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꿈꾸는 나라
1.
나는 1973년에 태어났다. 나는 내가 태어난 해가 가진 역사적 의미를 몰랐다. 유신 독재 시대였고, 긴급조치가 남발되던 때였다. 아버지는 동네 점방에서 막걸리를 드시다 동네 아저씨와 시비가 붙었는데, 박정희를 욕했다는 이유로 유치장에서 이틀인가 고초를 겪고 풀려나신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긴 하지만, 어린 아이였던 내가 독재의 공기를 느낄 리 만무했고, 부모님들 또한 밀양강에서 그물과 주낙으로 생선을 잡아 인근 5일장에 내다 팔면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 하는 고된 나날을 사셨을 뿐이었다.
생태경제학의 선구자 E. F. 슈마허는 4차 중동전쟁이 시작된 1973년 10월 6일을 세계사적 의미를 가지는 날로 지목한다. 그날로부터 이른바 ‘오일쇼크’가 시작되었고, 석유를 기반으로 한 이 산업기술문명의 민낯이 처음으로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던 시점이다. 슈마허는 그날을 산업기술문명이라는 거대한 열기구에 처음으로 작은 구멍이 생긴 날로 기록한다. 1972~1973년은 독립적인 경제학자들이 공히 인정하듯, 세계 자본주의가 1930년대의 공황을 세계대전으로 넘기고 급속한 성장으로 부풀어오르던 정점을 찍은 해이다. 이른바 저성장 탈성장의 거대한 세계사적 흐름이 시작되던 시기에 내가 태어난 것이다.
어쨌든 나는 1973년에 태어났고, 밀양강변 남포리라는 마을에서 12년간 살았다. 또래 아이들보다 가난했고, 채워지지 못한 갈증들 때문에 유년의 기억은 대체로 어둡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암에 걸린 중견 판사 이반 일리치가 고통 속에서 뒤척이며 아무리 돌이켜보아도, 자신의 삶에서 행복한 순간이란 그저 철없이 놀던 유년시절뿐이었던 것처럼, 나에게도 가장 좋았던 시절은 바로 이때 밀양강에서 실컷 놀던 기억뿐이다. 한여름 얼굴만 한 큼직한 물안경을 끼고 강으로 들어갔을 때 펼쳐지던 신천지의 기억은 지금도 그려 놓은 것처럼 선명하다. 은빛 몸들을 번뜩이며 지나가는 은어떼와 모랫바닥에 웅크린 자라들, 모래무지들이 모래 속으로 서둘러 숨어버리고 나면 그 위를 유유히 뱀장어가 떠다니곤 했다. 그 큼직한 어미 자라들은 어머니가 밭을 매고 있는 강변 밭둑길로 느릿느릿 올라와 알을 낳고 다시 강으로 돌아가곤 했다. 피라미라도 낚아보겠다고 대나무로 만든 조악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을 때, 강변 저편으로부터 노을이 천천히 번져오고, 여기저기서 첨벙첨벙 숭어가 뛰었다. 아름다움이라는 것, 아름다움으로 살아 있는 세계의 모습이라는 것, 30년이 넘도록 지워지지 않는 영상이다.
그러나 우리 집은 전두환 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른바 ‘86 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철로변 민가로 낙인찍혀 얼마의 보상금을 받고 밀양 시내로 강제로 이주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낙동강 하구언이 완공되고, 상류의 운문댐과 밀양댐이 물길을 막고, 수없는 지천 공사로 제 모습을 잃어버린 강은 오늘날 4대강 사업에 이르러 완전히 망가져 버리고 말았다.
2.
나는 지금 불행한 의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내가 유년 시절 누린 자연의 은총을 내 자식에게는 전혀 베풀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죄의식, 그리고 나와 내 자식의 미래가, 그들이 살아갈 세상의 미래가 밝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 속에서 산다.
나의 출생과 성장에도 지울 수 없는 선을 그어 놓은 이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내 삶은 여전히 끼어 있다. 해방되지 못한 나라가 겪은 예속과 한 줌 가진 자들의 독점과 전횡, 그리고 불행한 미래를 예고하는 이 시대의 여러 암울한 지표 속에 나도 내 자식의 삶도 끼어 있다.
나는 질주하는 자동차가 싫고 무섭다. 도시의 번쩍이는 밤풍경이 싫다. 세상은 24시간 내내 끓어오르는 대낮 같다. 이 가속의 질주를 잊을 수 있는 길은 더한 가속의 질주밖에 없다는 듯이 나라는 욕망의 과잉, 다툼의 과잉, 그저 과잉으로 넘쳐 오른다. 길을 가다가 ‘어이’ 하고 부르면 앞서 가던 열의 일곱은 성난 얼굴로 뒤돌아보는, 적의와 긴장의 나날이다. 소란스러움, 번잡함, 인간성의 한 줌까지 다 쥐어짜야 겨우 밥을 버는, 황소개구리처럼 우악스러운 삶이다. 그리고 2011년 후쿠시마 사태를 겪었다. 후쿠시마 사태 이후 몇 달간 나는 종종 가위눌리곤 했다. 우리의 삶이 팽팽한 습자지 위를 걷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언제 부욱하고 찢어질지 모를, 몹시도 위험한 세계에서의 나날.
“1986년 4월 26일, 하룻밤 사이에 우리는 새로운 역사적 공간으로 이동했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피해자들을 인터뷰한 기념비적 저작 『체르노빌의 목소리』의 저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예술이 지금껏 지구의 종말을 그려냈지만, 우리의 삶보다는 기이하지 않다”고. 그 책에 등장하는 한 가지 이야기만 들려주고 싶다. 체르노빌 사고 직후 원자로의 불을 끄기 위해 동원된 소방대원의 아내가 임신한 몸으로 의료진들의 만류와 제지에도 굴하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남편의 곁을 지켰다. 아내는 남편을 너무나 사랑했고, 사랑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고, 자신과 임신한 아기에게 어떤 피해가 미칠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남편은 처절하게 죽어갔다.
