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여성으로 만 58년을 살아온 내가 70대 초반 두 남성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일은, 위험해서 매혹적이었다. 위태롭고 험한 짓은 삶에서 결정적 선택을 할 때마다 중요하게 고려한 사항이었다. 아마 첫째일 거다. 해야 할 일인지를 판단하는 게 내 바깥의 문제라면, 위태롭고 험한 짓은 내 변태적 욕망의 발동이라 원초적이다. 쉰여덟 먹은 여자가 일흔 넘은 남자에게 삶을 이야기하자고 꼬이는 일은, 나이도 어리고 여자인 내가 지는 싸움을 덤비는 거다. 맞장을 뜨자는 도전장이기도 했다.
위험을 즐기는 유일한 방법은, '깨지는 김에 배우자'다. 깨질 게 뻔하니까 여성들하고 작업할 때보다 더 많이 예습하고 복습했다. 더 많이 공감하고 조심하기로 다짐했다. 아버지에 맞선 싸움이 생의 근원적 힘인 나는, 그 싸움 때문에 생긴 남성에 관한 고정 관념과 편견을 살피고 해체하려 했다. 남성들을 손님으로 대하려 노력했다. 남자들은 나보다 더 많이 떠돌았고, 나는 부러웠다. 돈도 없고 무릎도 션찮은 내게 물리적 유랑은 이제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내 안과 밖으로 더 많은 위험과 유랑을 숙제로 내본다.
세상 속 나의 '지금 여기'
2014년 4월에 시작한 첫 인터뷰부터 그럭저럭 잘 나가던 작업은 올해들어 후기를 쓰면서 막혔다. 우울감에 빠졌다. 두 양반 사진을 모니터 뒤 벽에 붙여놓고 별 욕을 다했다. 가끔 함께 밥도 먹고 못 먹는 술도 마시며 일부러 시비도 걸었다. 글을 쓰려고 용을 쓰는 대신 못 쓰는 이유를 정리해봤다.
첫째, 책 두 권을 낸 뒤에 후기를 잘 쓰려는 욕심이 많아졌고 고민도 진전됐다.
둘째, 남자들의 삶은 여성들하고 많이 달랐다. 주인공들은 평생 다양한 계급과 계층으로 살아왔다. 그렇지만 지금의 계급이 아니라 다른 계급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해석하고 역지사지하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옹호는 옹호대로 시비는 시비대로 걸어야 했다. 개인이나 가족보다 사회 이야기가 많이 나왔고, 공부도 해야 했다.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벽이 있었다. 나는 그 벽을 해석의 차이 때문이라 봤는데, 남자들은 경험의 차이라고 주장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는 이영식의 말에 동의한다.
셋째, 내게도 시비를 걸었다. 여성주의, 진보, 구별 짓기, 계몽 습속, 가난한 사람들이 늘 핀잔하는 가난을 옹호하는 태도 등을 의심했다. 김용술의 돼지호박 5500원어치, 이영식의 목수 노동, 1일 4~5시간의 최저 임금 노동. 나는 그 비루한 생계를 잘 알고 있고, 일부러 망원시장 한가운데 주상 복합 건물로 이사했다. 창밖 망원축산 아줌마가 종일 외치는 호객 소리를 막아보려고 한여름에도 창문을 닫아걸고 생각과 글을 이어가는 이 짓은 대체 무엇인지 질문했다. 지금까지 답은 위치 알기다. 세상 속 나의 '지금 여기'를 가늠하고, 주인공들의 '지금 여기'를 함께 가늠하는 게, 구술사 과정에서 뜬그름 잡기한 사유의 쓸모다. 아마 이 셋째에서 많은 오류를 저질렀을 테고, 게다가 오만했지 싶다.
부족하거나 틀리더라도, 나는 진심으로 두 남자를 옹호하고 싶고, 두 사람이 세상의 주인임을 함께 확인하고 싶다.
