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문학의 존재 이유
문학을 연구한다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 문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밝혀보고자 하는 노력을 의미하고, 다른 한편으로 문학작품에서 삶과 세계의 보이지 않는 모습을 읽어내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문학의 본질에 관한 연구는 문학작품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성질을 찾아내는 것과 어떤 작품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읽어내는 것으로 나뉘지만, 삶과 세계에 대한 탐구는 자신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체험의 의미를 묻는 것과 체험할 가능성이 있는 삶의 개연성을 전망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문학 연구가 가지고 있는 이 두 가지 노력은 결국 우리의 삶과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의 중요한 몫으로서, 문학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이상적인 문학 연구나 문학비평은 끊임없이 문학의 존재 이유를 묻는 질문을 밑바닥에 깔고 전개된다. 문학비평가로서 김현 교수가 걸어온 업적이나 문학연구가로서 발표한 저술들을 보면 그의 모든 작업이 바로 그런 질문의 추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평가로서 그가 쓴 『한국 문학의 위상』『젊은 시인들의 상상 세계』『분석과 해석』 등의 평론집은 문학작품을 어떻게 읽을 수 있는가, 문학작품을 읽는 것이 왜 즐거운가, 그리고 문학적 독서는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독특한 방법으로 대답해주고 있다. 여기에서 독특하다고 하는 것은 그의 글에서는 그가 읽고 있는 작품이나 작가와 그 자신과의 관계가 끊임없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좀더 과감하게 이야기하자면 그가 읽은 모든 작가·작품은 그에게 읽히는 방식으로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그가 많은 작품을 읽는다고 하는 것은 그자신의 삶과 세계관을 이야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작품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다. 그러면서도 더욱 특이한 것은 그가 읽고 있는 작품이나 작가에 가장 큰 애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의 비평을 읽으면 어떤 작가나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고백을 듣고 있는 느낌이지만, 그래서 그와 그 작품 사이에 대단히 사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지만, 사실은 그 작품이나 작가가 가지고 있는 깊은 의미를 이야기함으로써 탁월한 스타일의 비평 ‘문학’을 읽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동시대의 작가나 시인이라면 그의 비평의 대상이 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고 그의 비평문을 읽으면서 창작 작품을 읽는 재미를 떨쳐버릴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문학연구가로서 그가 쓴 『프랑스 비평사』 근대편·현대편을 제외한 『바슐라르 연구』『제네바 학파 연구』 그리고 이번에 새로 발간한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불문학 교수로서 그가 바슐라르, 제네바 학파, 르네 지라르를 읽는 작업은 한편으로 이들의 이론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목적으로 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을 통해서 그의 생각의 전개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사실 외국 문학을 전공으로 삼고 있는 교수로서 끊임없이 부딪치는 문제는 바로 외국의 문학을 분석하고 해석하기 위해 만들어진 많은 이론을 접할 때 지식으로서의 가치를 넘어서 그것이 자기의 삶의 가치로 환원되는 데 이르지 못한다는 한계의 자각에서 비롯된다. 그러한 한계의 자각을 극복하기 위해 외국의 이론을 한국 문학에 적용하려는 시도가 문학연구자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적용은 지적인 호기심을 만족시켜주거나, 다른 사람 이야기의 범주에 멈추게 된다. 그러나 김현 교수의 연구에서 보이는 특색은 그가 외국의 이론을 정확한 방식으로 읽고 자신에게 필요한 요소를 끌어냄으로써 자신의 논리 전개에 그 이론의 도움을 받고 있는 데서 나타나지만, 특히 그 이론과 맺고 있는 개인적인 관계가 마치 비평가로서 문학작품을 읽을 때 볼 수 있었던 관계와 비슷하게 나타나는 데 있다. 이것은 그 자신이 문학연구자로서의 한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 비평가로서의 보다 창조적 활동을 하고자 하는 통합적인 태도를 나타낸 것이다.
