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경제인류학이란 무엇인가
인류학자들은 가장 특수한 것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준에서 사회가 조직되는 원리를 발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경제인류학은 ‘원시인의 경제학’이라는 모습을 갖기 오래전인 19세기부터 이미, 서구의 산업사회를 떠받치는 원리들이 모든 경제 질서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검증해 보는 것을 스스로의 목표로 삼았다. 서구의 산업사회는 스스로를 모든 인류 경제생활의 보편적 형태로 내세우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 무렵은 자유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 공산주의 같은 좀 더 정의로운 경제를 지지해 줄 여러 대안들에 대한 탐색이 진행되고 있던 시대였다. 경제의 여러 기원과 진화 과정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사회는 여전히 변화와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따라서 아직 그 최종적 형태에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오면 학제간의 구별이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심해졌고, 이 때문에 자연과학을 모델로 삼는 여러 사회과학 분과들이 출현할 여지가 생겨났다. 인류학은 인간의 본성 가운데 다른 사회과학 분과가 도달할 수 없는 부분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가까스로 발판을 마련했다. 대학이 많이 생겨나고 또 팽창하고 있던 이 시대의 인류학자들은 ‘여러 다른 문화’에 대한 객관화된 데이터 뱅크를 축적하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 이 데이터를 소비하는 것은 일반 대중들이 아니라 인류학계의 내부자들과 다른 학문 분야의 몇몇 전문가들뿐이었다. 인류학이라는 업종은 문화적 상대주의의 패러다임에 (즉 모든 사회는 고유한 문화를 가지게 되어 있다) 고착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패러다임은 경제학에서 내세우는 보편적으로 유효한 진리 같은 것과는 본질적으로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류학자들은 자신들의 지적 권위를 멀고 먼 지역으로 떠나는 장기간의 여행과 탐험에서 찾기 시작했으며, 이 때문에 세계경제의 변화의 궤적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능력은 크게 손상되었다.
하나의 연구 분야로서 경제인류학이 발달해 온 과정을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단계는 1870년대에서 1940년대로서, 대부분의 인류학자들이 관심을 두었던 질문은 과연 ‘야만인들’의 경제적 행태를 지탱하는 것 또한 서양인들의 경제적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과 똑같은 종류의 효율성과 ‘합리성’의 개념인가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세계사를 단일한 진화 과정으로 관념하여 그 과정을 총망라하는 여러 다양한 설명들을 모아 내는 작업에 몰두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가 되면 그보다는 현지 조사가 지배적인 관행으로 자리 잡으며, 민족지 저자들은 자신들이 ‘원시’ 사회들에 대해 발견해 낸 특수한 사항들을 들어 주류(신고전파) 경제학의 일반적 명제들과 상대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들은 실패했다. 그 주된 이유는 그들이 경제학자들의 인식론적 전제들을 잘못 이해한 데에 있었다.
1950~1960년대에 냉전은 절정에 이르렀다. 세계경제는 호황이었고 어느 나라에서건 정부는 공공 서비스를 확장하는 동시에 금융시장을 엄하게 통제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내세웠다. 경제인류학자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특화된 보호구역을 연구하는 데에 필요한 이론과 방법을 놓고 자신들끼리 논쟁을 벌였다. 이들이 본래 연구하던 부족 사회 미개인들은 그 수가 줄어들고 있었지만 그 대신 이들은 연구 대상을 이제 전 세계의 농민들로까지 확장한 상태였다. ‘형식론자들’formalists은 이러한 과제에 있어서도 주류 경제학의 개념과 도구들로 충분하다고 주장했던 반면, ‘실체론자들’substantivists은 제도적 접근법이 더 적절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이 말하는 ‘제도적’이라는 의미는 여러 사회 가운데에서 그 경제생활이 몰인격적 시장으로 지배되지 않는 경우에는 항상 여러 다른 사회제도(가족에서 정부와 종교에 이르기까지)에 경제생활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 ‘형식론-실체론 논쟁’은 경제인류학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다. 이 논쟁은 일종의 교착상태로 끝이 났으며 그 와중에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들이 짧은 기간이나마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하지만 이들도 주로 이국적인 민족지라는 전통적인 주제에 근거를 두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 단계는 분수령이 된 1970년대부터 30년 동안에 걸친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시대이다. 이 시대에 경제인류학에서도 여러 새로운 비판적 관점들이 검토되었고, ‘문화적 방향으로의 전환’이 있었고, 특히 ‘신제도주의 경제학’New Institutional Economics이라는 옷을 입고서 정밀과학의 모양새를 갖추자는 열망이 새롭게 나타나기도 했다. 이 기간에 인류학자들은 인류의 모든 경제 조직으로 탐구의 범위를 확장하면서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해 나갔다. 지금까지도 이들은 주로 전통적인 민족지적 관찰과 기록의 방법을 고수하는 쪽을 선호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인류학자들이 이제 더 앞으로 나아가 세계경제 전체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이 새로운 네 번째 단계에 경제인류학이 마침내 독자적인 학문 분과로 자리 잡게 될 수도 있다.
