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소사
내소사 다녀왔으므로 내소사 안다고 해도 될까
전나무 숲길 오래 걸었으므로
삼층석탑 전신 속속들이 보았으므로
백의관음보살좌상 눈부처로 있었으므로
단청 지운 맨얼굴을 사랑하였으므로
내소사도 나를 사랑한다고 믿어도 될까
깊고 긴 숲 지나
요사채 안쪽까지 드나들 수 있었으므로
나는 특별히 사랑받고 있다고 믿었다
그가 붉은 단풍으로 절정의 시간을 지날 때나
능가산 품에 깃들여 고즈넉할 때는 나도
그로 인해 깊어지고 있었으므로
그의 배경이 되어주는 푸른 하늘까지
다 안다고 말하곤 하였다
정작 그의 적막을 모르면서
종양이 자라는 것 같은 세월을 함께 보내지 않았으면서
그의 오래된 내상內傷과 함께 있지 않았으면서
그가 왜 직소폭포 같은 걸 내면에 지니고 있는지
그의 내면 곳곳이 왜 낭떠러지인지 알지 못하면서
어찌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의 곁에 사월 꽃등 행렬 가득하였으므로
그의 기둥과 주춧돌 하나까지 사랑스러웠으므로
사랑했다 말할 수 있을까
해 기울면 그의 그리움이
어느 산기슭과 벼랑을 헤매다 오는지 알지 못하면서
포包* 하나가 채워지지 않은 그의 법당이
몇백년을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알지 못하면서
그의 흐느낌 그의 살에 떨어진 촛농을 모르면서
*공포栱包: 처마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
골목
그 무렵 나는 내가 불편했다
나도 나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나를 문밖으로 데리고 다니는 일이 어색했다
가까운 이들은 난감해했고
사랑은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박태기꽃도 측은한 빛깔로 나를 바라보았다
스무살을 넘긴 지 몇해 지나지 않은 무렵이었다
그 이전에 오래 혼자 있었으므로
쪽방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일이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때 나와 동행했던 그늘과 어눌한 골목을 지나간다
황량하고 거친 내 안의 벌판을 따라오던 굽이진 건천
다방을 나가던 옆방의 작은 레즈비언 여자와
공업고등학교를 다니던 남동생은 지금 어디 있을까
그들이 살던 단칸방의 눅진함과 침침한 빛
한밤중에 아내를 패곤 하던 주인집 남자와 비명 소리는
어디까지 나를 따라오다 사그라들었을까
움츠린 그림자를 벽에 누인 채
흐느끼곤 하던 나를
길 끝에서 기다려준 이는 누구였을까
서툴고 미숙하고 기우뚱한 내 분노에 차이면서도
그 발길 옆에 피어 있던 새끼손톱만 한
풀꽃 한송이는 누구의 온기였을까
누구일까
지향 없는 몸부림을 여리고 숫된 탓이라 여기고
여기까지 나를 데려다준 이는
그는 가고 나는 남았다
그는 가고 나는 남았다
그는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뜨거웠고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한 이였다
달빛이 거대한 바다를 투명한 그물로 끌어당기듯이
그가 당기면 내 청춘은 속절없이 끌려갔다
그렇게 끌려가서 나는 행복했다
그러나 사랑은 짧았고 그는 갔다
그가 가고 내가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자작나무처럼 멀리서도 희게 빛났고
나는 양지꽃처럼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그는 존재 자체가 타오르는 불꽃이었고
나는 잉걸불의 희미한 불씨였다
그는 바위산처럼 단단하고 우뚝하였으나
나는 조약돌처럼 잔물결에 씻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가고 내가 남았다
왜 그는 가고 나는 남았을까
그가 있어서 한 시대가 열망으로 뜨거웠다
그가 깃발을 흔들면 우리는 손수건이 되어 펄럭였다
언덕 위에서 쓰러진 그를 국화꽃으로 덮어 보내면서
한 시대가 그와 함께 가버리는 것인 줄 그때는 몰랐다
그는 가고 비에 젖은 꽃처럼 나는 남았다
그가 없는 날들은 길고 남루했다
그러나 그가 가고 내가 남아 여기 있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었다
열정이 식은 뒤에도 살아야 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데도 일을 해야 하는 게 힘들었다
그러나 하찮고 사소한 일상을 물수건으로 닦아
빛을 내는 일 그게 내 삶이었다
나는 남아 내 안의 반역과 누추
세상의 비열함에 맞서기도 하고 마모되기도 하는
순간순간을 살았다 내가 남은
이유를 채우는 그게 내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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