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分子’는 수학의 분자일까, 과학의 분자일까?
우리가 아는 ‘분자’라는 말은 수학에 나오는 ‘분모/분자’의 분자, 화학에서 나오는 ‘원자/분자’의 분자, 특정 부류의 사람을 가리킬 때 쓰는 ‘불만분자’의 분자 따위의 세 가지가 있다. 이 세 가지 ‘분자’를 한글로만 적어놓으니 정확한 뜻을 알 수 없다는 게 한자 교육 강화론자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그럴듯하다. 소리가 같고 뜻은 다르다고 해서 흔히 ‘동음이의어’라고 부르는 낱말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글자 모양이 같은 ‘동형어’야말로 한자 맹신자들이 한자 공부의 중요함이나 한자 표기의 필요성을 내세울 때 가장 자주 들먹이는 소재다.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의 진태하 회장이라는 분은 어느 자리에 나오든지 이런 말을 한다.
“국어사전에 ‘사기’라는 한자어가 27개나 올라 있는데, 한글로 그냥 ‘사기’라고만 적어 놓으면 그게 사람 속이는 사기인지 의욕이 충만한 기세를 뜻하는 사기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한자어는 반드시 한자로 써야 한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산부인과 의사와 안중근 의사의 ‘의사’를 구별하지 못하니 한자 가르치지 않는 세상이 말세라고 혀를 찬다. “5연패를 한 선수가 은퇴한다.”고 할 때 그 ‘연패’가 연이어 이겼다는 뜻인지, 연이어 졌다는 뜻인지 한글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하고, ‘영화 감상을 한 뒤에 감상문을 쓰되, 너무 감상적으로 쓰지 말라’는 문장에서 ‘감상’은 모두 한자가 다르고 뜻도 다르니 한자를 모르거나 한글로만 적으면 안 된다고 난리를 친다. 2015년 8월에 기독교방송 라디오 전화 토론에서 나에 앞서 전화로 연결된 한자 교육 강화론자는 “최고의 고려청자라고 할 때 그게 가장 오래되었다는 뜻인지 가장 좋다는 뜻인지 한글만으로는 구별할 수 없다.”며 한자병기를 주장했다. 이 방송을 들었는지, 교육부 공청회에 나온 명지고 교감도 토론에서 같은 주장을 반복했다.
동음이의어, 아니 동형어는 한자 맹신자의 단골 소재
별생각 없이 언뜻 들었을 때는 그럴듯한 이 주장들. 과연 글자가 같거나 소리가 같은 낱말은 한자를 병기하지 않는다면 뜻을 구별할 수 없는 것일까? 나는 세 가지 각도에서 순서대로 반론하고자 한다.
먼저, 이들의 어리석음부터 지적하겠다. 라디오 방송에서도 그렇고 공청회에서도 그렇고 그들이 입으로 말한 “최고의 고려청자”는 그 고려청자가 가장 오래된 것인지 가장 좋은 것인지 누구도 구별할 수 없다. 단지 ‘한글만으로 썼기 때문에’ 구별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입말로 해도 가려낼 수 없다. 그럼 그 말을 한 당사자는 상대가 알아챌 수 없는 모호한 말을 내뱉은 것이니 그 말이 헷갈리지 않도록 그 말에다 ‘한자를 병기’해서 말했어야 하지 않을까? 난 이럴 때 “한자로 말해 보시오.”라고 엉터리 주문을 넣지만, 표기수단인 한자로 말을 할 신통력은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말에다 글자를 붙일 수 없으니 그들이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은 글자를 써서 ‘最高’나 ‘最古’라고 보여주면서 말하거나 아니면 입말로 “높을 고가 아니고 옛 고의 그 최고”라고 말하거나 둘 중의 하나다. 그렇게 보완하지 않는다면 말로 했을 때 원천적으로 위의 말을 분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말로도 분간할 수 없는 걸 한글로 써놓으면 당연히 분간할 수 없지 않겠는가? 즉, 동형어는 글에서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말에서도 문제가 된다는 이야기다. 글이야 한자로 적어 분간할 수 있다고 하겠지만 말에서는 어찌할 노릇인가? 평생 말은 안 하고 글만 써서 의사소통할 참인가? 전화로 그 주장을 한 당사자조차 자기가 무슨 고려청자를 뜻했는지 말로는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셈이다. 그러니 우습지 않은가, 자기도 모르는 걸 남에게 알아맞히라고 하니. 그렇다면 해결책은 없을까? 있다. 입말에서 해결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글에서도 해결하면 된다. 우린 이럴 때 보통 “가장 오래된 고려청자”라고 더 명확한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어휘력이 높다고 친다. 적재적소에 낱말을 사용하는 능력이 어휘력의 방대함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동형어가 있을 때는 글에서도 좀 더 분명한 말로 바꾸어 표현하는 사람이 소통력 높은 사람이다.
