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는 왜
대통령기록 사태를
기록하려 하는가
필자는 기록관리 전문가가 아니다. 박사학위도 없을뿐더러, 기록관리 현장에서 실무를 맡아서 일한 적도 없다. 대통령기록 문제를 논할 자격을 말하라고 하면, 기록관리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한국국가기록연구원이라는 민간 연구원에서 2년 동안 일한 경험이 있다는 정도이다. 대신 국내 최초 정보공개․기록관리 활동가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한다. 지난 15년 동안 참여연대, (사)한국국가기록연구원,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이하 정보공개센터), 알권리연구소 등을 거치면서 공공기관의 기록관리 및 정보공개 현장의 열악한 실태를 밝혀내려고 노력했고, 잘못된 관행을 고치기 위해 문제점을 지적했으며, 이를 개선할 수 있는 법을 만들고 개정하기 위해 현장을 뛰어다녔다.
이 과정에서 운 좋게도 기록관리 전문가들과 친분을 쌓았고, 그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으며, 제도 및 시스템의 변화 과정도 생생히 보고 경험할 수 있었다. 활동하는 분야에서 제도 및 시스템의 개혁 성과를 지켜본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또한 공공기관에서 정보공개 및 기록관리 실태가 개선되는 모습을 보았고, 이런 기쁨을 기록관리 현장에서 일하던 전문가 및 기록관리전문요원들과 함께 나눌 수 있었다. 이러한 개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현장 실태를 집요하게 폭로했던 전문가들과 탐사 전문 기자들, 그리고 활동가들의 노력 덕분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노무현 대통령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기록관리 및 정보공개제도와 관련 시스템을 뿌리 깊이 개혁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통령이라는 자리에서 관심을 기울이기 쉬운 분야가 아니지만, 그는 집요하게 개혁을 추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하는 동안, 정보공개 활동가로 일할 수 있었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현재도 전 세계 공무원 및 현장 활동가들은 한국의 기록관리 및 정보공개제도가 급격히 발전한 원인을 공부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다. 2015년 말 서울시와 유엔개발계획UNDP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행사에서 세계 70개국의 공무원 및 활동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필자는 한국의 정보공개제도 발전사에 대해 발표했다. 한국의 각종 정보공개 사이트와 제도에 대해 들으며 사람들이 놀라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이런 발전의 배경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있었다. 또 그 제도를 확대․발전시키고 있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기여도 크다.
노무현 대통령을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가슴이 아리다. 서거 소식을 들은 날, 밤늦게까지 시청 대한문 앞에서 많은 사람들과 망연자실 슬픔에 들은 날, 밤늦게까지 시청 대한문 앞에서 많은 사람들과 망연자실 슬픔에 빠졌다.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슬픔 속에서 필자는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 기간 동안 이루어낸 기록관리 혁신 성과를 중심으로 『오마이뉴스』에 조사弔詞를 썼다. 글을 본 독자들이 많은 공감 댓글을 남겨주었고, 자발적 원고료를 보내주었다. 한 독자는 기사를 보고 전화를 걸어와 몰랐던 사실을 알려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노무현 대통령,
역사의 기록을 시작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기록관리체계를 세우고 법을 정비하고 수많은 예산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기록이 없으면 역사도 없다고 하는데,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 현대사에서 역사의 기록을 제대로 시작한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참여정부 기간 동안 이라크 파병, 한미 FTA, 10․4 남북정상회담 등을 추진할 때마다 보수와 진보 양쪽으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당했고, 퇴임 후에도 수많은 사건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필자도 참여연대에서 일하던 기간 중 노무현 대통령을 비판하는 수많은 집회에 참가했고 성명서 작성에 참여한 적도 있다. 그만큼 진보․보수 어느 진영에서도 큰 지지를 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물론 서거 이후 평가는 달라지고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기록관리 및 정보공개 분야는 다르다. 특히 기록관리 개혁의 최고의 공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기록관리제도의 초석을 놓았던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1998년 ‘국민의 정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100대 정책과제에 기록관리 법령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고, 결국 1999년 1월 29일에 ‘공공기관의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이하 공공기록물법)이 공포되었다. 법이 통과된 것은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었으나, 문제는 법이 아니었다.
법은 존재했으나 누구도 법을 지키려고 하지 않았다. 공공기관에서는 공공기록물법을 지키려는 의지도, 능력도 인프라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공공기록물법은 사문화死文化된 법으로만 존재했다. 필자가 참여연대 정보공개사업단에서 정보공개운동을 시작하던 2002년에는 기록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정보공개청구에 ‘정보 부존재’라는 답변을 끊임없이 받았다. 기록이 왜 없냐고 물으면, 담당자들 대부분이 전임자의 일이라 모른다고 답변했다. 정보공개 청구에 대한 비공개 답변 중 과반수가 ‘정보 부존재’였다. 법으로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정보인데, 정보가 없어져도 책임지는 곳이 없었다. 이런 답변에 지쳐, 시민운동을 그만둘지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였다.
결국, 참여연대 정보공개사업단은 정보공개운동을 잠시 중단하고 기록관리운동으로 전환하기도 결정한다. 본격적으로 기록관리 전문가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전하는 공공기관의 실태를 듣다 보면,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공공기관의 실태는 마치 전셋집에 살면서 계약서 없이 사는 꼴이었다. 언제 제3자가 나타나서 집을 비워 달라고 할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공공기관에서 기록이 왜 없어지는지, 정보공개청구를 이용해 대대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2003년 여름, 기록전문가들과 서류 더미에 묻혀 눈이 빠지도록 문건을 살펴보았고, 그 결과 수없이 많은 ‘기록관리 부실 실태’를 언론에 폭로할 수 있었다.
기록이 없는 나라
그리고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참여연대와 『세계일보』가 공동기획한 ‘기록이 없는 나라’ 시리즈였다. 이 시리즈가 보도될 때쯤, 탄핵을 당해 직무정지 상태로 묶여 있던 노무현 대통령이 업무에 복귀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때 정국 구상을 하다가 『세계일보』 시리즈를 보았고, 매우 큰 관심을 기울였다. 증언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이 “참여정부가 언론에게 가혹한 평가를 받아 국정 운영이 힘든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객관적인 ‘기록’을 통해서 역사의 평가를 받으라”는 충언을 했다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참여정부는 탄핵 복귀 이후 기록관리 실태를 개선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다. 참여정부는 많은 기록관리 정책을 만들었고 개혁을 이루어내었다. 공공기록물법을 개정․강화했고, 기록관리전문요원들을 일괄적으로 선발해 각 기관에 배치했으며, 각종 기록관리시스템을 도입해 체계적인 기록관리를 하도록 했다. 대통령기록물법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을 도입해, 그때마다 단 한 번도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않았던 강제적으로 생산하고 관리하도록 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