직 용서할 수 있는 것만을 용서하는 것이라면 용서라는 개념 자체는 사라진다”고 말한다. 결국 진정한 용서란 아이로니컬하게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려는 시도’다.
사실 용서라는 개념은 이제껏 나의 개인적 관심사가 아니었다. 의미의 성찰 없이 여기저기 상투적으로 붙이는 바람에 그 아름답고 소중한 의미가 퇴색되는 사랑이라는 말처럼, 용서도 너무나 흔하디흔한 말로 들려서 본격적으로 이 개념에 대해 생각해보겠다는 욕구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33쪽밖에 안 되는 데리다의 용서에 관한 짧은 글을 읽으면서, 마치 그 글이 ‘용서’라는 복합적이고 심오한 주제로 나를 강하게 끌어들이는 초대장처럼 느껴졌다. 그 짧은 글은 무수한 복합적 물음을 던지면서, 내가 용서를 얼마나 상투적으로만 생각했는지 일깨워주었다. 그 글을 반복해서 읽을 때마다 각기 다른 물음들과 만나게 되면서 그때부터 데리다 세미나를 강의할 때면 반드시 용서라는 주제를 포함시키기 시작했다. 용서라는 주제가 정치·철학·종교·경제·심리학 등 얼마나 다양한 분야와 연결되어 있는지, 일상생활에 얼마나 깊이 자리 잡은 중요한 문제인지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나의 읽기 경험이 용서에 대한 책을 쓰겠다는 생각으로 직접 이어진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집필하게 된 직접적 동기는 어느 날 우연히 신문에서 접한 “용서하겠다던 ‘크림빵 뺑소니’ 아버지 다시 분노한 이유”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2015년 1월 10일 새벽에 일어난 일명 ‘크림빵 뺑소니’ 사건은, 임신한 아내에게 줄 크림빵을 사들고 귀가하던 29세의 강경호 씨가 차에 치여 사망하고, 그를 친 차의 운전자가 도망친 사건이다. 뺑소니차의 주인은 결국 자수했고 강경호 씨의 아버지 강태호 씨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뺑소니차 운전자 허모 씨를 용서하겠다고 했다. 운전자 허모 씨가 자수한 날 밤, 희생자의 아버지는 경찰서로 찾아가 자수한 사람을 위로해주러 왔다며 ‘따스한 용서’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런데 하루 뒤에, 그 용서를 번복하며 분노했다. 그 이유는 뺑소니차의 운전자가 ‘스스로 잘못을 뉘우친 것’이 아니었고 사건 진술에도 진정성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 씨는 가해자를 원망하지 않을 것이며, 이미 용서할 준비를 모두 했으니 제발 진정으로 뉘우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호소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피해자의 아버지가 이해하는 용서가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는 용서일 것이라 생각했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가해자의 뉘우침을 용서의 전제조건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용서란 무엇인가. 이 사건에서 드러난 용서는 수수께끼 같은 물음을 던진다. 크림빵 사건의 직접적 피해자는 이미 숨을 거두었다. 이처럼 직접적 피해자가 이미 존재하지 않을 경우,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누구에게 진정으로 ‘용서할 자격’이 있을까. 피해자의 부인인가, 그를 낳은 어머니인가. 직접적 피해자가 아니라 간접적 피해자인 아버지가 과연 “나는 용서한다”라며 용서의 행위를 할 수 있는가. 또한 용서를 하지 않는 것과 하지 않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왜’ 우리는 용서해야 하는가. 용서하면 피해자가 분노나 복수의 마음에서 해방되기 때문인가. 아니면 가해자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인가. 용서는 ‘언제’ 해야 적절한가. 예를 들면 가해자가 용서를 요청한 후인가, 아니면 가해자가 용서를 구하는 것과 상관없이 아무 때나 할 수 있는가. 또한 용서에는 반드시 전제조건이 있는가. 즉 용서를 하기 전에 잘못을 저지른 가해자가 뉘우치거나 회개해야만 비로소 용서가 가능한가. 이러한 물음들은 용서의 지평이 얼마나 복잡한지 보여준다.
