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 우주론의 원형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
제1강
우주론, 철학적 사유의 시작
이제 우리는 철학의 근본 영역인 형이상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할 것입니다. 첫 시간에도 살펴보았듯이 형이상학은 세계의 궁극적 근거를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철학자 크리스티안 볼프가 나눈 분류에 따르면 형이상학은 존재 일반을 다루는 일반 형이상학, 그리고 우주론·영혼론·신론으로 이루어진 영역 형이상학이 있습니다. 그중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영역 형이상학의 한 분야인 우주론입니다. 헤시오도스의 우주론을 철학으로 본다면 형이상학의 종류 중 우주론이 가장 먼저 시작된 셈입니다. 우주론의 탐구 대상은 오늘날에 천문학이나 천체물리학에서 다루는 내용들이지만 고대에는 형이상학의 내용을 이루었습니다. 고대의 우주론에는 가장 먼저 우주의 구조에 대한 탐구가 포함되며, 두 번째로는 우주가 어떻게 생성되었는가, 즉 창조와 기원에 관한 논의가 들어갑니다. 어떻게 보면 고대의 우주론은 자연과학 같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런 우주론의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서 근대의 자연과학까지 왔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문헌인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는 우주론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안에는 고대 희랍 사람들이 생각한 우주의 구조와 생성 과정에 관한 논의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시작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신들의 계보》와 유사해 보이는 문헌도 있습니다. 바로 구약성서의 〈창세기〉입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신앙 고백입니다. 〈창세기〉에는 고대 히브리 민족이 생각한 우주의 생성에 관한 사변적 이론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창조론’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창조는 과학 이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화론과 창조론을 대립의 영역에 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창세기〉는 ‘내가 믿는 신은 이러이러한 존재’라는 고백입니다. 《신들의 계보》는 맨 처음에 “카오스가 생겨났다”고 말하는데, 이는 언뜻 생각할 때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천지창조 설화나 〈요한복음〉 1장 1절에 나오는 구절 “한처음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내용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창세기〉와 〈요한복음〉의 구절은 ‘신의 원리가 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을 우주론의 형식을 빌려서 쓴 것이지, 우주론은 아닙니다. 따라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빛이나 땅과 같은 것들을 자연물의 상징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신들의 계보》는 신앙 고백이 아니기 때문에 《신들의 계보》에 나타나는 여러 신들은 인격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보면 안 되고, 자연 사물을 의인화하여 상징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신들의 계보》는 우주론이고, 성서 〈창세기〉는 우주론처럼 보이지만 신앙 고백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주론은 어떻게 읽어야 할지 《신들의 계보》 옮긴이 서문을 살펴보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주와 신들의 탄생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문헌
그리스 로마 신화에 관한 고대 문헌들로는 서사시를 쓴 두 위대한 시인인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3대 비극 작가인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서정시인 핀다로스, 헬레니즘 시대의 대학자인 아폴로도로스,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작품들이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일명 《신통기》는 우주와 신들의 탄생에 관한 한 가장 체계적이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문헌이다.
_ 《신들의 계보》 옮긴이 서문
옮긴이 서문의 제목이 “우주와 신들의 탄생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문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탄생”입니다. 탄생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우주 생성론, 우주 창조와 기원, 전개에 관한 내용이 들어가게 됩니다. 둘째 문단에 “그리스 로마 신화에 관한 고대 문헌들로는 서사시를 쓴 두 위대한 시인인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헤시오도스는 시인이기 때문에 그의 《신들의 계보》는 영역 형이상학의 한 분야인 우주론으로서 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중국의 고전인 《시경》詩經을 잠깐 살펴봅시다. 《시경》은 제목에 “시”가 들어가 있는데 이것은 말그대로 ‘시’입니다. 《시경》은 ‘풍’風, ‘아’雅, ‘송’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풍’은 벼슬아치를 풍자하거나 찬양하는 민요입니다. ‘아’는 대아大雅와 소아小雅로 다시 나뉘는데, 대아는 국가의 중앙 정부와 관련된 대귀족들에 관한 노래이고 소아는 하급 귀족에 관한 노래입니다. 그런 까닭에 ‘풍’과 소아가 연결되는 지점이 많습니다. ‘송’은 국가의 제사 때 부르는 노래이지만 그냥 노래 가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기 연주를 위한 악보가 모두 붙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악사들이 편집한 것입니다. ‘송’은 종묘제례악에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주 자연스럽게 《시경》이라고 하는 이 텍스트 안에서는 종묘제례악이 있을 것입니다. 종묘제례악에서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 카오스가 어떻게 벌어졌는지를 노래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노래일 것입니다. 귀족을 다루는 ‘아’는 귀족이 어떠해야 하고 정치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얘기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시의 형식을 띠고 있고 텍스트 제목에도 시라는 것이 밝혀 있지만 내용을 보면 정치론이 되는 것입니다.
공자는 《논어》論語 ‘태백’泰伯 편에서 “공부는 시에서 일어나고 예에서 서며, 악에서 이룬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흥어시 립어례 성어락고 하였습니다.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 市定의 번역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시를 가르침으로써 학문이 시작되고, 예를 가르침으로써 제 구실을 하는 사람이 되고, 음악을 가르침으로써 인격이 완성된다.” 따라서 우리가 “흥어시”라는 구절을 이해할 때 감정적인 측면을 고려해서는 안 됩니다. “흥”이라는 단어와 “시”라는 단어가 선진 시대 공자의 머릿속에 어떤 의미로 쓰였을지, 어떤 함축을 가지고 공자의 머릿속에 이 단어가 들어가 있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고려한다면 이 구절은 ‘공부라고 하는 것은 일단 정치 사회적인 안목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라고 하는 형식을 띠고 있지만 우주론이기 때문에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는 아주 당연하게도, 우주 생성 과정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헤시오도스는 시인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1000a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헤시오도스의 추종자를 비롯해서 모든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눈에 그럴듯해 보이는 생각을 해냈지만 우리들의 관심사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신화적으로 꾸며낸 생각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찰하는 것은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헤시오도스는 신화를 말하는 사람이고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논증을 통해 주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헤시오도스 같은 사람들을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내는 신학자라고 말하고, 이들을 철학자에 포함시키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철학을 규정하면 ‘철학은 신화를 베재하고 이성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이성주의적 철학관이 성립하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규정을 따른다면 우리는 헤시오도스의 텍스트를 읽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논증을 통해 주장을 내세우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과 우주의 전 국면에는 논증을 통해서 해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으며, 그것까지도 포괄해야만 철학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철학의 한 영역인 형이상학을 공부하면서 《신들의 계보》를 읽는다는 것은 철학에 대한 관점도 달리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신들의 계보》를 읽으면서 그것의 내용도 따져봐야 하지만, 종래의 철학이라는 것에 포함시킬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지금 《신들의 계보》를 읽는 이유는 이러한 우주론 안에 철학적 사색의 맹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신화뮈토스에서 이성로고스으로의 전환, 이것이 철학의 시작이다’라는 말은 일단 배제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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