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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안주의 시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 중에는 통념이 된 것이 있다. 그 통념에 따르면 19세기까지 인간은 이른바 ‘전통 사회’에 살았다. 전통사회에서는 항상 행동 지침에 따라 생활하라고 배운다. 사람들은 기존의 사회 구조 안에서 태어나고, 사회는 사람들의 삶을 결정한다. 농부로 태어나면 농부로 살고, 귀족으로 태어나면 귀족으로 산다.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느냐에 따라 돈과 권력을 얼마나 소유하는지도 결정된다. 태어나는 날부터 삶의 경로가 확정되는 것이다.
또 그 통념에 따르면, 19세기 유럽에서 마침내 이런 제약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처음으로 개인은 누구나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삶을 조절할 수 있다. 이성적 동물인 인간은 전에 없던 기회의 세상을 만들었다. 바로 이런 깨달음에서 근대가 탄생했다고 그 통념은 설명한다.
하지만 그렇게 제약을 깨뜨린 사회가 있는가 하면, 뒤처진 사회도 있다. 적어도 서양인은 그렇게 생각한다. 서양인 중 상당수가 고대 중국은 궁극적인 전통 사회를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계층화하고 질서 있는 세계에서 살기 위해 엄격하게 규정된 사회적 역할을 따라야 하는 사회다.
한마디로 배울 게 없는 사회가 분명하다.
물론 일반적 전통 사회, 특히 중국에 관한 글을 읽다 보면 그런 사회를 미화하는 부분도 눈에 띈다. 이를테면 오늘날 우리는 서로를 외면하며 살지만, 전통 사회 사람들은 자신을 우주와 조화를 이루며 사는 존재로 여겼다는 식이다. 우리는 자연계에서 떨어져 나와 자연을 통제하고 지배하려 하지만, 전통 사회 사람들은 자연의 이치에 맞춰 살려고 애썼다는 시각도 있다.
전통 사회를 바라보는 이런 감상적 시선 역시 배울 점은 없다. 이런 시선은 전통 사회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 바꿔놓을 뿐이다. 박물관에서 이집트 미라를 보며 신기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고대 중국의 유물도 마찬가지다. 구경거리로는 흥미진진하지만, 그 유물로 대표되는 세계와 시대로 돌아갈 마음은 없다. 그곳에서 살거나 그 세계에서 교훈을 얻을 마음도 없다. 전근대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세상을 이해한 사람은 ‘우리’이지 그들이 아니잖은가.
그러나 이제 곧 다루겠지만, 전통 사회를 바라보는 이런 판에 박힌 시선은 상당수가 엉터리다. 과거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여전히 많다.
역사를 이런 식으로 바라보면 인간 존재의 상당 부분을 무의미하다고 무시할 위험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지배적 사고만이 사람들의 손에 삶의 결정권을 쥐여주는 유일한 체계이며, 따라서 그것만이 옳다고 생각할 위험도 있다.
그러나 삶을 꾸려가는 인간의 방식을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다양하다. 그 점을 인식한다면 이른바 ‘근대적’이라는 것의 실체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수많은 사고방식 중 특정 시간과 특정 공간에 해당하는 하나의 사고방식일 뿐이다. 따라서 그 밖에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며, 이는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믿음에 배치되는 사실이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 자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대부분은 우리가 조상과 달리 기본적으로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19세기에 전통 세계와 결별하면서 마침내 세계를 어떻게 조직할지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200년 동안 사회주의, 파시즘, 공산주의, 민주 자본주의 등 서로 다른 여러 이념과 씨름했다. 그러다가 이들 가운데 하나를 뺀 나머지 이념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면서 마침내 ‘역사의 종말’을 맞이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신자유주의는 세계를 조직하는 올바른 체제로, 인간의 번영을 위한 최상의 체제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 듯했다.
하지만 선진국에서 불거진 불행, 나르시시즘, 불안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들 하지만, 빈부 격차는 더욱 크게 벌어지고 계층 간 이동 가능성 또한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근사하고 인상적인 온갖 기계 장치로 삶을 영위하고 의학은 전례없이 발전했지만, 환경과 인도적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다.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나면서 우리의 위대한 낙관주의는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는 세상을 구축한 우리 방식에 더 이상 예전처럼 자신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우리는 얼마나 세상을 이해했을까? 훗날 역사학자들은 이 시대를 번영과 평등과 자유와 행복의 시대로 회상할까? 아니면 21세기 초를 현실 안주의 시대, 다시 말해 불행하고 성취감을 느끼지 못한 시대, 위기가 점점 커지는 것을 목도하면서도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채 대안이 없다고 느낀 시대로 규정할까?
