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기아의 1840년대
로치데일의 선구자들이 협동조합 매장을 시작한 시대는 역사가에게 ‘기아의 40년대’로 알려져 있다. 이는 감자 흉작으로 파멸적인 기근이 아일랜드를 휩쓴 데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영국 노동 계급이 겪은 고난을 보더라도 그렇게 부르기 합당한 연대였다. 섬유 산업에서 새로운 발명이 이루어지고 공업과 운수업에서 증기력을 응용해 생산력이 대폭 향상되었는데, 만일 그것이 적절히 사용되었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부와 번영을 안겨다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산력의 향상은 지금 시점에서 당시를 돌아보더라도 심한 분노를 불러일으킬 만큼 상상을 초월하는 고난을 가져왔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하는 가혹한 시대를 본다. 당대의 정통파 경제학의 지지를 받으면서 혹은 ‘마땅히 도움을 받아야 할 가난한 자들’이 저 세상의 행복을 기도하면 현세의 괴로움은 충분히 보상 받을 것이라고 설교하는 종교의 지지를 받아, 고용주들은 착취하면 할수록 공덕을 베푸는 셈이 되었다.
한편 이러한 착취로부터 벗어나려는 격렬한 투쟁의 사례들도 볼 수 있다. 대규모 파업, 인민헌장을 위한 정치적 십자군 운동, 오언주의자들의 협동조합 공동체나 차티스트의 정착지를 이 땅 위에 건설하는 운동, 종교적 열광에 사로잡힌 모험들 그리고 절망의 끝자락에서 술에 몸을 맡기는 일까지. 물론 모든 고용주가 착취 기계는 아니었다. 공장법 제정 요구 투쟁을 지지하는 용감한 인물도 몇 있었고, 1834년 개정 구빈법의 비 인도성에 저항하는 하층민의 손을 잡아 준 사람도 소수지만 있었다. 빈민층이라고 해서 모두 노동조합주의나 차티스트 혹은 사회주의를 따르지는 않았고, 비 국교파 교회의 설교나 술에 빠진 것만도 아니었다. 시장에서 수요가 꽤 많은 소수의 숙련공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이익을 얻고 있었다. 또한 금욕 정신으로 혹은 운명의 가혹한 타격을 참고 견디면서 허탈한 상태로 조용히 지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노동 계급 대부분은 1830~1840년대 분쟁을 겪으면서 유례없는 저항의 기운으로 고무되었다. 이는 더 이상 나빠질 것이 없다는 심정에서 나오는 절망적인 반항 ─이러한 반항은 새로 발견한 자연에 대한 지배력의 성과를 만인이 향유하도록 선용하여 서로가 우애를 바탕으로 행복하게 사는 이상적인 사회 질서를 추구하는 천년 왕국의 상상으로 모습을 바꾼 것도 있다─ 이었다. 협동조합 운동의 역사도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그 발단에는 이러한 천년 왕국의 열망이 있었다. 로치데일의 선구자들도 단지 거래를 위한 매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협동조합 유토피아를 만들려고 했다.
19세기 초, 분명 보다 많은 부를 창출했을 사람의 힘이 왜 새로운 산업 질서의 노예들과 농업 노동자들에게 복지가 아닌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비참함을 안겨 주었을까? 이전보다 훨씬 많은 상품이 새로운 기계의 힘으로 생산되고, 이 상품을 소비자에게 운반하는 수단도 급속히 증가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러한 생산 확대로부터 이익을 얻고, 또 누군가는 이 상품을 소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생활이 눈에 띄게 나빠졌지만, 역으로 누군가의 생활 수준은 물질적으로나 다른 의미로나 나아졌을 터였다.
각지의 공업 지대에서 새로운 생산 수단의 주인공이 된 사람들은 크고 작은 차이는 있었지만 재산을 축적했다. 전문직 종사자와 중산 계급의 숫자는 급속히 늘어났고, 숙련공들의 생활도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었다. 팽창하는 도시 지구나 탄광 지대에 넓은 땅을 가진 지주들은 토지를 세놓는 대신, 즉 ‘소비’를 ‘인내’함으로써 충분한 보수를 거둬들였다. 생업의 기반이 흔들리는 사람에게는 온전한 축복일 수 없었지만, 값싼 면제품이 전 세계 소비자에게 쏟아졌고 누군가는 이렇게 늘어난 상품을 소비했다. 하지만 상품을 생산한 노동자는 수혜자가 아니었다.
