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방귀가 있었다
프랑수아 라블레François Rabelais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16세기 프랑스 르네상스 문학을 대표하는 사상가 겸 수도사 겸 의사. 프란츠 카프카, 조지 오웰과 더불어 자신의 이름을 딴 단어를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라블레시언이라는 그 단어의 뜻은 바로 ‘천하고 무식한 유머’. 과연 그의 시대로부터 거의 5세기가 흘렀지만 아직까지 누구도 그만큼 ‘더럽게 웃긴’ 소설을 쓰지는 못했다.
제1장
라블레는 어떻게 방귀를 뀌었는가
또는 그의 엉덩이가 품고 있던 놀라운 것들에 관해서
독자에게이 책을 읽는 친애하는 독자들이여,모든 정념을 떨쳐버리시오.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성내지 마시기를.악하거나 추한 것은 없다 해도,웃음에 관한 것 외에 완벽함은 거의 찾기 힘들 테지만,당신들 마음을 상하게 하고 괴롭히는 큰 슬픔을 보면,다른 이야깃거리가 내 마음을 끌 수 없음을여러분은 이해할 것이오.눈물보다는 웃음에 관하여 쓰는 법이 나은 법이라오.웃음이 인간의 본성일지니.
이렇게 책을 시작하는 사람은 프랑스의 수도사 겸 의사 겸 인문주의자 프랑수아 라블레다. 1483년(혹은 1494년)에 태어나 1553년 세상을 떠난(것으로 추정되는) 그는 몽테뉴와 함께 16세기 프랑스 르네상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히며 영국의 셰익스피어, 스페인의 세르반테스에 비견된다. 한마디로 훌륭한 사람이다. 대다수의 평범한 우리가 훌륭한 분들이라면 으레 그래야 한다고 믿는 것처럼 지혜롭고 겸손하게 보일뿐더러 “당신들 마음을 상하게 하고 괴롭히는 큰 슬픔” 운운하는 걸 보면 늘 고단한 우리의 일상을 위로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왜 자꾸 하품이 나는 거지? 이래서야 우리 시대의 대단하신 인문학-힐링-멘토-선생님들하고 다를 게 없다. 하지만 그건 라블레가 아니다. 내가 아는 라블레는 다정한 인사를 건네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얼굴색도 변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다.
고명한 술꾼, 그리고 고귀한 매독 환자 여러분, (내 글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당신들에게 바치는 것이다) (…) 사랑하는 그대들이여, 즐겨라. 그리고 허리에 좋게 몸을 편안히 하고 즐겁게 남은 부분을 읽도록 하라. 그리고 너희들, 당나귀 좆 같은 놈들아. 다리에 종양이 생겨 절름발이나 되어버려라!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 나를 위하여 건배하는 것을 잊지 말라. 나도 즉석에서 축배를 들어 답례하겠다.
영어에는 작가의 이름을 딴 단어들이 있다. 카프카에스크Kafkaesque와 오웰리언Orwellian이 대표적이다. 어느 날 아침 불안한 잠에서 깨어나 벌레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하는 것처럼(「변신」) 부조리하고 암울한 상황=카프카에스크. ‘빅 브라더’라고 불리는 거대 권력이 시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검열하고 통제하는 것처럼(『1984』) 숨 막히는 전체주의적인 사회=오웰리언. 그만큼 널리 쓰이지는 않지만 라블레에게서 온 라블레시언Rabelaisian이라는 단어도 있다. 영한사전에는 “라블레풍의(섹스와 인체를 풍자적으로 다루는)”라는 다소 모호한 뜻으로 올라와 있는 그 단어를 아서 골드워그는 이렇게 정의한다. “천하고 무식한 유머. 사내아이들이 방귀 소리를 흉내 내며 놀 때 ‘라블레시언’이라고 한다.”