여기에서 가장 기본적인 질문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 지난 두 세기 동안 세계경제를 지배할 수 있었던 북대서양 사회의 시장경제라는 형태가 여전히 보편타당성을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경제인류학의 역사는 동일성과 차이에 대한 논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인류학자들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바를 찾아내기 위해 그들이 살아가는 현장을 쫓아다닌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으며, 이 점에서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이제 우리는 안다. 수렵채집 생활을 하는 조그만 공동체의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월스트리트에서 벌어진 최근의 금융 공황을 분석할 수가 없는 것처럼, 이런저런 시장 모델의 렌즈를 통해 ‘비시장’ 사회의 경제 행위를 분석하는 일을 전혀 옹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렇게 서구 사회와 비서구 사회를 대비시키는 것은 그 유효성과는 별도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역사 속에 나타난 인간 경제의 다양성을 서구와 그 나머지라는 단 하나의 이분법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생각할 까닭이 전혀 없다. 어찌 되었건 인류학자들은 이제 현장조사에 기초를 둔 민족지를 넘어 20세기 내내 그들 대부분이 방기해 온 세계사에 대한 관점을 좀 더 포괄할 필요가 있다.
방법론에 관한 몇 가지 쟁점
스스로를 감히 보편적인 것이라고 내세우는 개념들도 잘 살펴보면 항상 특수한 역사를 갖고 있는 법이다. ‘경제’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에서 가정경제의 관리 및 경영(대개는 장원과 같은 토지)을 지칭하는 말 ‘오이코노미아’oikonomia에서 비롯되었다. 화폐와 시장에 기초를 둔 복잡한 노동 분업의 기원은 그보다 훨씬 더 옛날인 기원전 3000년 무렵의 메소포타미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지만 이 ‘오이코노미아’는 시장 원리의 대립물로 여겨졌다. 물론 인간은 태초부터 저마다 생활환경 속에서 다른 집단들과 재화를 교환하면서 스스로를 재생산해 왔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경제는 인류 자체만큼이나 오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근대 이후에 작성된 민족지가 이러한 역사를 해명할 수 있는 바는 극히 제한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그 대신 다른 학문들 특히 경제 고고학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화석의 기록을 포함한 물질생활의 흔적에 대한 고고학 연구는 태고 적 사람들이 생계를 꾸리고 교환을 이어 오던 양식들에 대해 풍부한 실마리를 제공하지만, 그 성원들이 자신들의 물질생활의 여러 임무를 스스로 어떻게 개념화했고 운영했는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근대의 인류학자들은 초창기 인류의 경제를 끊임없는 생존 투쟁이라고 보는 것은 크게 빗나간 생각일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은 바 있다. 농업의 발견 뒤에는 노동 투입의 강화가 뒤따랐고, 이 때문에 단조롭고 고된 작업들이 일상의 노동으로 자리 잡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구석기시대의 수렵채집 생활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초창기 농경 생활을 하던 이들도 오늘날의 우리들과 비슷하게 노동을 이해했을 것 같지는 않다.
