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정판 서문
“시적 담론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에로스의 독법이고 발견의 해석학이다. 시의 담론은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말하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시적 담론이며 말하고자 하는 바를 엉뚱한 것으로 ‘뒤바꾸어 말하기 때문에’ 특별히 시적 담론이다.” 1992년 평론 「에로스의 독법과 포용의 시학」에 내가 써넣었던 한 대목이다. 시는 노출을 싫어한다. 감춤, 은닉, 변형은 시의 수사학이며 은유라는 이름의 에둘러 말하기도 시의 특징적 어법이다. 시에는 힌트만 있고 해답은 없다. 그러나 이렇게만 말하는 것으로 독자가 물러설까? 시의 비밀스러운 숲의 미로를 꿰뚫을 시원한 안내 화살표는 없는 것일까? 그런 화살표 같은 것을 만들어보기 위해 (같은 글에서) 내놓은 것이 “시란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는 모태 명제의 끝없는 변형”일 것이라는 가설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시에는 결국 ‘나는 너를 그리워한다’라는 단 하나의 이야기만이 감추어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시적 변환은 이 하나의 이야기를 감추기 위한 은유적·환유적 위장의 기술이고 포장의 책략이며, 시읽기란 그 위장된 그리움의 이야기를 찾아내는 발견의 해석학일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시에는 단 하나의 이야기만이 감추어져 있는 것인지 모른다라든가 이 단 하나의 이야기를 부단히 변형시켜내는 것이 시라고 말한 대목은 상당히 과감하다. 문학작품은 하나의 이야기 아닌 복수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 때가 더 많다. 이야기는 작품의 비밀 속에서 발견되는 것인가 아니면 독자가, 그리고 시대가, 만들어넣는 것인가? 양쪽 모두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양보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가설의 유용성을 지금도 인정하고 있다. 문학은 인간의 갈망을 담은 언어구조물이다. 그 갈망은 개인의 꿈과 사회의 꿈을 함께 담고 있고, 시대 안에 있으면서 시대 바깥에 있다. 그것은 공시적인 것이면서 통시적인 것이다. 읽기의 경험들을 들어보면, 독자가 어떤 문학작품과 친해지는 것은 ‘옳아, 네가 지금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라면서 앞뒤 문맥을 해석하고 의미를 정리하는 일, 곧 갈망의 존재와 그 모습을 파악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이 오기까지 작품은 독자에게 ‘이해’된 것이 아니다. 이때의 이해는 ‘완벽한 이해’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해는 늘 부분적인 것이거나 잠정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여기 감추어진 이야기는 이거야’라거나 ‘내가 이 작품을 이해했어’라고 말할 만한 순간을, 말하자면 ‘잠정적 종결’의 한 순간을 경험하는 일이다. 그런 순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가설이고 가설의 유용성이다. 작품 읽기의 이상은 최종적 읽기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술래잡기를 계속하고, 수정과 재시도와 또다른 잠정적 결론의 순간에 도달해보는 일이다.
내가 비평 작업을 시작했던 90년대 초 내게는 문학비평의 문학적·사회적 과제에 관한 어떤 인식 같은 것이 있었다. 당시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과제는 크게 세 가지다. 그 세 가지는 첫째, 비평의 대중성 또는 비평의 대중적 친숙화를 도모하는 일, 둘째는 비평의 사회적 공공성을 더 깊게 인식하고 실천하는 일, 셋째는 문학예술과 사회와 삶에 제기되는 당대적 위기 국면들에 대한 비평의 사유와 성찰을 제시하는 일 등이었다. 비평의 대중적 친숙화를 위해서는 비평의 어휘와 언어와 문체에 한차례 쇄신의 기회를 도입하고 비평의 화두를 당대적 삶의 일상으로부터 끌어내거나 거기 연결시키는 일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 작업을 내 딴에 진행한다고 한 것이 「낙동강 물난리, 국제화, 지상의 아름다움」 「사람아, 사람아!」 「풀잎, 갱생, 역사」 등 당시 계간 『문예중앙』을 통해 시도해본 좀 색다른 형식의 ‘문학시평’들(이 평론집의 앞부분에 수록)과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같은 글이었다. 비평의 사회적 공공성 문제와 관련해서는 문학비평이 문학 그 자체에 대한 문예비평적 차원을 넘어 사회비평과 문화 성찰의 차원으로도 확장되게 하는 것이 비평의 공적 기능에 속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여기 수록된 글들 중에서는 「문화의 몰락과 비평의 위기」 「망각의 시학, 기억의 시학」 「정신대, 역사, 문학」 「압구정의 유토피아/디스토피아」 「시뮬레이션 미학, 또는 조립문학의 문제와 전망」 같은 글들이 그런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문학비평은 문학이라는 형태의 예술적 창조행위와 수용행위에 대한 성찰행위이다. 그러나 문학에 대한 비평의 성찰은 불가피하게 사회적 성찰을 포함한다. 이것은 문학 생산과 유통의 사회적 차원 때문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한 사회가 지키고 발전시켜야 할 ‘근본적 가치’들을 비평이 부단히 정의하고 확인하고 옹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평이 옹호해야 하는 사회적 가치들은 공동체적 삶의 토대이다. 그 가치들 중에서 비평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성 파괴에 맞서서 인간의 품위와 자유를 지켜낼 ‘인문문화적 가치들’이다. 그 가치들을 옹호하는 비평적 작업을 나는 ‘비평의 인문학’이라 부르고 싶다. 세계적으로나 국지적으로, 현대의 시장유일주의 사회는 특징적으로 반인간적이고 야만적인 작동 원리에 지배되고 있다.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것은 나치 절멸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왔던 프리모 레비가 나치 수용소라는 야만의 체제를 향해 던졌던 질문이다. 레비의 시대보다도 더 엄혹하게, 지금은 사람들이 “이것이 인간의 세계인가”라고 묻는 상황에 빠져 있다. 비평은 사회가 유지해야 하는 인문문화적 가치들 모두에 고르게 민감하며 가치의 위기 국면을 가장 잘 감지한다. 가치에 대한 이 균형 있는 민감성이야말로 문학 비평의 가장 큰 힘이며, 이 힘은 사회적으로 사용될 필요가 있다. 비평의 인문문화적 가치의 옹호에 대한 나의 관심이 90년대 초부터 나의 평론들에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이 평론집 개정판을 준비하면서 알게 되었다. 지금은 그 관심이 더 확장되고 심화되어야 할 때라고 나는 생각한다.