한자로 말할 수는 없으니 말에선 동형어를 구별 못하나?
둘째, 동형어는 문장의 앞뒤 맥락을 보아가며 충분히 구별할 수 있다. “최고의 고려청자”는 그 자체로 완결된 문장이 아니므로 맥락을 알 수 없어서 그 ‘최고’가 무슨 뜻인지 파악할 수 없을 뿐, 그 앞뒤에 있는 말을 안다면 당연히 구별할 수 있다. 입말이건 글로 된 문장이건 마찬가지다. 동형어는 한자어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토박이말과 영어에도 있다. 예를 들어 “흔들리는 배 안에서 급하게 배를 먹었더니 갑자기 배가 아프다.”는 글을 읽었을 때 토박이말인 세 가지 ‘배’의 뜻을 구별할 수 없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토박이말은 한자로 표시할 수도 없으니 이걸 맥락 말고 달리 무엇으로 구별하겠는가? 영어에서도 BAND(무리, 끈), BANK(둑, 은행), BEAR(참다, 곰), BARK(짖다, 나무껍질), BAT(방망이, 박쥐), LIE(거짓말, 놓다)와 같은 동형어가 있지만 이 역시 문장에서 맥락으로 구별한다.
한자 맹신자들이 단골로 들먹이는 ‘사기’라는 한자어 문제를 이런 각도에서 짚어보자. 아래 표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27가지의 ‘사기’라는 한자어 가운데 굽힐 줄 모르는 기세의 01, 사마천이 지은 역사책 04, 그릇의 종류인 11, 나쁜 기운을 뜻하는 14, 회사의 깃발인 19, 남을 속이는 25 따위의 여섯 가지 사기만이 우리가 비교적 자주 사용하는 말이고, 나머지 21가지는 평생 쓸까 말까 한 말이다. 국어사전에는 정말로 사용하지 않는 한자어가 무수히 올라 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바로 사람 속이는 25번과 의욕이 충만하여 굽힐 줄 모르는 기세를 뜻하는 01번의 사기이다.
진태하처럼 아무런 다른 말 않고 ‘사기’라고 단 한 마디만 한글로 써놓거나 말로 했을 때 이게 27가지의 사기 가운데 어떤 사기인지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게 낱말 하나만 툭 던지면서 말하거나 글 쓰는 경우가 어디 코미디에 나오는 족집게 도사 장면 말고 또 있을까? 낱말만 덩그러니 적힌 길거리 표지판조차 그게 세워진 상황 맥락이 있다.
그러니, 동형어에 관한 한자 맹신자들의 사고는 우리 주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지극히 현실과 사회성을 빼버린 망상일 뿐이다. 우리는 남 앞에서 그렇게 ‘사기’라는 단 한 마디만 내뱉고 침묵하지는 않는다. 사람이라면 대개 이런 식으로 말한다.
“사장님이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모든 직원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어요.”
나는 이 문장을 말로 듣건 글로 읽건 앞의 ‘사기’와 뒤의 ‘사기’를 혼동할 사람은 없다고 100% 확신한다. 이걸 굳이 사기詐欺, 사기士氣라고 한자를 병기해야 구별할 수 있다는 말은 억지 아니면 그야말로 ‘사기’다. 물론 낱말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한 어린아이가 아직 속아서 당했다는 ‘사기’ 말고 다른 ‘사기’를 알지 못한다면 예외로 칠 수 있겠다. 산부인과 의사와 안중근 의사의 ‘의사’를 헷갈리는 아이라면 그 역시 아직 안중근 의사의 ‘의사’라는 말을 배우거나 들어보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그 차이를 말로 들어 알고 난 다음부터는 혼동할 까닭이 없다. ‘연패’가 이긴 건지 진 건지는 그 앞뒤 중계방송에서 다 헤아릴 수 있다. 이렇듯, 한 번 알고 나면 그다음부터 동형어나 동음어는 그저 개그의 소재일 뿐이다. 마치 음악에서 빠르기를 나타내는 기구인 ‘메트로놈’을 말하면, 서울메트로에 다니는 남자가 ‘메트로놈’이니 여자는 ‘메트로년’이라고 업어 치는 따위의 ‘수준 높은’ 개그 말이다.