비록 ‘경제’라는 말이 유럽의 사회사상사에서 독특한 계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때문에 인류학자들이 물질적 부존자원이 서로 다르고 그것을 이해하는 사고방식 또한 다양한 여러 집단의 인간 경제를 연구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경제인류학에서 가능성과 영양분을 가장 많이 남기고 있는 흐름은 경제의 ‘지역 모델’을 탐구하는 일이다. 예를 들자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삼림을 자신들에게 안정을 가져다주는 고마운 원천으로 보는 식량 채집자들의 모델 같은 것들이다(5장을 보라). 노동, 희소성, 불확실성 같은 서구의 개념은 이들에게는 결코 익숙한 것이 아니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이 경제라는 말이 계속해서 정치, 도덕, 문화, 표상, 심지어 정신에 이르기까지 온갖 다른 용어들과 결합되어 쓰인다는 점이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고대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경제라는 말의 의미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 역사적으로 개괄해 볼 것이다. 경제는 근대 문명을 이해하는 키워드 가운데 하나이다. 이 말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궤적을 그려 왔는가를 이해하게 되면 그 말을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좀 더 조심스러워질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경제인류학을 서구 지성사라는 맥락은 물론 세계사의 특정한 관점 속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이 때문에 생겨나는 좀 더 심각한 한계가 있다. 우리의 설명은 북대서양 사람들의 관점으로 심하게 편향되어 있으며, 유럽과 미국의 세계 지배라는 현실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지배를 근대의 학문이 표상해 왔던 바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경제인류학자들은 한 세기가 넘도록 온 지구에 걸쳐 연구 작업을 펼쳐 왔지만, 자기의식을 가진 지적 공동체가 처음 형성된 것은 식민지를 가진 유럽의 제국들이었으며, 그러한 공동체가 결국 하나로 공고하게 합쳐진 것은 훗날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몇 십 년 동안 이러한 경제인류학자들은 인류학 안에서 높은 위상을 차지해 왔다(인류학 바깥에서는 전혀 그러지 못했지만). 책이 목표로 삼는 바는 경제인류학이라는 지적 공동체를 이렇듯 자기 스스로를 의식할 줄 아는 학문으로서 다시 한 번 일으켜 세우자고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경제인류학을 이전보다 더 조심스럽고 종합적으로 규정하는 한편, 더욱 탄력적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우리의 목적이 다른 여러 학문 분야와 다리를 놓아 전 지구적 기초 위에서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할 폭넓은 틀을 제공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의 경제인류학은 이제 막 생겨나려는 맹아 상태에 있다. 이 책에서 그러한 경제인류학의 틀을 마련하고 그 기초가 되는 저작을 쓴 이들로 여러 서양 학자들을 열거하게 되겠지만, 그들 가운데 다수는 20세기 후반이 되어 경제인류학이라는 이름이 분명히 생겨났던 때까지도 스스로를 경제인류학자라고 분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이 책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독자들은 다른 비서구의 지적 전통에서 비슷한 위치에 있는 선구자들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의 경제
19세기 이래 ‘경제’라는 용어는 한 나라의 국경선 안에서 매매된 재화와 서비스의 총합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영국 경제’ 같은 표현이 나올 수 있었다. 이 용어는 또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와 결합되기도 한다. 독일어의 ‘국민경제’Volkswirtschaft나 헝가리어의 ‘인민경제’négazdaság 같은 말이 그런 예이다. 이러한 경제는 수량으로 측정이 가능하며, ‘일인당국민총생산’ 같은 핵심 지표에서 볼 수 있듯이 무엇보다 생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근대의 여러 경제는 소비자의 수요에 결정적으로 의존한다. 수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돈이 없어서 자신들의 생필품 수요를 유효수요로 만들지 못하고 있는 반면, 다른 많은 이들은 더 이상 생존의 문제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면 이 후자에 해당하는 이들은 삶에 필수적이지도 않은 재화들을 구매하기 위해 힘든 노동을 감수한다는 말이 되는데, 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과제는 만만치 않은 도전일 수밖에 없다. 그 대답은 이런 재화들이 여러 사회적․개인적 목적에 비추어 ‘가치’를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희소성은 그 자체로 높게 가치가 매겨지기도 하지만, 그러한 희소성 또한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생산과 소비를 연결해 주는 것은 분배의 과정인데 이 과정은 지극히 불평등한 경우가 많다. 간혹 ‘교환’이라는 말과 ‘분배’라는 말을 섞어 쓸 때가 있지만, 이 둘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 교환은 경제생활에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이지만, 무척 다양한 형태이기에 모든 자원의 흐름을 교환이라는 범주에 넣어서도 안 된다. 지배자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을 두고서 그 대가로 지배자의 보호를 얻어 내는 것이니 교환 행위라고 말한다면 일종의 불평등 관계를 그릇되게 표상하는 일이 될 것이다. 반면 오늘날의 국가가 개인들에게 지불하는 사회복지는 조세로 자금을 마련한 소득 이전, 곧 교환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나눔이라고 보는 편이 낫다. 경제학자들은 교통, 에너지 시장, 외환, 보건, 주택에 이르기까지 경제생활을 구성하는 갖가지 특수한 하위 분야를 자신의 전공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근대에 들어와서 서양 사회의 경제는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으로 나뉘어 각각 시장과 국가가 지배력을 갖는 것이 관행이었으며, 판매를 통한 이윤이라는 원리와 조세 및 정부의 재분배라는 원리가 서로 대척점에 놓이게 되었다. 지난날 냉전 시절에는 경제의 조직에서 어떤 모델이 우월한지가 동서 진영의 전선을 규정하는 핵심이었고, 그 싸움의 핵심에는 소유권에 대한 문제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이 익숙한 대립 구도는 최근 들어 애매해졌으며 이제는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의 구별조차 모호할 때가 많다.
