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과 백 사이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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뤄 독찰督察은 병원 냄새를 싫어했다.
공기 중에 흩어져 물컥대는 소독약 냄새 말이다. 병원에 무슨 좋지 못한 기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병원 공기는 종종 냄새가 비슷한 시체보관소를 떠올리게 했다. 27년간 경찰로 일하며 무수한 시체를 봤지만 그 냄새에는 익숙해지질 않았다. 시체에 특수한 애호를 보이는 변태가 아니라면 누가 죽은 사람을 앞에 두고 유쾌한 기분이겠는가? 뤄 독찰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마음속의 불안이 한 번의 심호흡으로 사라질 리는 없었다. 시체보관소에서 검시과정을 지켜볼 때보다 지금이 훨씬 마음이 무거웠다.
위아래로 파란색 양복을 맞춰 입은 그는 병상에 누운 사람을 쓸쓸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일인 병실, 백발의 노인이 침대에 누워 있다. 산소마스크 아래의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고 두 눈은 굳게 감겨 있었으며 피부는 창백했다. 검버섯이 드문드문 핀 팔뚝에 꽂힌 가는 관들이 여러 대의 의료기기에 연결되어 있었다. 침대 위쪽에 걸린 17인치 모니터에는 환자의 맥박, 혈압, 혈중산소함량 등의 정보가 표시됐다. 가느다란 선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 선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누구나 노인이 이미 사망했으며 침대 위에는 보존이 아주 잘 된 시체가 누워 있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노인은 뤄 독찰의 ‘사부’였다. 뤄 독찰에게 오랫동안 자료조사, 증거수집, 추리, 사건 해결을 가르쳤지만 사부는 단 한 번도 게임의 규칙에 따라 패를 내놓은 적이 없었다.
“샤오밍, 사건 수사는 관례를 고수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경찰 조직에는 발전도 없이 세월을 보내면서 매뉴얼대로 일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조직의 기강을 세우려면 상급자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게 철칙이지만, 이것만은 기억해야 해. 경찰의 진정한 임무는 시민을 보호하는 일이라는 것. 제도가 무고한 시민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정의를 표방하지 못한다면,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분명한 근거를 내세워서 경직된 제도에 대항해야 하네.”
뤄 독찰은 사부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쓰게 웃었다. 뤄 독찰의 이름은 뤄샤오밍駱小明이다. 14년 전 견습독찰로 진급한 뒤로는 그의 우스운 이름(샤오밍을 영어로 음역하면 소니Sonny가 되는데 젊은이를 부르는 말이라서 얕잡아 보인다는 뜻)을 대놓고 부르는 동료들이 없어졌다. 모두들 그를 뤄 독찰이라고 부른다. 오로지 그의 사부만이 줄곧 샤오밍이라고 불렀다.
사부인 관전둬關振鐸 경사警司 입장에서 뤄 독찰은 아들과도 같다.
관 경사는 은퇴하기 전까지 총부總部(홍콩경찰의 총괄부서) 형사정보와 B조의 조장으로 일했다. CIB라고도 불리는 형사정보과는 홍콩경찰의 중앙정보기관이다. 각 지역 경찰서의 범죄 정보를 수집, 분석, 연구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동시에 다른 부서와 협력하여 여러 작전을 계획한다. CIB가 대뇌라면 B조는 추리를 담당하는 전두엽이라 할 수 있다. 수집한 정보를 분석하고 조합하여 ‘거미줄과 발자국’ 같은 사소한 단서 속에서 다른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사실을 찾아낸다. 관전둬는 이 핵심조직을 1989년부터 통솔한 형사정보과의 주요 인물이다. 그가 은퇴하던 1997년, 말단 형사였던 뤄샤오밍이 형사정보과 B조로 발령받으면서 관전둬 경사의 ‘제자’가 되었다.
관 경사가 정식으로 뤄샤오밍의 상관이었던 기간은 반년뿐이지만, 은퇴한 뒤에도 계약 형식으로 경찰조직의 고문 역할을 맡았기에 스물두 살이나 어린 후배 뤄샤오밍을 가르칠 기회가 많았다. 자식이 없는 관전둬는 뤄샤오밍을 아들처럼 대했다.
“샤오밍, 범인과 심리전을 펼치는 건 포커 게임과 같아. 상대가 자네의 패를 잘못 예측하도록 유도해야 해. 에이스 두 장을 갖고 있을 때도 마치 2나 3 같은 낮은 패라고 생각하도록 만들고, 승산이 낮다고 생각되더라도 허세를 부리며 판돈을 높여서 자네가 이길 패를 쥐고 있다고 여기게 해야 해. 그래야만 범인이 빈틈을 드러내거든.”
