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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계
슈퍼 자이언트의 시대
2013년 일이다. 세계 단행본 출판을 지배하던 거대 출판사 두 곳이 하나의 출판사로 재탄생했다. 이른바 빅 식스Big Six*라고 불리던 초거대 출판사 중 랜덤하우스와 펭귄 출판사가 합병하여 펭귄랜덤하우스가 된 것이다. 당시 랜덤하우스는 미디어 그룹 베르텔스만 소속이었으며, 펭귄은 세계 최대의 교육 출판 그룹인 피어슨 소속이었다. 베르텔스만은 회사의 몸집을 키워서 세계 출판 시장에 불어닥친 디지털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 피어슨 역시 미래의 교육 콘텐츠 시장을 주도할 역량을 확보하기 위해 합병을 선택함으로써 세계 출판계를 경악에 빠뜨렸다. (2015년, 피어슨 그룹은 매년 흑자를 내던 영국의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마저 매각해 교육 콘텐츠 시장에 집중하려는 전략적 결단을 분명히 했다.) 합병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펭귄과 랜덤하우스의 합병으로 만들어진 펭귄랜덤하우스는 연간 매출이 40조 원에 이르는 등 세계 단행본 출판 시장의 무려 4분의 1가량을 점유했다. 디지털 출판에서도 합병 효과가 발휘되면서, 2014년 닐슨이 집계한 미국 전자책 베스트셀러 집계에서 100위까지의 도서 중 펭귄랜덤하우스의 책이 절반가량을 차지했으며, 합병 때 선언한 대로 전 세계 신흥 시장에도 꾸준히 손을 뻗치는 중이다. 피어슨 역시 교육 출판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달리면서 세계 출판사 순위에서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 랜덤하우스, 하퍼콜린스, 사이먼앤드슈스터, 맥밀란, 펭귄, 아셰트 등 각각 산하에 출판사 수백 곳의 거느린 글로벌 출판 그룹을 말한다.
세계 단행본 출판 순위 2위인 하퍼콜린스의 경우도 인수합병을 통해 점차 몸집을 키우는 중이다. 하퍼콜린스는 미디어 제왕이라 불리는 루퍼트 머독이 거느린 뉴스코퍼레이션 소속이다. 이 회사는 2014년 로맨스 소설 전문 출판사인 할리퀸을 인수했다. 전 세계에 걸쳐 열광적인 팬을 거느리고 있는 할리퀸을 이용하면 디지털 사업을 전개하는 데 아주 유리했기 때문이다.
“할리퀸은 34개 언어로 100여 국가에서 작품을 출간하면서 매출의 40%를 비영어권에서 확보하고 있다. 글로벌 로맨스 소설의 대표 브랜드로 자리 잡은 할리퀸은 그동안 1300여 작가의 로맨스 소설을 출판해서 총 63억 권을 판매했다. 현재 매달 110권이 넘는 신간을 내고 있으며 2013년 총 매출액은 3억 7200만 달러다.*
* 류영호, 「인수합병을 통한 출판사의 경쟁력 강화」, 《기획회의》, 368호(2014년 5월 20일). http://bookerslab.tistory.com/390에서 인용.
하퍼콜린스는 할리퀸의 로맨스 작품을 중심으로 로맨스 소설에 특화된 전자책 플랫폼의 구축에 성공했다. 이러한 성공 경험은 하퍼콜린스의 디지털 사업에 긍정적 효과를 불러일으켜 미래 사업으로의 전환에 박차를 가했으며, 글로벌 진출 전략과 디지털 플랫폼 교두보 마련에 성과를 거두었다.