유럽 대륙에서는 정치 질서와 규제의 중요성을 변함없이 강조하는 경제학 전통이 여전히 존재한다. 중앙 계획의 개념에 기초를 두는 전통이 있었고 한때 영향력도 강했지만, 이 전통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지배적인 경제학의 전통은 19세기 이래로 영국 공리주의에서 자라 나왔다. 이 전통에서는 자유시장의 개념과 예산 제약선 안에서 ‘가치’를 극대화하는 개인이라는 개념을 중심에 놓는다. 가치는 보통 화폐 단위로 표현된 비용과 편익이라고 이해된다. 가족에게 선물을 준다든가 자선 단체에 기부하는 것처럼 분명 시장적인 의미에서 가치를 극대화하는 쪽으로 행동하지 않는 듯한 개인들이 있지만, 공리주의 전통에서는 이들 또한 희소성의 조건 아래에서 효용 극대화를 위해 선택하는 것은 똑같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효용이라는 신비롭고 알쏭달쏭한 놈의 실체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경제학자들도 더 이상 해명해 주는 바가 없다. 어떤 경제학자들은 가족 같은 가장 내밀한 사적 영역에까지 ‘합리적 선택’이라는 개념을 밀어붙이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이론으로 모든 종류의 교환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으며 따라서 세대 간 또 세대 내의 여러 소득 이전도 자신들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경제학을 사람들이 내리는 선택에 대한 연구로 정의하고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러한 합리적 선택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면, 경제학은 당연하게 인간의 생활과 그 진화까지 (아마도 동물 세계 대부분의 진화까지도) 모든 영역을 포괄하게 될 것이다. 또한 경제학이 시스템 수준에서의 합리성도 활용하게 되면 우리가 친족과 상호작용을 맺는 특정 행동 패턴뿐 아니라 아예 우리가 왜 그러한 친족 시스템을 만들었는지, 나아가 우리가 왜 우리의 지배자들에게 순종하는지 또 신을 숭배하는지 등도 설명하게 될 것이다. 경제학은 모든 학문을 아우르는 ‘지배 학문’master discipline 이 될 것이며, 그에 견줄 만한 학문이라고는 오로지 생물학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 경제학과 생물학 사이의 교류는 오늘날 크게 확대되고 있으며, 예를 들어 진화 경제학이라고 알려져 있는 분야에서는 사회문화적 선택과 자연선택이 상호작용하면서 다윈적인 ‘공진화’co-evolution를 이루는 과정을 분석하기도 한다.