2016년 2월
도정일
사람아, 사람아!
─ 균열, 피해 면적, 그리고 환생
1
시인이 세상을 향해 뭔가 보여주고 싶을 때, 이를테면 나무라든가 구름, 당나귀 같은 것들을 보여주고 싶을 때, 그 보여주기의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그냥 한 사람의 시인으로 사는 것이다. 그는 나무이고 구름이고 당나귀이다. 나무는 말하지 않고 구름은 노래하지 않으며 당나귀는 문자를 쓰지 않는다. 말 없음, 노래 없음, 문자없음이 그들의 존재방식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전에는 나무였다가 사람이 된 사람, 전에는 구름이었다가 사람이 된 사람, 당나귀였다가 사람이 된 사람임을 세상에 보여주자면, 그는 말, 노래, 문자 없음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야 그는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나무, 구름, 당나귀─아니, 시인으로 살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그럴 수 없다. 나무는 봄에 잎사귀 내고 가을에 그 잎새 떨구어 나무임을 말하고, 구름은 비 내리고 다시 끌어올리면서 뭉게구름, 실구름, 먹구름의 노래로 구름임을 말하고, 옛날에는 소금 짐 지다가 지금은 아무 짐이나 등짝에 얹히는 대로 지고 다니는 당나귀는 짐 짐으로써 당나귀임을 말한다. 그러나 시인으로 환생한 나무, 구름, 당나귀는 사람 꼴로 살아야 하는 그 꼴값 때문에 잎을 내지도, 비를 뿌리지도, 소금 짐을 지지도 못한다. 그는 말로 말하고 소리로 노래하고 문자로 써야 한다. 그가 전에는 나무, 구름, 당나귀였다가 사람이 된 사람, 지금은 사람이지만 또 한 바퀴 돌아 필시 소쩍새, 은초롱, 돌고래로 다시 태어나야 할 목숨임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그는 그래서 시를 쓰고 시집을 낸다. 그는 『한 꽃송이』를 내고 『게 눈 속의 연꽃』을 내고 『달맞이꽃에 대한 명상』을, 『썩지 않는 슬픔』을, 『하늘밥도둑』을 낸다. 이것들이 그의 잎새, 꽃, 비, 개울, 당나귀 눈이다. 사람들아, 이 당나귀, 구름, 나무를 보아라라고 말하는.
시인이 환생의 굴레를 깨고 그 바깥으로 튕겨나가기보다는 환생의 지극한 욕망 속에서 다시 지렁이로 달맞이꽃으로 청둥오리로 태어나고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발원해야 하는 시대─지금은 그런 시대이다. 시인에게 이것은 짐이다. 그러나 이 당나귀 짐을 져야 하는 것이 이 시대 시인의 ‘카르마’이다. 그가 그래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목숨 붙은 것들이 지금 모두 그 목숨을 위협받는 불모의 땅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는’ 것이 아니라 약 풀린 연못의 붕어새끼들처럼 물위로 주둥이 내밀고 간신히 할딱인다고 해야 옳다. 가이아 여신의 대지에 몰려온 이 죽음의 예고는 땅속에 있는 것들에게서 부활의 가능성을 박탈하고, 잠깐 잠든 것들의 소생을 부정하며 환생을 기다리는 중음中陰 중생들을 정신 아뜩하게 한다. 그것은 환생이 없는 땅, 생명의 순환이 영원히 정지하고, 소생의 기대가 없으매 중음조차도 마침내 의미를 상실해버리는 최종적 침묵, 색성향미촉이 모두 말라비틀어져 허허로운 바람만이 빈 땅과 하늘 사이로 우짖는 장엄한 고갈을 예고한다. 시인은 그러므로 살아 있는 것들의 있음의 지속을 위해 그 자신 환생의 지극한 욕망에 붙들리고 거듭거듭 태어나기를 발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지금까지 꿈꾸어온 자신의 모든 해탈을, 모든 해방을 무기 연기해야 한다. 이것이 이 시대 시인의 보살도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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