그의 최근의 저서인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도 폭력과 욕망에 관한 지라르의 이론에 관한 연구이면서 동시에 최근의 역사에서 우리가 체험한 폭력의 의미에 관한 일종의 해석이라는 점에서 그의 특성이 드러난 저서이다. 모두 24장의 본문과 지라르의 2편의 글을 보유로 싣고 있는 이 책은 르네 지라르 개인 연구이다. 왜 갑자기 르네 지라르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개인을 그가 선택한 이유는 그의 책 읽는 과정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제1장은 저자의 폭력에 관한 관심의 기원이 유신시대의 종언에 있었지만 직접적인 동기는 1980년 초의 폭력 사건에서 발견되고 있다. 어떻게 현대 사회에서 폭력이 가능한가 하는 저자의 질문이 자연스럽게 욕망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욕망이 “심리적·사회적일 뿐 아니라 종교적인 것이다”라는 지라르의 이론과 만나게 된 경위를 알 수 있다. 제2장은 1986년에 나온 『스탠포드 프랑스 평론Stanford French Review』에 나와 있는 완벽한 서지에 의거하여 세계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출간된 9권의 지라르 연구서를 제시하고, 그에 관한 연구가 경제학에서부터 시작되어 철학·신학·인류학·종교학 방면으로 번져가고 있는 데 반하여 문학 분야에서의 연구가 활발하지 못한 것을 주목한다.
제3장은 한국에서의 지라르 수용 현황을 검토하면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의 소개 과정에서 드러나고 있는 르네 지라르의 왜곡 현상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소설 주인공의 욕망의 체계가 “욕망하는 주체와 욕망의 대상과 그 욕망의 중개자가 삼각형의 구조를” 이루는 삼각형의 욕망 이론을 현대 소설의 분석에 적용함으로써 간접화된 욕망의 지배를 받고 있는 현대 사회의 이해에 도달하고자 한 일부의 시도가 심오한 르네 지라르의 작업을 단순·왜곡시켰다는 지적을 저자는 하고 있다. 지라르가 현대인의 욕망의 구조를 삼각형의 욕망으로 분석한 것은 “그 욕망의 포기, 화해라고 하는” 종교적 주제로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저자의 주장은 지라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저자 자신은 현대인의 욕망의 구조를 드러내는 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욕망의 포기와 화해로 가는 것을 꿈꾸고 있다. 그러니까 산업사회의 징후로서의 간접화된 삼각형의 욕망 이론만을 현대 소설의 분석에 적용하는 편의주의적 수용에 대해서 저자는 “그의 이론의 핵심은 거기에 멈추는 게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데 있으므로, 지라르의 정확한 수용은 급히 서둘러야 할 과제 중의 하나이다”라고 지적함으로써 이 저술의 동기를 밝히고 있다.
제4장은 지라르의 생애에 대한 약술이고 제5장에서부터 제8장까지는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 나타난 소설 비평의 몇 가지 요점을 설명한다. 제5장의 「매개된 욕망」에서는 삼각형 욕망의 핵심적인 개념인 욕망의 매개 현상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매개된 욕망은 한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고 바로 그 죽음을 통해서 매개된 욕망의 허위성을 드러내는 데서 기독교적 회심의 형태를 발견한다. 저자는 여기에서 골드만이 지라르와 루카치를 비교함으로써 문학사회학적 업적으로 지라르 이론을 수용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쉬프라즈와 바르가의 이론을 빌려서 지라르 이론을 사회심리학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밝히고 있다. 지라르를 깊이 있게 연구한 저자가 지라르를 한 분야에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우리에게 알려주는 이 주장은 지라르는 물론이거니와 저자 자신의 사고의 다양성과 깊이를 드러내준다. 제6장 지라르의 스탕달 분석에서는 왜 현대 세계에서는 인간이 행복하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추구한 결과 인간이 허영심이 강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고 있다. 허영심이 강하게 되면 내적 중개가 일반화됨으로써 허영심은 사회적 병이 되고, 그리하여 고귀함은 노예 근성이 되고 자발성은 모방이 되며 독창성은 타자 베끼기가 되는 ‘낭만적 거짓’ 현상을 스탕달의 주인공들에게서 분석해낸다. 제7장에서는 지라르의 소설 결말 분석에 주목함으로써 “형이상학적 욕망의 포기야말로 모든 소설적 결말의 단일한 모습이다”라는 결론을 끌어낸 저자는, 모든 소설의 결말에서 주인공들이 그 이전의 생각과는 다른 말을 하는 데서 주인공의 회심을 읽어낸다. 종교적 체험과 소설적 체험 사이에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지라르의 이론에서 텍스트 상호 관련성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낭만적 비평에 대한 지라르의 비판을 수용함으로써 저자는 돈 키호테의 성스러움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제8장에서는 지라르의 그러한 비평의 특징을 넓은 의미의 휴머니즘적 비평이라고 규정하면서 지라르가 급진주의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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