관전둬는 뤄샤오밍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가르치듯 자신의 수사방법을 남김없이 전수했다.
오랫동안 함께하며 뤄샤오밍도 관전둬를 아버지처럼 대했다. 뤄샤오밍은 관전둬의 성격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훤히 알았다. 동료들은 관전둬를 ‘사건해결기계’ ‘천리안’ ‘천재 탐정’ 등 다양한 별명으로 부르곤 했다. 그러나 뤄샤오밍이 생각하기에 가장 어울리는 별명은 이미 돌아가신 ‘사모’, 다시 말해 관전둬의 아내가 붙인 것이었다.
“이이는 그냥 시시콜콜 따지고 드는 사람이야. 도숙度叔이라고 부르는 게 딱이지.”
광둥어(홍콩에서는 대부분 중국 광동성 방언인 광둥어를 쓴다)에서 ‘도숙’이란 쪼잔하고 씀씀이가 인색한 사람을 놀리는 말이다. 공교롭게도 관전둬의 ‘둬鐸’와 도숙의 ‘도度’는 광둥어로 같은 발음이었다. 뤄샤오밍은 오래전 사모가 말한 언어유희를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재치 넘치고 노련하면서 고결하고 세속에 휩쓸리지 않는, 그리고 돈 몇 푼도 세세하게 따지는, 이렇게 독특하고 괴상한 인물인 관전둬는 1960년대의 좌파폭동을 겪었고, 1970년대의 경찰과 염정공서廉政公署 분쟁을 버텨냈으며, 1980년대의 강력범죄에 대항했고, 1990년대의 홍콩 주권 반환을 목도했으며, 2000년대의 사회변화를 증언하고 있다. 수십 년간 묵묵히 수백 건의 사건을 해결하며 홍콩경찰의 역사에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이다.
그러나 지금 그 인물은 죽음을 앞두고 있고, 그가 일조했던 홍콩경찰의 이미지 역시 어느 틈엔가 붕괴하고 말았다. 2013년인 지금, 홍콩경찰의 빛은 이미 색이 바랬다.
영국의 식민지였을 무렵 홍콩경찰은 충성을 다하여 직책을 수행한 공로로 영국 여왕으로부터 왕립Royal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1970년대 말 부정부패와 뇌물수수를 일소한 이래로 전 세계에서 첫째 둘째를 다툴 정도로 뛰어난 집법기관이기도 했다. 효과적으로 홍콩의 범죄활동을 저지했고, 시민 보호를 자신들의 최우선 임무로 삼았기에 사회 각층의 지지를 받았다. 홍콩경찰은 공명정대하고 성실하며 믿음직스럽다는, 전문적인 이미지를 쌓아올렸다. 가끔 냇물을 흐리는 미꾸라지 같은 경찰도 있었다. 그러나 경찰이 심각한 범죄에 연루된 경우에도 대부분의 시민은 단지 개별적인 사례일 뿐이라고 여겼고 홍콩경찰에 대한 평가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경찰에 대한 시민의 평가에 영향을 끼친 것은 오히려 정치문제였다.
1997년 홍콩 주권이 반환된 뒤 정치적 화제는 한 해 한 해 뜨거워졌다. 가치관의 차이는 갈수록 정치적 대립을 확산시켰고 결국 사회문제가 되기에 이르렀다. 사회운동, 시위 등은 더욱 격렬해졌고 이에 따라 일선 경찰이 시위대와 가장 먼저 충돌하게 되었다. 지난 몇 년 경찰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강경하게 시위자들을 진압했고, 강력범죄를 담당해야 할 중안조重案組(홍콩경찰의 강력반)를 투입해 그들을 조사하고 체포했다. 이 때문에 사회적으로 경찰의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런 목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중도적 시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경찰이 이중 잣대를 갖고 법을 집행한다는 사실이 홍콩경찰의 이미지를 가장 크게 훼손했다. 경찰은 정치적 중립이라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어떤 경우라도 모든 시민을 차별 없이 대하고 공평하게 일을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요즘 홍콩경찰은 정부친화적인 시위대와 충돌했을 때는 평소와 같은 고효율의 진압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혹자는 홍콩의 공권력이 공공의 정의를 억누르고 있으며, 홍콩경찰은 정권의 앞잡이가 되었다고 비판했다.
