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라는 고전
“교과서에 실린 시들 중에 왜 윤동주의 시가 가장 많지?”
“윤동주는 지나치게 높이 상찬받는 작가라고.”
“윤동주의 시는 청소년 시절에 잠깐 읽을거리에 불과해.”
“윤동주는 ‘만들어진 고전古典’이야.”
오랫동안 윤동주의 시를 업신여기던 내 안의 고정관념들입니다. 이십 년이 넘도록 시를 쓰고 가르친답시고 시늉해왔으면서도 ‘윤동주’라는 이름만 나오면 무지르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서시」)라는 구절이 슬며시 제 영혼에 깃들었어요. 찬란히 빛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지금 여기서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겠답니다. 이 문장에는 계급도, 정치도, 학문도 없고, 오직 ‘슬픔 곁으로 다가가는 마음’만 있었습니다.
그날 마음 문이 조금 열렸습니다. 마음의 채비를 달리하자 시 한 편 한 편에서, 단어 하나하나에서 빛깔이 튕기고 소리가 들렸습니다. 붕어를 잡으려 했는데 붕어가 아니라 잉어, 살아 펄떡이는 거대한 생명체를 끌어올리는 느낌이랄까. 그저 금붕어 정도로 생각했다가 한 편 한 편 곰삭혀 읽으면서 유유히 유영하는 ‘잉어’로 다가왔습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팔복」)라는 구절을 받아들이자 제 영혼 한쪽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물론 ‘윤동주’라는 이름 석 자가 지나치게 신비화되어 있는 면도 있습니다. 그의 시를 제대로 읽지 않고 역사의 희생물이라며 영웅시하는 이들도 있지요. 내 속에도 그렇게 우상화된 윤동주가 있을까봐, 이 책을 마무리하기 전 육 개월간 윤동주의 시를 읽지 않았습니다. 윤동주에게서 차갑게 거리 두고 싶었습니다. 윤동주도 그저 보통 사람처럼 내면의 욕정과 질투를 고민하던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윤동주의 시에는 정지용을 모방한 모작도 있고 좀 떨어지는 태작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우리를 북받치게 할까요.
그의 시입니다. 신비화된 윤동주가 아니라 그가 쓴 ‘시’, 그것도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읽어보는 것이 윤동주를 만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평범한 청년이 써온 시를 읽다보면, 맹자, 키르케고르, 투르게네프 등을 만나고요. 잉어를 힘겹게 끌어당겨 올리면 팔목과 가슴에 미세한 근육이 생기듯, 윤동주의 시를 대하면 영혼에 미묘한 근육이 생깁니다. 무엇보다도 행복이 무엇인지,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합니다.
이제 겨울날 꽁꽁 얼어붙은 물 아래로 펄떡이는 잉어를 기러낸 백여 년 전의 만주땅으로 거슬러 올라가겠습니다. 지평선 보이던 벌판을 향하여 집단 이주 했던 백여 년 전 사람들을 만나러 갑니다. 시혼무한詩魂無限 광야에서 자라는 소년을 만나러 갑니다.
시인의 탄생 ─ 명동마을
만주·명동마을·김약연
「오줌싸개 지도」 「곡간」
가장 사랑하는 장소가 있는지요.
누구에게나 고향이 있고, 잊지 못할 장소가 있습니다. 그 장소와 풍경을 생각하기만 해도 힘이 나는 그런 곳이 있습니다.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는 원동력을 품고 있는 장소를 인간은 희구합니다.
그리스어로 장소topos와 사랑philia의 합성어를 토포필리아topohilia, 곧 장소애場所愛라고 합니다. 누구나 자기가 사랑하는 장소를 갖고 있습니다. 고향, 조국,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공간은 사랑을 발생시킵니다. 가령 조선시대 때 시인이 장소애를 느낄 수 있는 풍경을 시로 쓰면, 화가는 산수화로 담아냈습니다. 사진기가 없었던 시절의 명승지 산수화는 대단한 인기였죠.
작가마다 사랑하는 공간이 있지요. 작가가 태어나고 자란 장소가 지닌 기운은 그 작가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칩니다. 작가들은 대부분 자신을 길러낸 곳에 대한 장소애를 작품을 통해 회감回減시킵니다. 장소topos에 대해 쓰는 것graphein을 지형학topography이라 하는데, 고향을 그리는 ‘장소애’를 ‘마음의 지형학’으로 기록하는 것이 작가의 운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윤동주의 시에 ‘만주’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밧줄에 걸어논
요에다 그린 지도는
간밤에 내 동생
오줌 싸서 그린 지도.
위에 큰 것은
꿈에 본 만주땅
그 아래
길고도 가는 건 우리땅.