뿌우우우우우웅 뿌르륵푸르륵 뿡!(=라블레시언)
도널드 서순은 그의 방대하고 아름다운 다섯 권짜리 저작에서 “라블레는 너무 상스럽고 분변학적”이라서 프랑스의 국민 시인이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과연 「작가 서문」에서부터 상스럽고 분변학적인 라블레풍의 문장들이 난무한다. “빌어먹을!” “똥이나 처먹어라!” “당나귀 좆 같은 놈들아!” “걸레처럼 더러운 냄새가 난다!” 등등. 서순은 많은 샹송 가수들이 그에게 외설적인 말놀이를 빚지고 있다고 지적하는데, ‘더럽고 추한 늙은이’ 세르주 갱스부르와 열혈 개고기 반대 운동가이자 60년대 최고의 섹스 심벌 브리지트 바르도가 1967년 함께 녹음한 〈Je t’aime… moi non plus(당신을 사랑해요…… 나도 아니야)〉에서도 라블레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오, 그래요 내 사랑!(브리지트 바르도)나도 아니야(세르주 갱스부르)오, 내 사랑……(브리지트 바르도)우유부단한 파도처럼 나는 가고, 가고, 그리고 돌아오지. 당신의 허리 사이로. 나는 가고 다시 돌아와. 당신의 허리 사이로. 그리고 나는 참아내지(세르주 갱스부르)당신이 파도라면 나는 벌거벗은 섬이에요. 당신은 가고, 가고, 그리고 돌아오죠. 내 허리 사이로. 당신은 가고 다시 돌아와요. 내 허리 사이로. 그리고 나는 당신을 붙잡아요(브리지트 바르도)
가사만 보면 언제나 찾아오는 부두의 이별이 아쉬워 두 손을 꼭 잡은 프랑스판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인가 싶지만 실은 섹스를 하고 있는 연인의 대화다. 그러니 갱스부르가 참고 있는 게 사정이라는 걸 굳이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농! 맹트낭, 비앙!(안 돼요! 지금, 와요!)(브리지트 바르도)
갱스부르는 바르도에게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 노래”라고 설득해 노래를 부르게 했다는데, 바르도는 몰라도 그녀의 남편이었던 독일의 백만장자 군터 자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당시 녹음을 맡았던 엔지니어는 두 사람의 노래를 “진지한 애무”라고 묘사했고, 일요 신문인 〈프랑스디멍쉬France-Dimanche〉는 “신음 소리와 한숨 소리 그리고 바르도의 기쁨의 울부짖음으로 채워진 4분 35초”라고 평했으며, 나와 함께 노래를 들은 아내는 느끼하다고 말했다. 나 역시 아내의 말에 동의한다. 얼핏 보면(그리고 아무리 봐도) 별 상관 없는 이야기를 이렇게 늘어놓는 이유는 내가 얼마 전 『유럽문화사』 전권을 구입했기 때문이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다. 적어도 지금 나는 그렇다.
라블레의 이력에 따라붙는 위마니슴humanisme에 대해서도 한번 말해보자. 영어로는 휴머니즘humanism, 한국어로는 인문주의나 인본주의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다. 문학 사전을 펼치면 “현재의 이론적 논의에서 휴머니즘은 모든 인간 행동과 결정의 바탕에 어떤 보편적 인간 본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보통 가리킨다. 그렇지만 휴머니즘이라는 용어는 길고 복잡한 역사를 갖고 있다. 현대 휴머니즘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에 기원을 두고 있다…… 라거나 ”특히 중세의 기독교 세계관(스콜라철학)에 의해 억압되었던 인간의 욕망이 그리스신화를 통해 휴머니즘, 즉 인문주의 혹은 인본주의의 기치 아래 문학예술적으로 형상화되기 시작한다…… 라는 식의 길고 복잡한 설명을 찾을 수 있는데, 미안하다, 옮겨 적는 것만으로도 잠이 쏟아져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해야겠다. 오늘 우리에게는 미슐레가 만들어내고 부르크하르트가 널리 퍼뜨린 르네상스 인문주의에 대한 간단한 정의면 충분하다. 세계와 인간의 발견.