예전에 이런 비판을 들었을 때는 뤄 독찰도 하나하나 반박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 역시 그런 이야기들이 진실이 아닐까 하는 회의가 생긴다. 그도 더 이상 당당하게 경찰은 절대 중립이고 시민의 편이며 불편부당하게 법을 집행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경찰조직에서도 파트타이머처럼 근무하는 동료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이 직업의 신성한 본질을 망각한 채 상관의 명령을 단순히 집행할 뿐이다. 노동력을 월급으로 교환해 살아가는 보통의 직장인과 아무런 다른 점이 없다.
‘일을 많이 할수록 실수도 많아진다. 일을 적게 하면 실수도 적고, 아예 하지 않으면 실수도 없다’라는 말이 시시때때로 뤄 독찰의 귀에 들려왔다. 뤄 독찰이 1985년 경찰에 투신한 까닭은 경찰이라는 신분을 동경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경찰이란 나쁜 놈들을 없애고 착한 사람들을 지키며 정의를 수호하는 신성한 일이었다. 그러나 새로 경찰이 된 후배들 중 많은 수가 경찰을 ‘신분’이 아니라 ‘직업’으로 여겼다. ‘범죄를 원수 보듯 한다’거나 ‘악행을 증오하고 견제한다’는 말은 그저 표어에 불과했다. 그들은 일을 잘 해내기보다 무사히 끝내기만을 바랐고, 직무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 되도록 빨리 몸은 편하고 월급은 많은 직책으로 승진하고 싶어 했다. 그런 다음 편안하게 퇴직까지 기다렸다가 후한 퇴직금과 연금을 받으려는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이 보편화되면서 홍콩경찰은 서서히 그 특질을 잃어 갔고 시민들도 점차 그 사실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경찰의 이미지는 매년 하락했다.
“샤오밍, 시민들이 우리를 미워하고 위에서는 신념에 어긋나는 일을 지시하더라도, 앞뒤로 적을 두게 되더라도 절대 경찰의 본분과 사명을 잊어서는 안 돼.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만 하네.”
얼마 전 실처럼 연약한 호흡을 가쁘게 몰아쉬던 병상의 관전둬가 뤄 독찰의 손을 꼭 쥐고 필사적으로 뱉어낸 말이다.
뤄 독찰은 사부가 말한 본분과 사명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잘 알고 있었다. 동東카오룽 총구의 중안조 조장으로서 자신의 임무는 단 하나, 시민을 보호하고 범인을 체포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고 묻혀버리게 될 때 그는 잘못을 바로잡고 정의를 지켜낼 수 있는 마지막 방어선인 것이다.
오늘 그는 사부의 남은 목숨에 의지해 임무를 이행하려고 한다.
오후의 태양이 창밖의 새파란 해안을 비춘다. 찬란한 햇살이 전면 유리창을 투과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환자의 생존을 알려주는 의료기기의 간헐적 소음에 뒤섞여 빠르고 경쾌하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병실 한쪽에서 어떤 여자가 한창 뤄 독찰이 그 임무를 이행할 수 있도록 협조하는 중이었다.
“애플, 아직이야? 금방 도착할 텐데.”
뤄 독찰이 고개를 돌리고 애플이라고 불린 여자에게 물었다.
“금방 돼요. 시스템을 바꿀 거라고 미리 말해줬더라면 이렇게 정신없지 않을 거라고요. 인터페이스 수정은 어렵지 않지만 컴파일링에는 시간이 필요하단 말이에요.”
“응, 부탁할게.”
뤄 독찰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문외한이어서 인터페이스니 컴파일링이니 하는 것이 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애플의 전문기술을 신뢰했다.
애플은 대답을 하면서도 계속 키보드에 고개를 처박고 들지 않았다. 낡은 검정색 야구모자로 덥수룩한 갈색 곱슬머리를 눌러놓은 얼굴에는 화장기라곤 없었다. 콧잔등에는 두껍고 묵직한 검정 테 안경을 얹었고, 검정색 티셔츠와 낡아빠진 멜빵 달린 데님바지를 입고, 검정색 페디큐어를 바른 열 개의 발톱이 잘 드러나는 샌들을 신었다. 애플은 온몸으로 괴짜의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애플 앞에 놓인 전원이 켜진 랩탑 컴퓨터 세 대와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온갖 색깔의 전선다발은 그녀보다도 더 이상해 보였다.
똑똑.
방문 밖에서 두 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왔군.’ 뤄 독찰은 속으로 읊조렸다. 그 순간 그는 숙련된 사냥매의 눈빛을 회복했다. 바로 형사의 눈빛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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