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도끼사건
1976년 8월 18일, 휴전의 상징인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유엔군과 북한군이 서로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었다. 유엔군 초소와 북한군 초소 사이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 옆에 시야를 가릴 정도로 미루나무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그날 오전 10시경 미군 대위가 지휘하는 11명의 유엔 경비팀이 현장 경호를 하는 가운데 한국 근로자들이 미루나무 가지를 쳐내고 있었다. 이때 북한 경비 병력 15명이 나타나 사전 합의가 없었다면서 작업중지를 요청했으나 유엔 측이 남측 관할 구역이라며 작업을 계속했다. 그러자 승강이가 벌어졌고, 급기야 격투기로 무장한 북한 병력이 한국 근로자들의 곡괭이와 도끼 등 작업도구를 탈취하여 순식간에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했다. 9명의 한국 및 미군 경비요원들도 중경상을 입었다.
공동경비구역은 북한군이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가장 가까이에서 표출하는 곳이어서 늘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일명 ‘판문점 도끼 살해사건’은 한국과 미국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미국은 아연실색했다. 이 사건은 한반도의 휴전이 얼마나 취약한 상태인지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유엔군의 모자를 썼지만 미국이 북한과 한반도에서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전세계에 각인시켰다.
당시 한반도는 베트남전쟁 종전의 여파로 불안한 상태였다. 북한은 유엔과 비동맹회의에서 동조국들을 규합하여 주한미군 철수 결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유엔에서는 공산권 21개국이 남한에서의 군사훈련 중지를 요구하는 공동결의안을 제출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의회가 국방예산을 삭감하면서 해외주둔 미군 축소 기류가 일고 있었다. 대통령 후보였던 지미 카터Jimmy Carter도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던 시점이었다. 또한 한국의 인권 문제와 이른바 ‘코리아게이트’(한국정부기관이 재미 사업가 박동선朴東宣을 통해 미국 의원들에게 불법 로비한 사건)로 한·미관계도 크게 불편한 시기였다.
판문점 도끼사건은 미군철수를 원하던 북한의 희망과는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북한이 그후에도 가끔 보이는 자기모순적 행동이었다. 미군은 휴전 후 처음으로 전쟁준비 태세인 데프콘2를 발령하고 미드웨이 항모전단, F-111 전폭기 20대, 핵 탑재가 가능한 B-52 폭격기 3대 등 막강한 화력을 한반도에 배치했다. 북한이 저항할 경우 북한 전역을 초토화하겠다는 의지의 표시였다. 사건 사흘 후인 8월 21일 미국은 북한에 사전 경고한 다음, 문제의 미루나무를 잘라버렸다. 아마 역사상 가장 무시무시하고 비싼 나무 절단 작업으로 남을 것이다. 미국이 압도적인 군사력을 과시하면서 미루나무를 절단하는 광경을 북한은 숨을 죽이고 지켜보아야 했다. 그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은 사실상 ‘분리경비구역’으로 바뀌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베트남전쟁이 막 끝난 시점에서 또다시 한반도에서 전쟁이 시작되기를 원치 않았다. 책임 주체가 명시되지 않은 김일성金日成의 ‘유감 표명’을 받아내어 최소한의 자존심을 세우는 것으로 이 사태를 수습하고자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사건 다음 날인 8월 19일 리처드 스틸웰Richard G. Stilwell 주한미군사령관으로부터 문제의 나무를 절단하기 위한 작전 계획을 보고받고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다”는 말로 보복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은 카투사 복장으로 변장한 특전사 요원들을 현장에 배치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어 북한군 초소를 파괴하는 정도였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판문점 도끼사건은 과거사가 아니라 서해 군사충돌이나 연평도 포격사건처럼 앞으로도 한반도에서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충돌의 유형으로 남아 있다.
카프카가 안겨준 숙제
1969년 나는 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12월 겨울방학을 앞두고 서울로 유학 온 고향 친구 두로가 이듬해 봄 군에 입대하기로 했다. 그런데 입대 전에 뭔가 추억거리를 만들 것을 궁리하다 연극공연을 해보기로 했다. 대학에서 독문학을 공부하면서 어설프게 보고 들은 것들을 바탕으로 내가 카프카Franz Kafka의 단편소설 「선고」Das Urteil를 각색하기로 했다. 주인공 게오르크의 약혼녀 프리다 역은 방학을 맞아 마산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캐스팅했다. 넷이서 달포가량 연습해서 1970년 2월 초 마산의 ‘희’라는 다방에서 흉내만 낸 연극을 공연했다. 카프카는 손에 잘 잡히지 않는 현실세계의 모순과 부조리를 일깨워주었고, 한창의 젊은이들에게 냉철한 세계관을 갖게 했다. 「선고」에서는 아버지로 상징되는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는 아들의 좌절을 묘사했다. 아들 게오르크가 이유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버지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아 강물에 빠지는 것으로 연극은 막을 내린다.
공연을 마치고 며칠 후 우리 셋은 입대 지원서를 들고 진해 해병대 본부에 갔다. 그런데 나는 병역소집 불응자로 처리되어 있어 지원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재학 중 신청했던 병역연기 서류가 제대로 송달되지 않아서 생긴 사고였다. 그래서 친구 둘은 해병대에, 나는 우여곡절 끝에 논산육군훈련소에 입대했다. 훈련을 마치고 춘천의 통신 부대에서 탄약병으로 근무했다. 춘천의 봄은 늦었지만 짙게 찾아왔다. 탄약고를 덮고 있던 아카시아꽃이 하얗게 만개한 1971년 5월이었다.
그날도 내가 관리하는 포탄과 총알에 이상이 없는지를 점검한 후 탄약고 옆 언덕에 기대 누웠다. 신참이 주로 서는 새벽 보초 덕분에 잠시 단잠에 빠졌다. 길고 추웠던 겨울만큼이나 진한 아카시아 향기가 입대 후 잠자고 있던 나의 머리를 깨웠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하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학업을 중단하고 군에 와서 탄약창고에서 총알 한 개 두 개를 세고 있다. 사격훈련이 있는 날이면 탄통을 메고 가서 사용하고 남은 탄약과 탄피를 합쳐 원래의 숫자와 맞춘다. 덧셈과 뺄셈이 나의 일이다.
이런 생각과 함께 문득 카프카의 「선고」가 떠올랐다. 남들이 내린 ‘선고’에 의하여 나라가 분단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선고를 받아야 했을까. 주변국들의 이익에 따라 한민족이 나뉘어서 이용당했다. 주변의 원심력을 우리 스스로가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원심력을 줄이고 구심력을 키워야 한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때부터 시간이 나면 탄약고 옆의 작은 창고에서 춘천 시내의 헌책방에서 산 책들을 밑줄 쳐가며 읽었다.
3년의 군복무를 마치고 1973년 학교로 돌아와 외교관 시험을 준비했다. 1975년 대학을 졸업하고 외무부에 들어갔다. 판문점 도끼사건 당시에는 초임 외교관 2년차로 외교부 북미2과 사무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휴전체제를 담당하는 곳이어서 사건의 수습과정을 목격했다. 사건 당일 스틸웰 주한미군사령관은 일본에 체류 중이었다. 10시간 후 그가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한국 정부와 군 당국은 주한미군사령부와 미국 국방부가 작전계획을 수립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시늉만 내어본 20대 초반의 어설픈 연극 경험은 그뒤 외교관으로서 여러 형태의 협상을 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연극에서 극중 인물은 배역의 심리상태에 몰입할 수 있어야 연기가 되는 것 같았다. 협상에서도 상대가 처한 조건을 파악하고 그 심리를 이해해야 타협점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