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욕망사회
학교 정문에서 나를 발견한 여섯 살 난 아들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아들은 수업이 끝난 후 쇼핑을 가기 위해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아들은 미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아빠 백화점에 가자. 살 게 있어.”
사는 곳 근처에는 그리 크지 않은 백화점이 있었고 아들은 늘 그곳에 가고 싶어 했다. 나는 아들에게 말했다.
“뭐가 필요한데? 꼭 필요한데 집에 없는 물건이면 사러 가자.”
아들은 내 말을 듣고 잠시 당황해하더니 이렇게 답했다. “지금은 뭘 사야 할지 모르지만 백화점에 가면 사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게 될 거야.”
“백화점에 가면 알게 된다는 게 말이 되니? 그냥 집으로 가자.”
나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아들은 수긍하지 않고 말했다.
“아빠는 지금 내 말을 이해 못하는 것 같아. 나는 무언가를 사야 해. 지금은 뭘 사야 할지 모르지만 백화점에 가서 둘러보면 알게 된다고.”
아들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나는 흥분하지 않고 차분히 아들을 설득했다.
“얘야, 너는 지금 뭘 사야 할지 모르고 있어. 뭐가 필요한지도 모르고. 정말 필요한 물건이고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때 사기로 하자.”
아들은 내 말을 들으면서 점차 인내심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설득시킬 말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듯했다. 아들은 간청하듯이 말했다.
“아빠, 아빠는 나를 이해하지 못해. 내가 말했잖아. 백화점에 가서 보면 무엇을 살지 알게 된다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은 백화점에 가지 못해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아마 아들은 나를 설득할 말을 찾지 못해 못내 아쉬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나를 설득해 백화점으로 가서 무언가를 구입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15년 전 이야기지만 아직도 강의 때 이 일을 예화로 사용한다. 이 이야기가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아들과의 대화에서 볼 수 있는 첫 번째 문제는 ‘필요와 욕망’ 사이에서 발생하는 혼돈에 대한 것이다. 아들은 ‘뭔가를 살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의미했던 것은 ‘무엇인가를 사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실제 삶의 현장에서 경험하는 혼돈의 상황이다. 나는 무엇인가 ‘바라고’ 있을 뿐이다(많은 경우 우리는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필요’하다고 말한다. 필요라는 건 일반적으로 욕망과 관련된 어떤 대상과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그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외국으로 여행을 가고 싶어 한다. 그는 비행기 표를 구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자기 돈으로 항공권을 구입하던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이처럼 필요는 욕망, 혹은 바라는 목표, 대상과 자연스러운 관계를 갖는다. 만약 외국으로 여행 가겠다는 욕망이 없으면 항공권을 구입하기 위해 돈을 벌거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필요가 욕망(바람)과 맺고 있는 관계다.
그러나 욕망은 전혀 다른 형태로 작용하기도 한다. 왜 해외로 여행을 가고 싶은가? 이 질문에 여러 가지로 답할 수 있다. 다른 나라를 알고 싶기 때문에, 혹은 외국에는 아름다운 곳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등. 하지만 이것은 타당한 근거를 갖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그곳에 가고 싶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소원, 욕망)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다. 내가 원하기 때문이다. 각자의 소원(욕망)은 개인의 결단이며 개인이 누리는 자유의 산물로 간주된다. 만일 우리가 소원(욕망)하는 내용을 바꾼다면 이와 관련된 일들은 좀 더 복잡해질 수 있다. 특정한 것을 욕망하다가도 시간이 지난 후 마음이 바뀌어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이유도 모른 채 말이다.
우리는 욕망하는 것을 소유하기 위해 많은 노력과 비용을 지출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더 이상 좋아하지도 사용하지도 바라보지도 않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옷을 사는 행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즐겨 입던 옷이나 액세서리가 어느 순간 싫증이 나고 더 이상 착용하지 않게 되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 옷을 입는 것 자체를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물건은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더 이상 원하지도, 예쁘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우리 마음이 변한 것이다. 감각은 왜 이렇게 빨리 변하는 것일까?