인간은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잘못을 저지른다. 너무 단순하고 평범하게 들리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사실은 ‘인간이란 누구인가’에 대해 더욱 깊은 차원에서 사유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잘못을 저지르는 존재’다. 이 회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은, 개인뿐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놓은 다양한 제도 중 그 어떤 것도 한 점 오류 없이 완벽하지는 않다는 사실과도 연관 지을 수 있다. 사회 공동체, 종교 공동체, 교육 공동체 등 인간이 만든 제도들은 개인에게, 그리고 특정한 인종·종교·국가·성적 성향·장애 등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폭력과 상처를 안겨준다. 게다가 친구·동료·가족 등 친밀한 관계 속에서도 인간은 잘못을 하고, 상처를 주고받는다. 그런데 돌이킬 수 있든 없든, 또는 크든 작든 간에 어떤 잘못을 했을 때 용서받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국적·종교·문화·성별·나이·학력·직업 등에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때가 있으며,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잘못에 대해 용서받기를 원한다.
결국 인간이란 누구나 용서받고 용서하는 것에 대하여 씨름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인간의 현실에서는 언제나 용서라는 주제와 대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처럼 도처에서 사용되고 논의되는 용서는 구체적 삶의 정황에서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개인의 성품과 성향에 따라서, 용서에 대한 이해에 따라서, 또는 용서가 요구되는 구체적 정황에 따라서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러기에 용서에 대한 세심하고 폭넓은 이해는 용서를 실천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현실이 용서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용서는 자동적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용서를 하려면 인간의 의지가 작동되어야 하기에 용서의 범주와 내용을 이해할 때 용서의 남용이나 왜곡을 최소화할 수 있다.
용서의 문제는 개인과 집단이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인상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흔히 용서를 주로 종교적 차원의 문제로 생각한다. 그러나 용서의 문제는 인간 삶의 거의 모든 영역과 연계된다. 용서·사과·화해라는 깊숙이 연결된 주제들이 종교·문학·정치학·사회학·의학·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논의되었으며 출판된 책·논문·에세이는 물론 용서의 문제를 다루는 연구소나 센터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는 용서의 문제가 삶에서 얼마나 광범위하고 절실하게 자리 잡았는지 보여준다. 한편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용서의 문제가 다루어진다는 사실은, 용서의 문제가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매우 복잡하고 복합적인 주제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공적 영역에서 용서의 문제가 등장한 여러 경우가 있으며, 그중 하나로 남아공의 예를 들 수 있다. 남아공의 인공차별 정책 폐지 후 1995년에 만들어진 ‘진실화해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는 인류사 속 다양한 갈등과 분쟁에 새로이 접근하게 해주었다. 이 위원회의 의장은 198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와 함께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에 맞서 싸웠던 성공회 대주교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였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설립 목적은 일반 법정이 추구하는 정의, 즉 가해자를 찾아내 처벌하고 응징하는 데 초점을 두는 ‘응보적 정의’에 있지 않았다. 물론 구체적 현실에서는 이 같은 응보적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응보적 정의의 모색에는 한계가 있다. 피해자가 받은 상처에 대한 치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후 3장 ‘용서의 종류’에 나오는 ‘정치적 용서’ 항목에서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하나의 범죄 사건에서 회복적 정의는 응보적 정의와 달리 우선 피해자에게 초점을 맞춘다. 되도록 피해자가 받은 다양한 상처와 피해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데 중점을 둔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가해자들도 사회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끔 가해자와 피해자의 화해와 용서를 통한 책임 있는 변화를 모색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진실화해위원회는 남아공의 혹독한 인종차별 정책에 대해서 응보적 정의가 아닌 회복적 정의를 이루려 애썼다. 이 위원회의 활동은 갈등 해소, 국제법, 보상 이론을 비롯해 정치적 화해에 대한 다양한 정치 이론이 전격적으로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렇게 급부상한 이론들은 ‘용서’에 관해서는 물론 사면·자비·사과·화해 등 용서와 관련된 주제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논의를 촉발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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