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고전들
햄릿은
결코 우유부단하지
않았다
흔히 인간의 유형을 단순히 둘로 나눌 때 자주 인용하는 구절 가운데 하나가 바로 “햄릿형 인간 vs 돈키호테형 인간”일 것이다. 전자는 우유부단하고 유약한 사람, 후자는 저돌적이고 사려 깊지 못한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힌 표현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이해일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한 이분법이다. 우선 이러한 분류가 나온 배경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소설가 이반 투르게네프가 1860년에 발표한 에세이 『햄릿과 돈키호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먼저 『햄릿』과 『돈키호테』가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사실을 언급하며 연설을 시작한다. 그 내용의 일부를 들여다보자.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이 최초로 간행되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출현한 것은 17세기 초 같은 해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우연의 일치는 뜻깊은 일로 생각됩니다. 두 작품의 시간적 유사성은 우리를 일련의 사상으로 이끌어 줍니다.
돈키호테와 햄릿. 이 두 타입의 인물 속에서 인간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두 개의 근본적으로 대립된 특성이 체현되는 듯싶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소의 차이가 있을 뿐 이 두 타입 가운데 하나에 속할 것입니다. 이제부터 제가 파악한 두 가지 유형에 대해 제시하고자 합니다.
돈키호테는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요? 피상적이고 하찮은 것에 눈길을 멈추는 그런 성급한 시선으로 그를 관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기사 소설의 조소를 위해 창조된 인물로서 한낱 슬픈 기사의 모습으로만 그를 보아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는 이상에 대하여 철저하게 몸을 내맡기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이웃과 형제들을 위해서 살며, 악을 근절시키고, 비록 환상 속의 마법사와 거인들이기는 하지만 압제자인 적의 군사들을 물리치기 위해 삽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에서는 에고이즘이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이처럼 확고부동한 신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결코 주저하는 법이란 없습니다. (중략)
그렇다면 햄릿은 과연 어떠한 인물입니까? 그는 다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에고이스트입니다. 고귀한 햄릿에게 있어서 자아란, 자기 자신조차도 믿지 않는 자아인 것입니다. 햄릿의 사색이 그 해답을 얻지 못한 채 언제나 끊임없이 출발점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까닭은 바로 그가 자기 영혼의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야 할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삶의 의의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따라서 그는 회의론자이면서 그의 머릿속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문제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의 이지는 지나칠 정도로 발전하여 그의 내면 세계를 관찰하기에 충분합니다. 햄릿은 과장될 정도로 자신을 힐책하며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감시하고 자기 내부를 주시하는 것을 큰 만족으로 여깁니다. (중략) 따라서 햄릿과 같은 인물에게는 자기희생과 같은 행위는 결코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햄릿형의 인물은 민중에게 결코 유익한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그들은 민중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며 민중을 올바른 목표로 이끌어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자신이 가야 할 방향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햄릿형의 인물은 민중을 경멸합니다. 자기 자신조차 존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민중을 존중할 수 있겠습니까?
- 이반 투르게네프, 『햄릿과 돈키호테』 중에서
이 에세이를 잘 읽어 보면 투르게네프가 햄릿과 돈키호테를 구분한 기준은 ‘사회와 민중을 위해 희생하고 기여할 수 있느냐’의 여부다. 그래서 그는 “햄릿을 사랑하기는 힘들지만 돈키호테를 사랑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은 모른 채 우리는 그동안 햄릿과 돈키호테를 들먹이며 단순히 인간 유형을 이분화시키는 데 동참해왔다. 정작 작품은 제대로 읽지 않으면서 타인의(게다가 권위자라고 한다면 더더욱) 시선과 해석을 그대로 빌어서 맥락과 관계없이 인용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
햄릿,
복수를 위해 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햄릿은 결코 우유부단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처절한 복수의 화신이고, 행동가였다. 햄릿의 숙부 클로디어스는 왕위 욕심 때문에 형을 죽였다. 그리고 왕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런 클로디어스에게 복수를 행하고자 했던 햄릿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시대배경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햄릿은 황태자다. 다음 왕위를 계승할 공식적 위치에 있다. 그러니 클로디어스가 아무리 형을 제거한들 자신이 왕이 될 확률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여기에 많은 상상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당신이 클로디어스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왕위는 차지해야겠는데, 큰 걸림돌인 조카가 있다. 그렇다면 그 걸림돌부터 치워야 한다. 아마도 클로디어스는 형인 왕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전하, 우리나라가 더 강성해지기 위해서는 군주가 더 현명하고 강해져야 합니다. 그러니 태자를 선진 외국에 유학 보내심이 어떨까요?” 자식을 위해, 그리고 국가를 위해 좋다는 데 그걸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 햄릿은 먼 외국으로 보내졌을 테고, 1막 1장에서 햄릿이 부왕이 죽은 뒤에 귀국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햄릿은 부왕의 서거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했다. 그러나 지금과 달리 소식을 전하는 데에 여러 날이 걸렸을 것이고, 또 돌아오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 사이 숙부 클로디어스가 왕위에 오른 것이다. 햄릿은 자신이 가진 전부를 잃었다. 아버지를 잃고, 자신에게 돌아와야 할 왕위도 잃었으며, 어머니마저 숙부와 결혼하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빈털터리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남은 건 약혼녀 오필리아뿐. 그러나 아버지의 유령을 만나 일의 전모를 알게 된 햄릿은 복수를 다짐하며 오필리아를 포기한다(참고로 동생에게 암살당한 국왕은 종부성사—생전에 마지막으로 치르는 기독교 의식—를 받지 못했고, 죄를 용서받지 못해 천국으로 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유령의 모습으로 아들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젊은 청춘에게 사랑은 자신의 삶 전부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는 사랑하는 여자를 포기했다. 왜 그랬을까. 혹시라도 사랑에 빠져 현실에 안주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햄릿에게 자신의 존재 의미는 복수뿐이었으므로.
