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름 짓기
나는 누구의 욕망으로 살아왔을까
내 삶을 이끄는 것은 다른 이들의 욕망이다
“인간은 타인他人의 욕망을 욕망한다.” 철학자 자크 라캉1901~1981의 말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예를 들어 볼게요. 어린아이가 산수를 열심히 공부해서 상을 탔습니다. 그러자 엄마는 기뻐서 어쩔 줄 모릅니다. 엄마가 좋아할수록 아이는 같이 놀자는 친구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산수 풀이에 매달렸습니다. 이때 아이는 왜 공부를 좋아하게 되었을까요? 그냥 셈하기가 좋아서였을까요? 아이가 공부 잘하기를 바라는 엄마의 소망을 채워 주는 데서 기쁨을 느꼈기 때문은 아닐까요?
주변의 기대와 바람은 우리의 인생을 앞으로 끌고 나갑니다. 살다 보면 때때로 모든 것을 내팽개쳐 버리고 싶을 때도 있어요. 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합니다. 내가 주저앉았을 때, 나를 사랑하는 이들의 실망한 표정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들의 욕망이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내 이름은 어떤 뜻일까
어떤 욕망은 우리에게 DNA처럼 주어지기까지 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어른들은 이름을 짓는 데 적잖은 공력을 들입니다. 며칠씩 고민하며 심사숙고하지요. 이름을 몇 개 살펴볼까요?
김만석, 이요셉(이요섭), 이미륵, 최한미르……. 예전에는 만석이라는 이름이 흔했대요. 만석꾼은 쌀을 만석이나 거두는 큰 부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아이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 준 어르신들은 부자일까요?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에 허덕이는 분일 가능성이 클 듯싶어요. 나는 힘들게 살지만 너만은 여유롭게 살았으면 하는 소망이 강했기에, 아이의 이름에 ‘부유함’을 담았겠지요.
이요섭이나 이미륵 같은 이름에는 깊은 신심信心이 담겨 있습니다. 기독교 『성경』 속 요셉이나 불교의 미륵불처럼 아이가 성스럽고 거룩한 인생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한미르는 ‘큰 용’을 뜻하는 순우리말입니다. 큰 용처럼 크고 당당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겠지요.
그렇다면 그대의 이름은 무슨 뜻일까요? 어떤 소망이 담겨 있습니까? 그대의 삶에도 태어났을 때부터 나를 사랑하는 이들의 갈망이 오롯하게 깔려 있었답니다.
나는 왜 남다른 욕망을 꿈꾸지 못할까
타인의 욕구는 우리의 삶을 쥐락펴락합니다. 토머스 모어1478~1535는 『유토피아』에서 놀라운 성찰을 내놓았어요. 인간은 그냥 먹고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멋진 차를 몰며 폼 나게 살고 싶어 하지요. 모어에 따르면, 이런 욕망은 다른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들지 않고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요. 좋은 옷과 멋진 차를 부러워하는 이들이 없을 때도, 나는 과연 이것들을 갖고 싶어 할까요? 남들도 이런 것들을 갖고 싶어 하기 때문에 나도 바라게 된 것은 아닐까요?
우리 욕구의 상당수는 이런 식입니다.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들도 원하기 때문에 나도 가져야 한다고 바라게 되는 꼴입니다. 좋은 대학을 나와야만 행복할까요? 꼭 돈이 많아야 할까요?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하면 인생이 비루해질까요? 곰곰이 따져 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주변을 조금만 둘러봐도, 평범하지만 행복한 이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답니다.
현자賢者들은 대부분 행복해지고 싶다면 욕심을 버리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해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좇는 욕구에서 벗어났을 때, 자기 삶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입시 경쟁이 치열한 고3 교실에서 대학을 안 가겠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모두가 피 터지게 경쟁하는 일터에서 나는 더 이상 ‘실적’에 목매달지 않겠다고 선언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친구들과 전혀 다른 욕망을 품고 있을 때 생활은 퍽퍽해지곤 합니다. 별종같이 여겨지는 데다가 대화까지 서먹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생활이 달라지니 같이 마음을 나눌만한 이야깃거리도 점점 사라지겠지요.
자유로부터의 도피
사람들은 남들이 자기 생활에 간섭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면서도 ‘무엇이건 될 수 있는 자유’는 버거워해요. 차라리 자신이 무엇을 바라야 하는지를 남들이 정해 주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1900~1980은 이를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표현했어요. 사람들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에게 마음이 끌리곤 합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하게 짚어 주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나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스스로 정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잖아요?
그러나 타인의 욕구에 따르는 삶은 결코 완전해질 수 없어요. 일 중독자들은 일터에서 밀려날까 봐 전전긍긍합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목매단 이들은 버림받을까 봐 늘 조바심을 내지요. 이들을 과연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자신은 절절하게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욕구는 ‘타인에게 인정받고픈 욕구’일 뿐이지 않을까요?
진정한 삶은 자기 자신만의 욕구를 스스로 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열립니다. 그렇다면 주변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 ‘그대만의 욕구’는 무엇입니까?
호를 짓고 필명을 만들다
옛 선비들은 조상이 정해 준 이름만으로 살지는 않았어요. 스스로 호號를 지어 붙이기도 했습니다. 추사 김정희1786~1856만 해도 호가 500개가 넘었다고 해요.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노과老科, 농장인農丈人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름을 갖고 살았지요.
이 점은 현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천재 시인 이상1910~1937의 본래 이름은 ‘김해경’입니다. 그가 살던 시대에는 조상이 물려준 성姓을 바꾼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상은 상식을 깨는 작품들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어때요? 이상이라는 이름 자체에서 틀을 벗어나려는 의지가 풍기지 않나요?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1942~2016의 본래 이름은 카세우스 클레이였다고 해요. 알리는 자기 이름을 이슬람식으로 바꾸며 자기가 누구인지를 더욱 분명히 했습니다. 흑인 인권 운동자인 맬컴 엑스1925~1965도 본래 이름이었던 맬컴 리틀을 버렸습니다. 1863년 노예해방 선언 전까지 미국에서는 백인들이 흑인 노예들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네들이 붙여 주던 식의 이름을 여전히 쓰고 있다면, 흑인들은 노예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할 터였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이름’부터 새로 지어 보면 어떨까요? 타인의 욕망이 심어진 이름 말고, 나의 인생 소망을 담은 이름을 만들어 봅시다. 나의 욕망, 나의 꿈을 오롯이 담은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 물음에 대한 만족할 만한 답은 그대 인생의 굳건한 뿌리가 될 것입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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