─윤동주, 「오줌싸개 지도」(1936년 추정) 전문
이 시 외에 「고향집」에서도 ‘만주’가 나옵니다. 「고향집」의 부제는 ‘만주에서 부른’입니다. 만주란 어떤 곳이었을까요. 함경도 북부의 두만강 너머 중국 지역을 ‘만주滿洲’라고 합니다. 만주라고 하면 못사는 곳을 떠올리곤 합니다. 만주로 갔다고 하면 궁핍한 나머지 간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만주는 넓은 대륙이었습니다. 만주에 대해 대개 세 가지 특징을 말합니다.
첫째, 지리적으로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 있다는 주변성周邊性, periphery입니다. 중국 동북 지역에 해당하는 만주는 중화中華의 중심 지역이라 하는 중원中原과 멀리 떨어져 있는 변두리입니다. 고구려, 발해 등 이족의 세력권입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쓰여 있듯이 청나라가 건설되면서 중국의 새로운 관심지로 주목받았으나, 여전히 중심지는 아니었고 중원과는 분명히 차별되는 변방이었습니다.
둘째, 여러 종족이 섞여 살았던 다민족 지대이기도 했어요.
산둥山東, 허난河南 등 중국 내륙의 이주민들이 만주에 흘러들었고, 여기에 한반도, 러시아 등에서 온 다양한 민족의 디아스포라들이 합쳐져 혼종적인 주민 집단이 만들어졌습니다. 1940년대 당시 만주국 신징新京으로 갔던 백석은 공동목욕탕 풍경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서로 나라가 다른 사람인데
다들 쪽 발가벗고 같이 물에 몸을 녹히고 있는 것은
대대로 조상도 서로 모르고 말도 제가끔 틀리고 먹고 입는 것도 모두 다른데
이렇게 발가들 벗고 한물에 몸을 씻는 것은
생각하면 쓸쓸한 일이다
이 딴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이마들이 번번하니 넓고 눈은 컴컴하니 흐리고
그리고 길즛한 다리에 모두 민숭민숭하니 다리털이 없는 것이
이것이 나는 왜 자꾸 슬퍼지는 것일까
그런데 저기 나무판장에 반쯤 나가 누워서
나주볕을 한없이 바라보며 혼자 무엇을 즐기는 듯한 목이 긴 사람은
도연명陶淵明은 저러한 사람이었을 것이고
(……)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만 같다
이리하야 어쩐지 내 마음은 갑자기 반가워지나
그러나 나는 조금 무서웁고 외로워진다
그런데 참으로 그 은殷이며 상商이며 월越이며 위衛이며 진晉이며 하는 나라 사람들의 이 후손들은
얼마나 마음이 한가하고 게으른가
(……)
그러나 나라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글쎄 어린아이들도 아닌데 쪽 발가벗고 있는 것은
어쩐지 조금 우스웁기도 하다.
─백석, 「조당에서」(『인문평론』, 1941. 4) 중에서
국제도시 신징에서 백석은 다민족 사회의 ‘쓸쓸한 타자’들이 함께 목욕하는 허름한 옛날 ‘조당澡堂, 짜오탕’, 곧 공중목욕탕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나주볕(저녁 햇살)을 보는 중국인을 보며, 도연명을 떠올리는 백석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만” 같아 호감을 느끼고 반가운 마음을 가지다가도 “조금 무서웁고 외로워”집니다. 그네들과 함께하는 목욕이 “쓸쓸한 일”이 되는 것은 그 자신이 그들과 함께할 수 없는 이방인으로서의 거리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시에는 디아스포라의 쓸쓸함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보는 타자(중국인)에게는 쓸쓸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네들의 방약무인함, 자아도취의 모습만이 보일 뿐입니다. “어쩐지 조금 우스웁기도 하다”는 구절은, 서로 이질적인 것들이 난립, 혼재하고 있음에도 이른바 오족협화를 들먹이는 만주국의 허구성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도연명과 백석은 중심에 적응할 수 없었던 쓸쓸한 주변인周邊人, the marginal이었습니다.
이미 19세기 말 많은 조선의 난민들이 만주로 이주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았습니다. 이어서 “조선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1907년 8월 용정촌에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세웠습니다. 1909년 11월 2일에는 ‘간도일본총영사관’과 방대한 경찰 기구를 설립했습니다.
1931년 일제의 관동군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고, 1932년 3월 1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내세워 만주국(1932~1945)을 세웁니다. 만주국은 일본인, 조선인, 한족漢族, 만주족, 몽골족 등 오족五族을 협화協和한다는 명목으로 세워졌습니다. 따라서 만주에 거하고 있던 조선인은 국적법으로 만주국인이 되었습니다. 재만조선인은 한일합방에 의해 일본 국적의 신민이 되었는데, 1932년에 만주국이 세워지고 조선계 일본인으로 귀속되었습니다.
만주국에서 오족협화 이념을 선전하고 있던 상황에, 벌거벗은 상태에서도 서로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없는 마음을 그린 백석의 「조당에서」는 각기 다른 디아스포라의 쓸쓸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디아스포라 지역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디아스포라diaspora, διασπορά는 ‘씨 뿌리다Σπορά’라는 뜻의 그리스어 ‘dia speriena scattering of seeds’에서 유래했어요. 디아스포라는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그리스와 로마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을 가리킵니다. 유대인에게 쓰였던 이 단어는 이후 특정 민족이 흩어져 살 때 쓰이곤 합니다. 유대인 디아스포라도 있고, 중국인 디아스포라, 이탈리아인 디아스포라도 있지요. 윤동주는 ‘조선인 디아스포라’였습니다.