유행은 본래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충분한 설명이 되진 않는다. 우리에게는 또 다른 궁금증이 생긴다. 그렇다면 유행은, 그리고 우리의 욕망은 왜 이렇게 빨리 변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만족할 만한 답변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욕망한다.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아들의 경우와 유사하게 우리는 무언가 구입하고자 할 때 무엇을 사야 할지 모르는 순간을 경험한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라는 것을 소유한 후에도 많은 경우 실망한다. 소유하게 된 것이 자신을 완벽하게 만족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물론 계속해서 쇼핑을 즐기고 있을 때 만족감을 느끼기도 한다. 어떤 경우엔 환희를 경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정 시간이 흐른 후에는 공허해지고 우리의 욕망이 만족스럽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다시 공허함을 메꿀 무언가를 구입해야 한다는 필요를 느낀다. 또다시 욕망과 필요 사이에서 발생하는 혼돈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구입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결국 우리는 삶에서 경험하는 공허함을 메꾸기 위해, 우리의 절망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욕망한다. 이를 위해 무엇인가 소유해야 한다는 생각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시간이 흐르고 이 과정을 반복해서 경험하다 보면 나름대로의 답을 찾게 된다. 답은 무의식적인 형태로 우리 안에 형성된다.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형태가 아니다. 하지만 하나의 해답으로 작용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것은 구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언가 구입해야 한다는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은 우리를 기분 좋게 만든다. 무엇을 구입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 아들은 무엇을 살지도 모르면서 무언가 사려고 했다. 하지만 이 일은 어린아이뿐만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나타난다. 아들의 경우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혼자 백화점을 갈 수 없었다. 그로서는 자신의 욕망을 아버지인 나에게 설명하고 실현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했을 뿐이다. 그러나 아이가 성장하고 경제적인 능력을 갖게 되었을 때는 더 이상 나와 했던 것처럼 대화를 하지 않고 혼자 백화점에 가서 갖고 싶은 것을 구입할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건 아무것이나 우리가 바라는 욕망을 만족시켜 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원하지 않는 옷을 살 수도 있다. 경제적 사정에 따라 저렴한 것을 선택해야 할 때도 있다(유행이 지났거나 세일 상품일 수도 있다). 가격이 인하된 옷을 사는 행위는 필요는 채워주지만 욕망을 만족시켜주진 못한다. 유행이 지난 옷을 사는 행위는 욕망과 필요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분명하게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원하는 물건을 구입하고자 할 경우에는 욕망과 필요 사이의 관계가 보다 복잡해진다.
아들과의 대화로 다시 돌아가 보자. 아들은 자신도 모르는 무엇인가를 사기 원했다. 분명한 건 아무거나 사고자 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들을 데리고 백화점으로 갔다면 그는 분명 비슷한 연령대의 아이들이 갖고 싶어 하는 것, 당시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는 것을 구입했을 것이다. 그가 사고 싶어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원하고 있는 물건일 확률이 높다.
우리가 구매 욕망을 만족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될 때, 우리는 욕망이 순수하게 필요성과의 관계에서 독특한 모습을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엌 용품을 구입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것을 사지 못한다면 필요를 충족하지 못해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필요한 것을 넘어 욕망하는 것을 구입하지 못하게 되고 그 욕망을 실현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직면하게 될 때, 우리가 느끼는 실망감은 삶의 내면까지 영향을 미친다. 즉 욕망은 우리 삶의 내면 깊은 곳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욕망하는 사람은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르면서 욕망하게 될 것이다. 모든 대상이 자신의 욕망 대상으로 보일 것이다. 또한 무엇을 욕망하는지도 모른 채 욕망함으로 인해 그 어떤 것도 자신의 욕망을 완벽하게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 무엇도 그들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항상 공허함이 자리 잡고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른 채 끊임없이 무언가 구매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사고자 하는 욕구, 그것의 유익성도 모른 채 그저 구매 욕구를 불태우게 되는 이 같은 실존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나는 어린 시절을 한국에서 보냈다. 그 시절 한국은 가난했고 자본주의 사회였다. 그때에도 나는 어떤 욕구를 느끼곤 했다. 무언가 늘 사고 싶어 했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 중 하나이다. 그러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사기 위해 백화점에 가야겠다는 필요와 욕망을 느끼지는 않았다.
화려하게 장식된 상점에서 선호하는 상품을 구입하겠다는 욕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고유한 현상이다. 이러한 욕망은 가장 사소한 것에서 시작해 삶의 깊은 곳으로 침투해온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삶에서 욕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것은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 요소이다. 우리는 욕망하는 존재이다. 필요를 느끼는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은 욕망에 의해 동기부여를 받고 움직인다. 단지 지금 원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원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을 뿐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영향이거나 그렇게 욕망하도록 조종하는 외부 요인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사회의 영향, 특히 광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나는 인간의 행위를 유발시키는 욕망인 광고와 마케팅을 통해 이 사회를 ‘욕망사회’로 만든 자본주의를 성찰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이 글을 썼다. 욕망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회는 우리를 욕망하게 만들어 무한 경쟁의 세계에 몰입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제, 무엇이 우리를 욕망하게 만드는지 그 속으로 들어가 보자.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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