흔히 햄릿의 우유부단함을 일컬을 때 빠뜨리지 않고 언급하는 그 유명한 독백,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죽을지, 살지를 묻는 단순한 주저함이 아니다. ‘나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의 답이 ‘복수하기 위해서’임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복수하지 못하면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다짐인 것이다. 속뜻을 헤아리지 않고 읽으면 이렇게 엉뚱한 다리를 긁기 쉽다.
문학사상 가장
처절한 복수
천우신조라더니 마침내 복수의 기회가 왔다! 햄릿은 그동안 왕이 된 클로디어스를 죽일 방법이 없었다. 그는 늘 호위무사와 함께였고, 왕을 만나러 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무장해제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절망적인가. 그런데 복수의 기회가 온 것이다. 어느날 저녁, 햄릿이 왕의 침소를 지나는데 웬일인지 호위무사가 없다. 게다가 왕은 비무장 상태에서 벽을 바라보고 있어 다가가도 알아채지 못해 쉽게 복수를 감행할 수 있다. 햄릿은 몹시 기뻐하며 슬그머니 클로디어스의 등 뒤로 다가가 단검을 꺼내든다. 이제 찌르기만 하면 끝이다. 마침내 복수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햄릿은 머뭇거리다가 칼을 다시 칼집에 넣고 돌아선다. 세상에! 이게 무슨 황당한 ‘시츄에이션’인가? 이 장면으로 인해 햄릿은 우유부단함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과연 햄릿은 우유부단하기 때문에 그랬을까? 다시 오지 않을 그 기회를 왜 놓쳐 버리고 말았을까?
햄릿의 행위를 이해하려면 먼저 당시의 종교적 배경을 짚어야 한다. 알다시피 유럽은 기독교 문화다. 그날 클로디어스는 저녁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악당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죄를 알고 있었을 것이며, 당연히 기도를 하면서 신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에 찔러 죽인다면? 그것은 복수가 아니라 자선일 뿐이다. 신에게 용서를 받아 정화된 몸으로 죽으면 지옥에 가지 않는다. 그것은 복수가 될 수 없다! 그 짧은 순간에 햄릿은 이렇게 치밀한 부분까지 생각한 것이다.
대개 우리는 최고 수준의 복수를 원수의 목숨을 빼앗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햄릿은 죽음 이후 사후세계에서의 징벌까지 생각했다. 이보다 더 처절한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없다. 햄릿은 숙부의 사악함이 가장 극대화되었을 때 죽여야 비로소 제대로 복수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햄릿은 극상의 복수심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이런 햄릿을 과연 우유부단한 인물이라 할 수 있을까? 행동이 결여된 사색적인 인간일까?
잘못된 판에 짜인 해석과 이해는 오히려 독이 된다. 충분한 근거와 상상력, 그리고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해석이 우리를 제대로 된 독해로 이끌 것이다. 고정관념을 깨야 편향적이고 무비판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한발 나아갈 수 있다.
21세기에
희곡을 읽는 법
셰익스피어는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존경받는 희곡작가다. 생전에 수많은 주옥같은 희곡들을 쏟아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한 사람이 도저히 그 많은 걸작을 써낼 수 없다며 집단적 산물로 보거나 심지어 그를 가공의 인물이라고 의심하기도 한다. 동시대인이었던 영국의 극작가 벤 존슨은 “셰익스피어는 당대뿐 아니라 만세에 통용되는 작가”라고 했으며 역사학자 토마스 칼라일은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물론 이 말은 정형적인 오리엔탈리즘에서 나온 위험한 발언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셰익스피어 희곡의 위대함은 그가 살던 시기에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그 의미가 퇴색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확대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유럽에서 희곡과 연극은 일찍이 고대 그리스에서 꽃을 피웠다. 뛰어난 희곡작가들도 그 시기에 많이 배출되었다. 그런데 유심히 보면 장르가 정해진 경우가 많았다. 소포클레스는 비극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아리스토파네스는 희극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심지어 셰익스피어 이후 프랑스의 희곡작가들도 그러했다. 예를 들어 몰리에르는 희극에서, 라신은 비극에서 발군이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비극, 희극, 희비극, 역사극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걸작을 쏟아냈다. 이런 작가는 희곡뿐 아니라 다른 장르의 문학에서도 발견하기 어렵다. 그의 희곡에는 모든 유형의 인간이 망라되어 있고, 그 인물 하나하나가 다 살아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그의 인물은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그저 그런 인물이 없다.
희곡을 쓰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작가는 대사 이외에는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소설이나 시나리오 등에서는 작가가 매순간 개입해 등장인물의 심리를 설명하고 내면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다. 장소와 시간도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다. 그러나 희곡은 무대 공연을 전제로 쓰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이 제약되어 있을 뿐 아니라 등장인물도 제한적이어서 충분한 서술이 불가능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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