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반골의 탄생
마르틴 루터는 1483년 11월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지였던 독일 작센안할트 주의 소도시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다. 엄격했던 아버지 한스는 처음에는 아이슬레벤과 만스펠트의 구리 광산에서 광부로 일했다. 그곳은 산의 굉음만 들엉어도 간담이 서늘해지고 광산이 붕괴하거나 폭발할 위험이 상존했으며 부상과 사망이 속출하는 곳이었다. 당시의 광부들은 동정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 안나를 믿었는데, 성 안나에게 열심히 빌면 모른 체하지 않고 늘 ‘행운과 재물’로 보답해준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부들의 건강과 안위를 지켜주는 수호성인도 성 안나였다. 그리고 행여나 사고가 일어나면 그것은 운명이 아니라 바로 죽음의 왕자인 악마의 소행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악마를 몹시도 두려워했다.
중세 유럽 사람들에게 악마는 언제나 어디에나 있는 존재였다. 사람들은 악마가 파괴와 절망을 퍼뜨릴 뿐 아니라 말할 수 없이 교활하게 온갖 창의력을 발휘하여 방심한 사람들을 속이고 못된 장난질로 괴롭힌다고 생각했다. 루터는 이렇게 회고했다. “악마는 광산의 인부들을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다. 악마의 장난으로 인부들은 새로운 은광을 발견했다고 생각하여 열심히 파고 또 팠지만 결국에는 환영에 속은 것으로 드러났다.”
루터의 아버지가 초자연적인 힘에 시달리고 있었다면 어머니는 커튼 뒤에 악령들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아이들은 악령들의 주술과 함정에 취약했다. 루터는 어릴 적 아이들에게 주문을 걸었다는 이유로 마녀를 처벌하는 실수를 범했다가, 오히려 마녀의 마법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한 주임사제를 기억했다. 아이들은 바람이나 요동치는 물결에 실려 오는 이상한 소리를 조심해야 했고 어두운 숲, 특히 습지가 있는 곳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라는 주의를 들었다. 무심코 그곳에 발을 들였다가는 여러 형태로 숨어 있던 악령들의 표적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악마는 자주 곤충이나 벌레로 위장했다. 특히 벌레가 의심을 받았는데, 스멀스멀 기어 다니고 색을 바꾸는 모습이 ‘악마의 표상’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악마는 그저 사람들을 직접 죽이거나 죽게 만드는 곤충이나 뱀의 형태를 띠는 데 그치지 않았다. 악마는 전 세계의 화학자들이 합심하여 만들어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독을 가진 노련한 살인자였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을 기만하고 속이기 위해 순진한 양의 탈을 쓸 수도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세상은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1491년 루터의 가족은 근처의 소도시 만스펠트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아버지 한스는 성공하여 구리 제련소를 몇 개나 운영하는 동시에 존경받는 시의원이 되었다. 어린 루터는 만스펠트와 뤼링겐 주에 있는 아이제나흐의 가톨릭 학교에서 라틴어를 배웠다. 아이제나흐 위쪽으로는 유명하고 웅장한 바르트부르크 성이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30년 후 루터가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대변한다고 자칭하던 인간 세력들로부터 피신해 숨어든 곳이기도 하다. 소년 루터는 쾌활하고 노래 부르는 것을 즐거워했으며 음악을 사랑했고 루트 연주에 통달했다고 한다.
1501년 루터는 독일에서 가장 유서 깊고 뛰어난 에르푸르트 대학 교양학부에 입학했다. 16세기에 에르푸르트는 독일어권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로서 인구는 프랑크푸르트와 라이프치히의 두 배인 2만 4천 명이나 되었다. 에르푸르트 대학은 중부 유럽에서는 가장 많은 학생 수를 자랑했다. 학생 시절 루터는 다변가로 알려져 ‘철학자’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했다. 1505년에는 학사 학위를 받은 뒤, 당시 영향력 있는 중산층이 되어 있던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법률대학원 과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스물한 살이던 1505년 7월 시골에 머무르던 중 슈토테른하임 근처 한적한 길에서 심한 뇌우를 동반한 폭풍우를 만났다. 겁에 질린 루터는 나무 아래로 기어가며 구리 광산의 광부들이 늘 그러듯 성 안나에게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만일 그 폭풍우에서 살아남게 된다면 수도자가 되겠다고 즉흥적으로 맹세했다. 루터가 그 결심을 밝히자 아버지는 최소한 자기와 먼저 상의하지도 않고 법률가의 길을 포기했다고 불같이 화를 냈다.
“성경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해야 한다고 씌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단 말이냐?” 아버지는 성경까지 들먹이며 역정을 냈다.
나중에, 루터는 그 맹세가 진심이었는지 의문을 품는다. 1521년에 쓴 「수도서원에 대하여」라는 소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자유롭게 또는 원해서 수도자가 된 것이 아니라 갑자기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와 고통에 짓눌려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서약했다.” 어쨌든 슈토테른하임의 폭풍우가 있던 날로부터 12일 후 갖고 있던 책 가운데 베르길리우스와 플라우투스의 저작만 빼고는 모두 팔아치우고 에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노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6년 동안 루터는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엄격한 규율에 따라 살았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그곳에서의 삶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그에 대해 루터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하나님께 화가 나 있었다. 비참한 죄인들이 원죄로 인해 영원히 방황하고 있다는 설명만으로는 뭔가 충분치 않은 것 같았다. 죄인들이 십계명이라는 율법에 매어 갖가지 불행에 짓눌려 있는 것도 납득되지 않았다. 그러자 성서에 적힌 대로 하나님께서는 언제 진노할지 모르는 무서운 분이며 고통을 가중시키는 존재로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극심한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에 몹시 화가 났다.”
루터의 고해신부는 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해주었다. “자네는 어리석군. 하나님께서 화를 내고 계신 것이 아니라, 자네가 그분께 화를 내고 있는 걸세.”
1507년 4월 사제서품 뒤 루터는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부총장인 요한 폰 슈타우피츠로부터 영적 지도를 받게 되었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의 재능을 높이 샀지만 그의 심각한 회의와 불안감을 우려했다. 그래서 이 젊은 사제의 고해를 들어주며 그를 다독여주었다. 루터는 늘 하던 고해성사조차도 몇 시간이나 지속할 때가 자주 있었다. 학업에 매진하다 보면 내적인 성찰에만 집중하던 데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해, 슈타우피츠는 루터에게 학문 쪽으로 진로를 바꿀 것을 권유했다. 그리고 1512년 루터가 박사학위를 받자 신생 비텐 베르크 대학의 성서학 교수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 후로 몇 년 동안 루터는 인문주의의 도전에 대한 내적 논쟁과 성경 교리의 첨예한 부분에 대한 소논문을 쓰는 데 전념했다. 1514년에 비텐베르크 교회의 주임사제로 부임한 후에는 뛰어난 강론으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성서의 이야기들을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단순한 언어로 설명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로마 가톨릭교계 내에서 루터는 더 막중한 책무를 맡게 되었음에도 교황청과의 관계는 점점 멀어졌는데, 그 이유는 율리우스 2세 서거 뒤 새로 취임한 교황이 원인을 제공한 측면이 크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