다시 묻건대, 왜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생필품의 구매력으로 평가했을 때, 공장 노동자들의 높아진 생산성의 성과를 공유하기 위해 임금이 오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명백한 대답은, 공장 노동자는 넘쳐 났고 고용주 간의 경쟁은 치열했다는 것이다. 노동자가 넘쳐 난 이유 중 하나는 전체 인구가 미증유의 비율로 늘어났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농업에 종사하던 이들이 도시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합류해 수많은 ‘과잉’ 노동자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더욱이 새로 생기는 공장에서는 아동 노동을 많이 고용했기 때문에 노동자 수는 더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급속한 인구 증가 흐름에서 아동은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풍부하게 공급되는 아동 노동에 대한 낮은 임금은, 숙련공은 별개라 하더라도, 일반 성인 노동자의 임금 인하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임금을 끌어내린 또 다른 요인은 고용주 사이의 격렬한 경쟁이었다. 당시에는 한 공장 건물 안에서 한두 개의 작업실과 동력을 빌려 소규모 방적업이나 직물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개업한 수많은 소기업은 주문을 받기 위해 살인적인 경쟁을 했다. 전체 직물 시장이 아무리 크더라도 공급을 위해서는 각축을 벌여야만 했다. 수요가 점점 늘어나면서 너도나도 앞다퉈 기업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영세 기업은 대기업보다 평균적으로 효율성이 크게 떨어졌고 인건비를 낮은 수준으로 억제하지 않으면 경쟁이 안 되었다. 넘쳐나는 ‘일손’ 덕분에 영세 기업은 기아 임금으로 고용을 유지했고 낮은 가격으로 상인의 주문을 받기 위한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결국 도산이나 파산이 잇따랐고 자본가의 지위를 열망했으나 실패한 사람들은 노동 계급의 위치로 돌아갔다. 산업혁명을 추진했던 자본가 모두가 성공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대다수는 사업에 실패했고, 살아남은 자도 경쟁이 뿜어내는 열기에 그을린 채 부자가 되려고 기를 쓰면서 인간성을 거의 잃고 말았다.
초기 자본주의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이었으며 맹목적이었다. 계획도 뚜렷하게 없었다. 누구도 이웃이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 다시 말하면, 어느 누구도 질서 있는 방법으로 시장의 요구에 맞춰 자신의 계획을 조정할 자리에 있지 않았다. 시장의 상황을 파악하는 사람은 ─아마도 상인들을 빼고는─ 거의 없었다. 상인들에게는 고용주 사이의 경쟁을 지속시켜야 이익이 되었다. 그래야 물건을 싸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기계력 생산의 새로운 세계는 기이한 경제 변동의 세계가 되었다. 단지 몇 년 동안 부침을 거듭하는 경제 변동의 세계가 아니라, 공급 과잉이 되었다가 금세 공급 부족에 빠지는 것처럼 급격한 호·불황의 변화가 일어나는 세계였다. 새로 문을 연 공장의 생산물은 주로 곡물 수확량에 의존하는 해외로 수출했는데, 수확의 변동이 경제를 불안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상인이나 해외 시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기초가 튼튼한 대기업은 비교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들 기업 노동자들은 다른 기업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았다. 소수이긴 하지만 공장법 제정을 요구하며 투쟁하는 고용주가 나오기도 했고, 노동자와의 임금 교섭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들 기업이 자신의 기반이 약해질 위험이 적기 때문에 보다 작은 기업에게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노동 시간을 줄이도록 하는 법률로 이익을 얻으려 한다고 빈정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에는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성실한 인간성이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경쟁적인 투쟁의 중압으로 무너질 걱정이 없는 고용주는 만일 동업자도 같은 행동을 취한다면 그들이 고용한 노동자들의 참상에 눈을 뜨고 그들의 대우를 개선하려 했을 것이다.
당시의 경쟁 상태는 임금이나 노동 조건 개선에 강하게 역행하는 또 다른 효과를 가져왔다. 생산 기술이 급속하게 진보했기 때문에 공장 경영을 단순히 현상 유지만으로는 버틸 수 없었다. 경쟁 가격으로 생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계를 설치하고 저 비용으로 생산의 적정 규모를 유지하도록 생산량을 늘림으로써 경영 효율을 개선해야만 했다. 이 사실은, 고용주는 통상 현재의 이윤 외에는 여분의 투자 자본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높은 비율로 수입에 재투자하는 것이 필요함을 의미했다. 실제로 많은 고용주들은 시니어가 그들을 ‘금욕’의 사람들이라고 부른 것처럼, 단 1페니라도 절약한 돈을 사업 규모 확대나 설비를 늘 최신으로 유지하기 위해 재투자하고 이윤이 늘어나더라도 자신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일은 삼갔다. 자본 축적을 위해 소비조차 자제하는 고용주가 임금 인상 요구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리 없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인상된 금액만큼 생산력 확대를 위한 사업 자금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용주들은 스스로 절제했지만, 그들의 절제를 사회적 지위가 훨씬 낮은 사람들에게도 강요했고 노동자에게 검약 정신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했다. 즉 임금을 인상하더라도 노동자는 그 돈을 술과 도박, 즉 가난을 치유하는 마약에 쓸 뿐이어서 영국의 상업 발전에는 해롭다는 것이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