이 책에서 언급하는 중국 철학은 이런 ‘현실 안주의 시대’에 대한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를테면 민주주의를 대체할 만한 일관된 사상은 아니다. 그보다는 자아에 관한, 그리고 세상에서 자아의 위치에 관한 반직관적 개념이다. 아울러 그중 다수는 지배적 사고 체계의 틀에서 삶을 바라본 사상과는 정반대로 발전했다.
대략 기원전 600년에서 기원전 200년 사이 유라시아 전역에서는 철학 운동, 종교 운동이 폭발적으로 번져 인간의 번영에 관한 다양한 시각이 쏟아졌다. 이른바 ‘주축主軸시대Achsenzeit’라고 부르는 이 시기에 그리스에서 발전한 많은 사상이 그리스에도 출현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오늘날 서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매우 비슷한 사고방식이 중국에도 나타났다. 그러나 당시 중국에서는 이런 사고방식이 설 자리를 잃고 그와 반대되는 사상이 출현해 좋은 삶에 이르는 매우 다른 길을 제시했다.
전통적 사상을 근대적 사상과 반대라고 여기는 것이 옳지 않듯 ‘중국식’ 견해를 ‘서양식’ 견해와 반대라고 여기는 것 역시 옳지 않다. 앞으로 이러한 개념을 살펴보면서 중국이 근대 훨씬 이전부터 세계를 조직하는 최선의 방법을 논의했을 뿐 아니라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진정한 대안을 제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스스로 삶이 나아갈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
서양에서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한 계획을 이야기할 때면, 꼼꼼히 계산하면 방법을 찾을 수 있으니 자신감을 가지라는 말, 이성에 의지하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우리는 삶의 불확실성에 직면했을 때, 감정과 편견을 버리고 경험을 측정 가능한 자료로 바꾸면 기회를 포착하고 운명에 저항할 수 있다고 믿으며 위안을 얻는다. 도덕적, 윤리적 딜레마를 다룰 때 가장 흔히 사용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이때 우리는 대표적 상황을 가정하고 그것을 이성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유명한 전차 실험이 있다. 우리가 전차 역에 있고, 전차가 역으로 들어온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전차가 선로에 있는 다섯 사람을 치기 직전이다. 다행히 스위치를 당기면 노선을 바꿔 전차를 다른 선로로 보낼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선로에는 한 사람이 누워 있다. 이때 전차가 다섯 명을 들이받게 놔두겠는가, 아니면 스위치를 당겨 그들을 구하고 한 명을 죽게 하겠는가?
‘어떻게 해야 옳을까?’ 철학자와 윤리학자들이 평생토록 골몰한 것은 바로 이런 문제다. 그리고 이것이 시사하는 내용을 주제로 많은 글이 쏟아져 나오고, 한두 권의 책이 출판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시나리오는 의사 결정을 단순히 자료의 집합이나 단일한 선택의 문제로 전락시킨다. 우리는 대개 의사 결정이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 중국에서도 이런 식의 사고 실험을 했다. 그러나 중국 철학자들은 우리만큼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훌륭한 지적 게임이고, 하루 종일 여기에 매달릴 수도 있지만, 그것이 일상생활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자신은 삶을 이렇게 저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다. 마찬가지로 자신은 이렇게 저렇게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결정을 내리는 방식은 다르다. 어느 날 우연히 역으로 들어오는 전차에 누군가가 치일 것 같은 순간을 목격했을 때 내가 보이는 반응은 이성적 계산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감정과 본능이 압도적 힘을 발휘한다. 심지어 자신을 대단히 신중하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감정과 본능에 좌우된다. 이를테면 저녁은 뭘 먹을지, 어디에서 살지, 누구와 결혼할지 등에 대해서도.
중국 철학자들은 이런 문제 해결 방식의 한계를 인식하고 대안을 찾았다. 이들이 생각한 답은 본능을 연마하고, 감정을 훈련하고, 꾸준히 자기를 수양해서 아주 중요한 순간이든, 평범한 순간이든, 각 상황에 맞게 도덕적이고 올바르게 대응하는 것이었다. 이런 대응은 주변 사람에게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낸다. 이처럼 모든 우연한 순간과 모든 경험이 더 나은 새로운 세상을 능동적으로 만들어갈 기회를 제공한다는 게 이들의 가르침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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