셋째, 문화적으로 여러 문화가 섞여 있는 혼종성hybrid을 보여주는 지역입니다. 만주 지역을 떠올리면 감자나 겨우 캐 먹는 궁핍한 생활을 연상할지 모르나 그렇지 않은 지역도 있었습니다. 중원 문화가 아닌 변두리 지역이지만 러시아의 대륙 문화, 일본의 식민 문화가 만주에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하얼빈과 다롄에 철도시설을 놓았습니다. 윤동주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만주는 화려한 부흥기를 맞습니다.
이후 지금의 창춘長春을 수도로 삼으면서 ‘새로운 수도’라는 뜻의 ‘신징新京’으로 호칭합니다. 일제는 이 도시를 백만인 규모로 설계하고 마치 런던과 같은 유럽풍 대도시로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신징을 다녀온 유진오는 「신경」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남신경南新京 근처부터 벌써 벌판 이곳저곳에 맘모스 같은 거대한 건축물이 우뚝우뚝 보이더니 이내 웅대한 근대도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건설 도중이라는 느낌은 있었으나 갓 나온 연녹색 버들 사이로 깨끗한 콘크리트의 주택들이 깔리고, 멀리 보이는 큰 건축물들의 동양적인 지붕도 눈에 새로웠다. (유진오, 「신경」, 『춘추』, 1942. 10)
당시 지식인들이 꼭 가보고 싶어한 신징을 찾아간 유진오는 신선한 충격을 느낍니다. 신징은 예전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새로운 도시였습니다. “맘모스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세우면서도 “동양적인 지붕”을 올려놓은 것을 서양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유진오와 함께 신징에 갔던 소설가 이효석은 신징의 중심 도로를 보며 거대하기만 할 뿐 특색이 없다며 “대동대가大同大街의 인상은 서울에도 동경에도 또는 어느 도시에도 쉽사리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어디에서든 있는 이런 종류의 모방을 발견함이란 미를 찾는 사람에겐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이효석, 「새로운 것과 낡은 것」, 『滿洲日新聞』, 1940. 11. 26~27)라고 혹평하기도 했습니다. 이 대동대가는 이후 한때 ‘스탈린 대가’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1940년 1월 말이나 2월에 만주로 떠난 시인 백석이 다녔던 직장도 신징에 있었습니다. 박정희는 같은 해 4월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고, 1942년 3월에 졸업하며, 황제 푸이에게 금시계 은사품을 받습니다.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주요 인물들도 신징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시인 김춘수는 보통학교 사학년 때 수학여행으로 갔던 신징을 “글자 그래도 새로운 서울이다. 도로가 훤하게 넓게 뻗었고 신흥 고층건물이 시가를 메우고”(김춘수, 『꽃과 여우』, 민음사, 1997, 88쪽) 있었다고 묘사했습니다.
백만 명이 살 수 있도록 설계되었던 신징은 런던과 도쿄의 풍경을 재현한 도시로, 도시의 10퍼센트가 녹색 공원지대였습니다. 신징이나 하얼빈의 기차역 표지판은 일본어, 한자, 러시아어(키릴 문자), 영어 등 서너 개의 언어로 써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중심지가 아닌 지역들은 대부분 황량한 광야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윤동주가 이런 도시를 어떻게 보았을까 하는 것이겠지요. 일본의 관동군사령부, 만주중앙은행, 골프장 등이 있었던 국제도시 신징을 윤동주는 가보고 싶어했습니다.
내 차에도 신경행, 북경행, 남경행을 달고 싶다. 세계일주행이라고 달고 싶다. 아니 그보다 진정한 내 고향이 있다면 고향행을 달겠다. 다음 도착하여야 할 시대의 정거장이 있다면 더 좋다.(윤동주, 산문 「종시終始」, 1939년 추정)
윤동주에게 신징은 베이징이나 난징과 비견되는 큰 도시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뒤의 문장입니다. “진정한 내 고향이 있다면”이라고 써 있습니다. 윤동주에게 고향이 없다는 말일까요. 거대 괴뢰국가인 만주땅에서 자랐지만 만주국은 윤동주의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일본 제국도 고향이 될 수 없었습니다. 조국 조선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윤동주의 모든 시에 숨어 있는 귀중한 욕망 한 가지는 상실한 조국을 찾는 고향의식homeland-consciousness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나는 누구인가’를 의심하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기도 했습니다. 그뒤에 더 중요한 것은 “시대의 정거장”이라는 표현입니다. 윤동주는 자신의 내면에만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역사라는 열차가 바로 닿아야 할 “시대의 정거장”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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