라블레가 발견한 것은 똥이다. 은유로서의 똥이 아니다. 상징 같은 것도 아니다. 영어로는 쉿shit, 불어로는 카카caca, 한자로는 인분人糞이라고 쓰는 그 똥이다. 똥을 싸야만 하는 인간과 똥을 싸야만 하는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발견. 라블레시언이 가리키는 것을 기억하라. 방귀가 잦으면 똥이 나온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라블레는 먹고 마시고 자고 싸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그것이 그의 위마니슴이다. 그러니 그걸 인문주의나 인본주의가 아닌 인분주의人糞主義라고 부른다고 해도 라블레는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인간은 라블레 이전에도 그런 존재였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당연하신 말씀이다. 하지만 당연하다는 말은 생각만큼 당연하지 않다. 당연함은 언제나 동시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라블레의 시대에 그의 작품은 당연히 당연하지 않았다. 여전히 중세의 기독교 세계관이 남아 있던 시절이다.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가치들은 터부시되었고 육체적 쾌락은 외설스럽고 음탕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라블레의 작품이 나오는 족족 교회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던 게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가톨릭 백과사전』은 라블레를 이렇게 소개한다. 라블레는 천재이며 그의 어휘는 풍부하고 생생하지만 음탕하고 외설스럽고, 그의 작품은 해악을 끼친다.
오늘날 그의 작품은 더 이상 금서가 아닐뿐더러 당당한 고전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라블레에게는 잘된 일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금서와 고전 사이에는 사실 아주 작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금서가 아무도 읽지 못하는 책이라면 고전은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다. 금서가 되면 악의적인 평과 함께 『가톨릭 백과사전』에 이름이 실리고, 고전이 되면 지루한 설명과 함께 문학 교과서에 이름이 실린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차라리 『가톨릭 백과사전』 쪽이 라블레에게 더 어울린다. 교과서에는 웃음이 없고 웃음이 없는 곳에는 라블레도 없다.
밀란 쿤데라는 라블레가 가지고 있는 유희와 활기와 기발과 음란과 웃음을 무시한 채 그를 단순한 인본주의적인 사상가로, 진지함의 표본으로, 지루한 선생님으로 가르치는 프랑스 교육을 맹비난한다. 그건 예술에 대한 무관심이다! 예술 거부다! 예술에 대한 거부반응이고 문화에 대한 거부반응이다! 팬을 자처하는 쿤데라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라블레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한 에세이에서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이야기는 유럽의 소설이 모든 규범에서 벗어나 막 태어나기 시작할 무렵에 쓰였다. 그 책들에는 미래의 소설의 역사 속에서 실현되거나 버려질, 어쨌든 전부 우리에게 영감으로 남게 될 가능성들이 가득 차 있다. 있을 법하지 않은 일, 지적 도전, 형식의 자유 사이를 거닐고 있다.
이렇게 말하자, 라블레와 그의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은 소설이라는 장르가 방귀의 뒤를 따르는 똥처럼 자연스러운 것으로 규정되기 직전, 충만한 암시와 엉덩이를 살살 간질이지만 그것이 된똥인지 물똥인지 바깥 구경을 나온 회충인지 항문에 난 털인지 아니면 그저 싱거운 헛방귀일 뿐인지 알 수 없는 순간에 등장했다. 소설은 된똥도 물똥도 회충도 제모가 필요한 항문 털도 헛방귀도 될 수 있었고 술 마시고 차가운 땅바닥에 앉아 있다 생긴 치질일 수도 있었다. 라블레의 작품은 그 모든 것이었고, 그 이상이었다. 그의 뒤를 이은 작가들과 한쪽 어깨에 완장을 두른 미학적 검열관들에 의해 아직 규정되고 다듬어지지 않은 광기와 힘과 웃음으로 가득한 원천. 여전히 무수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거대한 약속. 나는 그것을 라블레의 엉덩이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소설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래의 소설은 모두 그곳에서 나왔다.
자, 이제 그의 엉덩이를 만날 시간이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