하루에 20번, 30번씩 대소변을 받았다. 피와 점액이 뒤섞여 나왔다. 손발의 피부가 벗겨지기 시작했다. 온몸이 물집으로 뒤덮였다. 남편이 머리를 움직이면 베개에 머리카락이 한 줌씩 떨어지곤 했다. (…) 나는 천 조각을 매일 갈았지만, 저녁 때면 피로 흠뻑 젖었다. (…) 폐와 간의 조각이 목구멍으로 타고 올라와 숨을 못 쉬었다. 손에 붕대를 감아 입 속에 있는 것을 다 긁어냈다. 말로 할 수가 없다! 글로도 남길 수 없다! 견뎌낼 수도……
그리고 남편은 죽었다. 발이 부어서 신발을 신길 수 없었던 까닭에 아내의 꿈에 남편은 계속 맨발로 나타난다. 피와 상처로 뒤덮인 몸, 방사선 수치가 너무 높아 시신을 폴리에틸렌 비닐로 싸고, 밀폐된 아연관에 넣은 뒤, 1.5미터 두께의 콘크리트벽을 싸서 묻었다. 유사 이래 없었던, 기괴한 무덤이었다. 남편이 죽어가는 동안 그에게 병원의 누군가가 말한 바 있다. “잊지 마세요.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은 남편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닌 전염도가 높은 방사성 물질일 뿐”이라고. 사랑하는 존재를 방사능 덩어리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 인간의 사랑이 맞닥뜨린 유례없는 한 양상이다.
그리고, 아기가 태어났다. 간이 딱딱했고, 심장이 정상이 아니었고, 결국 네 시간 뒤에 죽었다. 그런데, 아내는 살아 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아내의 몸이 받아들인 방사능을 태중의 아기가 다 빨아들인 것이다.
딸이 나를, 살렸다. 그렇게 작은 아이가 딸이 나를 지켜줬다. 사랑으로, 사랑으로 죽이는 게 가능한가?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삶에 대한 완벽한 은유가 되었다. 뱃속의 아기가 어머니의 방사능을 받아들여 어머니의 죽음을 대속하였듯이, 오늘날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여전히 이 세대의 안위를 위하여 다음 세대에 모든 고통과 책임을 떠넘기는 체제가 아닌가. 대한민국, 이 나라는 핵발전소 한 기에서 일어나는 사고만으로도 순식간에 지옥이 되어 버릴 가능성을 깔고 앉은 채 일상을 이어가는 실로 위태롭기 짝이 없는 체제가 아닌가. 후쿠시마 사태를 겪으며, 뒤늦게 체르노빌과 방사능의 공포에 대해 공부하면서 나는 ‘진보’에 대해 자주 생각하곤 했다.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 “100년 후면 사람이 아름다워질 것”이라던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의 믿음 같은 것이 지금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 되어 버렸는지를 생각했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 핵발전소 25기를 밤낮없이 가동하는 이 나라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지금 우리의 삶은 또 얼마나 아슬아슬한 것일까.
3.
내가 살고 싶은 나라는 마을 공화국이다. 풍요와 안락의 광태가 사그라든 뒤에야 찾아올지도 모를 고르게 가난한 사회다. 관건은 ‘민주주의’이리라. 민주주의는 복잡하고, 더디며, 소란스러운 것이며, 주권은 누군가에게 양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직접 행사해야만 주권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개인의 책임성 범위 내, 곧 마을 수준에서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2008년 늦은 봄부터 여름까지 내가 사는 밀양에서 두 달 넘게 지속된 촛불집회는 내 삶을 많이 바꾸어 놓았다. 밀양이라는 극보수의 도시에서 익명의 존재로 살아가던 시민들이 40차례가 넘는 정기적인 집회에서 만났고, 서로 친구가 되었다. 몇 년 사이 우리는 거의 한 식구처럼 어울리게 되었고, 여러 모색과 공부 끝에 생협과 공부방을 시작하게 되었고, 기금을 모아 2층짜리 번듯한 공간을 열어 우리들의 아지트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벌써 7년이 넘도록 지역의 일들을 함께 했고, 밀양송전탑 싸움을 5년째 함께 돕고 있다.
이 작은 노력들이 다가올 재난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결국 우리는 ‘무력감’을 넘어서기 위해, 나 자신이 먼저 좀 숨통을 틔우고 ‘살기’ 위해 이런 일들을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와 내 벗들은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4.
여전히 나는 꿈을 꾼다. 오래된 미래처럼 우리에게 다가올 어떤 그림을, 고르게 가난한 나라, 그 가난이 가져다줄 삶의 평화, 그 평화의 정경을. 불과 80년 전 이 땅에 구체적으로 존재했고, 백석이라는 천재의 손길에 의해 그려진 삶의 형상이 아직 우리에게는 있지 않은가.
졸레졸레 도야지 새끼들이 간다
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복 따사로운 거리다
잿더미에 까치 오르고 아이 오르고 아지랑이 오르고
해바라기 하기 좋을 볏곡간 마당에
볏집같이 누우란 사람들이 둘러서서
어느 눈 오신 날 눈을 츠고 생긴 듯한 말다툼 소리도 누우라니
소는 기르매 지고 조은다
아 모도들 따사로히 가난하니
─ 백석, 『삼천포─남행시초4』
(2013)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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