정상의 성 규범과 가난한 남성 노인의 삶
'정상의 성 규범'이란 이성애의 결혼 관계 안에서 남성 주도로 건강한 남녀가 건강한 아기를 출산하며 육아와 교육비를 가족이 책임지는 방식을 정상으로 분류하는 가부장적 성 규범이다. 이 규범에 따르면 이성애가 아닌 다양한 성들은 비정상이 돼 비난받고 심지어 법의 처벌까지 받는다. 건강한 국민과 노동력을 싸게 공급받으려고 국가와 자본은 정상의 성 규범을 끊임없이 유포한다. 정상의 성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를 비정상이라 비하하고, 죄인으로 여기게 된다.
김용술.세ㅗ과 이영식70세은 남성이어서 여성보다 정상에 가깝다. 그런데 늙고, 가난하고, 결혼 관계가 깨지거나 결혼을 못했다. 그만큼 정상에서 밀려났다. 김용술은 자식이 셋 있는데, 이영식은 자식조차 없어 더 비정상으로 밀려났다.
남성의 성에 관한 주요 항목인 '강함' 면에서 김용술은 정상에 가까워보인다. 반면 이영식은 성생활을 자세히 말하지 않아서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작은 키', '조루와 여성을 향한 불안' 등을 말하는 대목에서는 비정상에 가까운 듯했다.
김용술은 대부분 결혼 바깥에서 일어났다. 남자가 '많은 여자'를 겪었다고 하면 남들은 부러워한다. 김용술의 성은 정상 쪽이다. 성평등 면에서 김용술의 여성관이나 성관념은 처음에는 문제가 많았지만, 차츰차츰 평등한 관계로 발전했다. 성을 통해 김용술은 쾌락을 추구했다. 상대 여성이 느끼는 쾌락을 위해 발전했다. 또한 '싫다는 여자랑은 안' 했다고 했다.
김용술은 한 번 만난 여자도 많지만 동거도 여러 번 했다. 여자 때문에 밥벌이와 사는 곳을 자주 바꿔왔다. 가난한 사람들의 성생활이 지닌 특징이다. 이영식은 결혼은 못했지만 여자 관계는 많았다고 했다. 김용술만큼 가난했지만 이영식의 성생활은 밥벌이의 변화나 이주까지 연결되지는 않았다. 서른 초반부터 30년 넘게 동안 건설 노동자로 살아온 탓이었다. 부동산 부자들이 만드는 공사장을 따라 이영식은 전국을 돌아다녔고, 관계하는 여자들도 함께 바뀌었다. 서른 초반에 다방 주방을 보며 8개월을 한 여자하고 한 동거 말고는 동거랄 만한 것도 없다.
많은 가난한 남성은 이영식보다 김용술에 가깝다. 성생활과 관계와 직업 변경과 주거 이주 사이의 상관성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높다. 돈 많은 남자들은 정상적인 가족과 직장과 주거지를 유지하는 동시에 결혼 바깥에서 성을 즐긴다. 부자는 결혼 관계를 깨지 말아야 할 이유가 많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성관계 때문에 삶이 통째로 흔들리거나 바뀐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불안정하고 변화에 취약하다.
성이 반드시 관계에 연관돼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 혼자 즐기는 성, 쾌락, 사랑도 그것 자체로 충분히 좋다. 내가 유일하게 문제 삼는 점은 평등이다. 김용술은 이혼의 원인 제공자로서 현모양처인 전 아내와 단절된 자식들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아내의 외도도 자기가 여자의 성욕을 잘 모른 탓이라고 인정했다. 늙은 나이에 성욕이 여전한 자기를 비정상으로 여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러워한다. 반면 이영식은 유도 질문을 해도 여자 관계를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쓸데없는 짓'이라거나 '방황'이라며 넘어갔다. 성 자체뿐 아니라 결혼 바깥의 성, 다양한 성경험 등을 비하했다. 정상의 성 규범을 내면화한 탓에 가난과 결혼 못한 것, 늙은 것에 관한 자기 '비하가 성에도 일관되게 이어졌다. '다 늙은 데다 돈도 없는 나한테, 어떤 여자가 같이 살자고 하겠어요'라며 엄두도 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연애를 하고 싶다'고 한다.