맥밀란 역시 발 빠른 행보를 보이는 중이다. 맥밀란은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과학 전문 학술잡지인 《네이처》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을 보유하고 있다. 맥밀란은 빠르게 변화하는 학술 출판 환경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세계 최대의 과학 전문 출판사 중 하나인 독일의 스프링어와 합병해서 스프링어네이처를 설립함으로써 규모의 경제를 실현했다. 두 회사 모두 그룹의 몇몇 사업 부문을 남겨두었는데도, 스프링어네이처의 임직원 수가 1만 3000명, 매출액은 약 2조 원에 이른다. 이로써 스프링어네이처는 정보기술의 발달과 구글 등 외부기업의 참여 때문에 점점 경쟁 구조가 복잡해져 가는 학술 출판 환경에서 전 지구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규모를 이룩했다.
미국의 출판인 마이클 바스카는 이렇게 합병을 통해 몸집을 키워서 전 지구적으로 활동하는 출판사들을 일컬어 슈퍼 자이언트Super Giant라고 부른다. 슈퍼 자이언트의 등장은 오늘날 전 세계 출판에서 일어난 가장 극적인 변화 흐름 중 하나다. 그렇다면 왜 슈퍼 자이언트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움직이는 세상에서 출판은 어떻게 변화할까?
변화의 출발점은 출판이 아니라 유통에 놓여 있다. 아마존닷컴의 힘이 점점 커지면서 출판의 모든 것을 바꾸고 있다. 온라인 서점 아마존은 지난 스무 해 동안 세계 출판의 변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상수이다. 아마존은 특정한 회사 이름이라기보다는 출판이 디지털 경제에 편입되었음을 알리는 하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역시 지난 스무 해 동안의 출판을 돌이켜볼 때, 아마존과 비슷한 온라인 서점들의 등장과 영향력 확대가 출판 산업의 변화를 이끈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오늘날 출판 산업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오프라인 서점의 몰락이다. 이는 디지털 인프라가 부족한 일부 신흥시장을 제외하고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현상이다. 아마존의 영향력이 점차 커짐에 따라, 그와 경쟁하던 오프라인 서점들이 경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차례로 문을 닫았다. 미국 제2의 서점 체인 보더스는 이미 파산해 버렸고, 제1의 서점 체인인 반스앤드노블은 지점 수를 계속해서 줄이고 있다. 영국에서도 최대 서점 체인인 워터스톤스가 해마다 위기에 몰리는 중이며, 도서정가제가 실시되는 일본에서도 역시 아마존의 영향력이 강화됨에 따라 지난 20년 동안 서점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1995년 3만 5000개 수준에서 2014년 기준 1만 3943개까지 떨어진 상황”* 이다. 그에 비해 아마존의 영향력은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1994년 온라인 서점으로 시작하여 현재는 22개국에 도서를 포함해 e-커머스 시스템, 일반 재화, 전자책 등을 판매하는 세계 최대의 온라인 쇼핑몰”*이 된 것이다.
* 김종철, 「일본 아마존과 일본 서점의 변화」, 『‘2015 출판인 해외연수: 일본 서점, 유통 부문 그룹 연수 결과 발표회’ 자료집』(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15), 6쪽.
* 김종철, 앞의 글, 같은 쪽.
2015년 가을 아마존 본사가 있는 시애틀에서 문을 연 아마존의 1호 오프라인 서점은 반스앤드노블이 지점을 철수했던 자리다. 이러한 자리 교체는 출판 산업의 변화를 너무나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2015년 미국에서는 독립 서점의 숫자가 다소 늘어났지만, 아직 체인 서점이 없어진 숫자를 보충할 정도는 아니며, 그동안 줄어들었던 독립 서점의 숫자에 비하면 조족지혈일 뿐이다.
그렇다면 아마존을 비롯한 온라인 서점의 기록적 성장은 출판 산업에 무엇을 남겼을까. 김종철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을 지적한다.