이렇게 정의된 경제학의 접근법은 연구 대상을 세련된 수준에서 형식적이고 수학적인 방법으로 다루는 데에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합리적 선택의 접근법으로는 행위자들이 어째서 그러한 선호를 갖게 되었는지 또 그 근저에 있는 도덕적 가치들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의 순환논리로 전락하고 만다. 경제에서 인간을 제거함으로써 ‘국민경제’Volkswirtschaft에서 ‘국민’Volk*을 없애버리는 꼴이 된다. 우리도 경제학자들에 못지않게 폭넓은 의미에서 경제를 이해하지만, 이해 방식은 상당히 다르다. ‘인간의 경제’란 인간의 안녕과 모든 인간적 필요 욕구의 충족을 가리키는 개념이다(Hart, Laville and Cattani 2010). 사적인 시장 거래에 의해 충족될 수 있는 필요 욕구들만이 아니라, 교육과 안전, 건강한 환경 같은 공공재들에 대한 필요 욕구 그리고 일인당 소득 같은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존엄과 같은 무형적 성질의 필요 욕구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경제적 효율성’을 증가시키겠다는 목적 아래 여러 시장 메커니즘이 (이는 결코 ‘자유시장’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결과물들이다) 여러 새로운 부문으로까지 확장되어 있다. 하지만 ‘교육’처럼 가치를 담고 있는 재화에다가 시장을 만드는 것은 결코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비로소 사람들이 깨달아 가고 있다. 교수와 교사를 다른 상업적 서비스 공급자들과 똑같이 다루게 되면 여려 측면에서 교육의 질적 저하가 벌어지게 된다. 하지만 통계 숫자는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이끌게 될 때가 많다. 친족 관계와 종교 제도 또한 장기적으로 보면 그 모습을 경제가 만들어 나간다는 생각에 우리도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효율성이니 추상적 개인의 합리성이니 하는 개념들에 근거한 진화론 모델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며, 경제생활의 조직을 이해하는 데 물질적 기록과 역사적․민속문화적 기록들을 제대로 평가하고 참작하는 좀 더 다방면의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독일어의 ‘Volk’를 비록 관례적으로 ‘국민’으로 번역해 놓기는 했으나, 이 말이 본래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라는 구체적 인간 집단을 의미하는 어감이 강하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인간 경제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에서는 생활수준이라는 문제도 더 폭넓게 바라보아야만 하며, 인간의 필요 욕구와 행동 동기의 문제를 다방면의 넓은 범위에서 다루어야만 한다. 현대사회에서 대부분의 재화 배분에 시장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며, 20세기 유라시아에서 펼치던 ‘사회주의’ 경제 계획의 최후는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7장을 보라). ‘자본주의적’ 시장의 확장으로 전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생활수준의 실질적인 개선이 이루어졌다. 물론 이러한 팽창 과정과 함께 착취와 고통이 뒤따른 것은 사실이며, 또 그 과정이 아주 불평등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무제한의 시장이라는 것이 민주주의 자체마저 위협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더 많은 규제를 외치며 시장을 거부하거나 고삐를 씌우려 하기 전에 던져 보아야 할 질문이 있다. 어째서 그토록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시장에서 빠져나오기는커녕 오히려 기를 쓰고 더 깊이 들어가려고 하는가이다. 어쨌든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 경제에 대한 연구는 시장에서 나타나는 익명적 존재들의 매매 활동으로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시장이 존재하기 위한 여러 전제 조건들은 갖가지 정치제도, 사회 관습, 도덕 규칙 등을 통해 확립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합리적 선택 이론가들은 로빈슨 크루소의 전통에 서서 개인을 강조하며, 심지어 남들과 협력하겠다는 결심마저도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개개인들의 이익 계산의 결과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이 ‘인간의 경제’를 이야기할 때 강조점은 개인들에게 있다. 그런데 이 개인들의 선호와 선택이 혼자의 계산으로 생겨날 때도 있지만, 이는 또 인간들이 엮어 있고 묻어 들어 있는 가족, 사회, 정치의 맥락 속에서 그 모습이 형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경제학계 내부의 일각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인정하는 목소리가 있지만, 주류 신고전파의 전통에 비해 주변적인 것에 불과한 경향이 있다. 경제학자들도 다른 이들처럼 이러한 시장 원리들을 마구 확장하는 것이 얼마나 말이 되는 일인지를 놓고 서로 의견들이 다르다. 물론 경제학을 효용 극대화라는 개인의 논리를 모든 사회생활의 영역에 적용하는 것이라고만 정의하는 이들과는 대화가 이루어질 희망이 별로 없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경제학자들 가운데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는 이들이 많지는 않다. 우리는 현실 세계에 관심을 가진 경제학자들에게 인류학자들이 인간의 경제에 관해 발견한 것들에도 관심을 가져 보라고, 나아가 인간의 경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제시하는 이론들에 대해서도 한 번 관심을 가져 보라고 설득하고 싶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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