구멍 뚫기 - 하염없는 이 일에 함부로 애틋하게
나는 좌파다. 무슨 욕을 먹든, 어떤 오류가 있든, 나는 좌파다. 어떤 사회에서도 좌파일 테고, 그게 내가 세상을 사는 맛이다. 아무리 피하려해도 나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 힘으로 만들어내는 일을 해왔다. 그렇지만 진보 정치의 폐색으로 나는 길을 잃었다. 정치를 잃은 열정은 사그라지지 않고 속을 바짝 마르게 했다. 구술사 작업은 그 와중에 난데없이 만난 구멍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세상을 만나는 새로운 구멍을 얻었고, 주인공과 나는 새로운 '나들'을 찾아 나간다. 경험과 해석들을 나누며, 구멍을 뚫는다.
그 사람들의 경험과 처지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역사와 정치와 규범에 연관되는 실마리를 찾는 일이 목적이었고, 주인공들에게 시비를 건 내용이었다. 하염없는 일인데, 돌이켜보면 내가 맛 들인 일들은 모두 하염없는 일들이었다. 되도록 집요하게 천착하고 싶다. 구멍을 뚫어도 답이야 없을 거다. 의심의 실마리들만 잘 이어가면 된다.
2015년 10월 22일 새벽 3시, 망원시장에서
김용술
"나는 잡초야, 어떤 구뎅이에 떨어져도 악착같이 다시 일어나"
김용술은 노인 복지 제도를 통해 만났다. 독거노인 생활관리사인 나는 말은 지역의 독거노인들에게 때마다 전화하고, 찾아가 안전을 확인하고, 후원 물품을 전하고, 노인 복지 자원을 연결하는 일을 했다. 2013년 9월부터 2014년 2월 말까지 김용술이 사는 지역을 맡다가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겼다.일상적으로 안전을 확인하지 않아도 될 만큼 김용술은 신체나 정서가 안정된 편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그 지역을 인계받을 때부터 명단에 있었고, 구태여 서비스를 멈출 필요는 없었다. 더구나 처음 만날 날 백혈구 수치가 높아 혈액암 가능성이 있어 입원이나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걱정하는 기색도 없었다. 나는 그날 집에 오자마자 의료비 긴급 지원 등을 알아봤다. 김용술은 이 나이에 수술하고 입원할 생각은 아예 없다고 했다. 다행히 수술은 하지 않고 정밀 검진을 한 뒤 약을 먹는다. 지금도 '겉은 멀쩡하고 의사들만 아는 병'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솔직하고 소탈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주인공으로 점찍었다. 서너 달 뒤 내가 쓴 여성 구술사 책을 건네며 인터뷰를 제안했다. 잘나가는 사람을 하지라면서도 흔쾌히 응했다.잠자는 곳이자 돈 버는 곳인 '가죽 수선' 지하 1층 공간을 비울 수 없어 인터뷰는 거의 그곳에서 했다. 같이 밥을 먹거나 술 한잔을 하는 자리에서도, 나는 녹음기를 눌러놓자고 했다. 녹음기 따위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가난하기는 했지만 서럽고 어두운 기억이 없어
김용술
내가 45년생 해방둥이야. 3월생이고 태어나기는 전북 부안 동진면이고, 아버지 고향이었지. 일제 시대였잖아. 아버지가 재산이 많았는데 다 들어먹었어. 뺏긴 거지 뭐, 일본 놈한테. 그러니 어머니가 먹구 살려구 군산으로 갔다가 전쟁 끝나고 다시 강원도 속초로 옮긴 거야. 속초로 이사 간 게 초등학교 1학년 끝나고야.
아버지는 1912년생 김자 낙落자 찬燦자, 김낙찬이셔.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나 몰라. 망한다는 이름이잖아 그게. 찬란함이 떨어진다. 아버지가 부안 김씨에서는 뭐가 좀 있는 양반이야. 4대 독자에 지주였으니까. 어머니는 1915년생이고 함자가 주증增엽葉이야. 딸 이름 치곤 정성스럽지. 여자들은 기껏해야 '끝녀', '말순이' 그랬지. '복순이', '순자'만 해도 좋은 거였구. 어머니 고향도 부안 근처인데 어딘지는 확실히 모르겠어. 나 태어날 때가 아버지 서른넷, 어머니 서른하나 그랬어.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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