일본 내 아마존의 존재감이 커지는 첫 번째 이유는 잡지와 만화 시장의 축소로 인한 고객의 서점 방문 감소다. 여기에 다품종의 단행본 도서가 빠르게 배송되는 온라인 서점의 장점이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전자책 시장이 성장하는 가운데 온라인 거래 플랫폼인 아마존에서 직접 거래되는 출판사의 도서 콘텐츠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존은 상기 두 가지 이유를 중심으로 기존 서점 사업자에게 위기감을 주고 있다. 한마디로 아마존으로 인해서 서점에 가야 할 이유가 점차 희미해지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재판매가격유지제도로 인해 아마존과 가격은 동일하지만 출판사와 아마존의 직거래가 늘어남으로써 오프라인 서점은 물량을 받을 수 없게 되거나 온라인 판매 채널에 더 좋은 조건으로 반품이 없는 매절 거래를 하는 출판사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존과 출판사 간의 종이책과 도서 콘텐츠의 직거래는 그동안 안정적이던 일본 도서 유통 시장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으며, 최종소비자와 접점에 있는 오프라인 서점에도 변화의 과제를 던지고 있다.*
* 김종철, 앞의 글, 5쪽.
물론 일본 출판 시장에서만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게 아니다. 아마존과 같은 온라인 서점이 성장한 모든 시장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런 현상이 심화되면서 책의 물리적 유통 채널이 점점 줄어들고, 주변에서 책을 접하는 물리적 공간이 축소되면서 독자들이 아마존 같은 온라인 유통 경로로 더욱더 몰리는 악순환을 형성한다. 거대 유통사가 모아들인 고객의 힘을 이용해 상품 생산까지 장악하는 다른 제조업의 경우를 생각하면, 출판 산업에서 이런 현상은 비교적 늦게 나타난 편이기는 하다. 아마도 책이라는 상품이 소수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특성을 가진 데 상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인과 만인이 이어지는 초연결사회에서 아마존은 오히려 소수의 독자들을 서로 연결해서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책을 더 쉽고 편리하게 찾아서 읽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소수 미디어인 책의 상품 특성을 역으로 이용하는 전 지구적 유통망을 이룩했다. 아마존을 모델로 삼은 각 지역의 인터넷 서점들도 비슷한 경로를 밟아서 서적 유통 시장을 차례로 장악했다. 2007년 전자책 전용 모바일 기기인 킨들을 출간한 이후 미국 전자책 시장에서 점유율이 65%까지 치솟음에 따라 아마존의 시장 장악력은 더욱 커져만 가고 있다.
이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책의 유통과 판매에서 독자를 직접 상대하는 소매의 힘이 극도로 커지면서 가치사슬의 다른 행위주체인 출판사, 도매, 언론 등이 그 시장 주도력을 전혀 견제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저자와 독자가 점차적으로 직접 연결되는 구조가 출판 산업에 출현했다. 저자와 저자, 저자와 독자, 독자와 독자가 직접 소통하는 온라인 서점의 힘이 커지면서 책이 출판사와 같은 중간 단계 없이 판매되는 일이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전자책의 등장은 정보기술의 발달에 따른 것이지만, 출판 산업 내부의 이러한 변화에 따라 성립한 것이기도 하다. 누구나, 언제 어디에서나, 원하는 시간에 책을 접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제공하는 소매서점이 출판 가치사슬의 중심에 놓이는 변화가 일어났고, 그 변화에 최적화된 상품이 바로 전자책이라는 형태를 가지고 필연적으로 출현한 것이다. 그러자 이런 구조를 실현할 수 없는 서점들은 사라지고, 책의 유통 채널은 소수의 거대 기업으로 집중되었다.*
* 출판계의 유튜브라고 불리는 왓패드Wattpad 같은 플랫폼도 나타났다. 왓패드는 누구나 책을 써서 올리고, 또 무료로 읽을 수 있는 세계 최대의 전자책 커뮤니티이다. 왓패드는 텍스트 파일만 있으면 이를 전자책으로 자동으로 변환해 주는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저자가 자유롭게 가격을 붙일 수도 있으므로 독립 저자들을 위한 오픈 마켓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가 지속되면, 결국 저자가 출판사가 되는 현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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