동형어는 문장의 맥락 속에서 다 구별할 수 있어
마지막으로, 족집게 신통력을 지닌 한자 맹신자들에게 물어보겠다. 내가 입으로도 말하고 글자로도 단 한 마디만 쓰겠다. “분자”라고. 자, 이 분자는 내가 앞서 예로 든 수학의 분자, 과학의 분자, 사람의 분자 가운데 어느 것인가? 맥락 없이 이걸 집어내는 사람은 도사가 분명하다. 그런데 한자 맹신자들은 맥락 없이도 한자만 병기되어 있다면 구별할 수 있다고 하니, 내가 한자를 병기해 주겠다. 다행히도 세 번씩이나 쓸 필요 없이 셋은 모두 한자로 ‘分子’ 라고 똑같이 적는다. 자, 여기서부터 수학의 분자分子와 과학의 분자分子와 어떤 부류의 사람인 분자分子를 구별할 방법을 한자 맹신자들에게 묻겠다. 어떻게 이를 가려낼 수 있는가? 그런데 우리 애들은 그런 고민 없이도 수학 시간에, 과학 시간에 아무 혼란 없이 잘 쓰고 있으니, 이럴 때 우리는 한자 맹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사서 고생하시네요.”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직장에서 사람을 관리하는 일인 ‘인사’와 누군가와 만나거나 헤어질 때 차리는 예의인 ‘인사’를 한글로만 써놓으면 한자 맹신자들은 두 말을 구별할 수 없다고 푸념을 늘어놓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인사과장은 사장의 인사정책에는 의견이 달랐지만 출근하는 사장을 보자마자 달려가 인사를 했다.”는 문장에서 ‘인사’라는 말을 한글로만 적으면 구별할 수 없으니 한자로 적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이 문장의 앞뒤에서 나오는 인사 역시 한자로는 ‘人事’라고 같게 쓴다. 이처럼 한자로 써놓더라도 문맥으로 이를 구별할 터이니, 한글로 써놓은 동형어를 문맥으로 가려낼 수 없다고 계속 떼를 쓰겠는가? 한자로 동형어를 많이 안다고 뽐내지 말고 말 속에서 문맥을 파악하는 기초 훈련부터 다시 쌓으시라. 아니, 동형어 대신 더 명확한 말을 부려 쓰는 능력을 먼저 키우시라.
내가 이런 식으로 공개 토론에서 두어 번 논박하고 나니까 이제 국한문혼용론자나 한자 교육 강화론자들이 “한자어에는 동음어(사실은 동형어)가 많으니 반드시 한자를 병기해야 한다”는 엉터리 주장을 더 이상 들이대지 않는다. 그나마 그들도 지독한 사오정은 아닌 모양이다.
그러나 이제야 고백하건대, 대개는 가능하지만 문장의 맥락만으로 모든 동형어를 다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앞장에서 나는 법무부에서 적은 민법의 개정 이유를 옮겼는데, 거기에 “위 개정안은 사법 체계의 기본법인 민법을 시대에 맞게 한글화하고”라는 문장이 나온다. 여기서 ‘사법체계’라는 말이 공법에 반대되는 개인 사이의 재산이나 신분 따위에 관한 법률관계를 규정한 법인 ‘私法’을 뜻하는지, 국가의 삼권에 해당하는 기본적인 작용으로서 법의 적용을 뜻하는 ‘司法’인지 소리만 듣고는 구별하기 어려웠다. 특히 이 말이 체계라는 추상적인 한자어와 결합하여 양쪽 모두에 통용될 수 있는 ‘사법체계’라는 말로 쓰였기 때문이다.
동형어는 한자의 유용성이 아니라 폐해 보여주는 사례
이럴 경우에는 혼란이 생기지 않도록 앞에 아주 짧은 설명을 붙이든가, 아니면 한자를 병기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한자의 유용성을 보여주는 실례가 아니라 한자의 폐해를 보여주는 예임을 알아야 한다. 일본에서는 훈독이나 음독식으로 한자를 읽는 두 가지 방법이 있어서 우리보다 입말에서 생기는 혼란이 적고, 한자로 적으니 글에서는 당연히 혼란이 적다. 우리 한자의 음은 480여 개에 불과한데, 우리는 과거에 일본을 따라 국한문혼용으로 표기하면서 일본에서 만든 한자어를 수없이 받아들였으니, 거기에 한글 동형어이자 동음어인 한자어 낱말이 많아진 것이다. 문장의 맥락으로 거의 다 구별할 수 있지만, 한글 전용 시대에 동형어는 크건 작건 불편을 준다.
대안은 무엇일까? 동형어에서 사용 빈도가 가장 높은 낱말은 살리고 나머지는 새말로 바꾸는 길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동형어 가운데 서너 가지 말의 생명력이나 중요도가 비슷하다면 합의를 끌어내기가 어렵다. 그래서 다시 동형어 문제는 한국어에서 역설적으로 하나의 축복이기도 하다. 압축번역어인 한자어에 무조건 의지하지 말고 좀 더 쉽고 섬세한 말로 자기 뜻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과제를 우리 국민에게 안겨주었으니 말이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