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자크 라캉, 대타자의 향락이라는 비신학
제1장 무엇을 위한 난해함인가
제1절 라캉학파에서 주체의 형성
라캉은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 번만 읽어보면 그 사실 여부를 누구라도 판단할 수 있다. 비약이 많고, 흐름이 자주 끊기는 논지를 흩뿌리기라도 하듯이 꾸불꾸불 진행시키는 라캉의 논의는 난해하고 회삽晦澁하고 때로는 생경하기까지 하다. 사실이 그렇다. 오랜 시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본문에서 새어 나오는 애매모호한 인상을 쭉 살펴본 결과, 희미하게 떠오르는 것은 라캉의 시니컬하고 신랄한 표정과 말투뿐, 이런 경우마저 있음을 라캉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안다.
왜 라캉은 난해한가? 이 난해함은 필요한 것이었다. 그 자체가 하나의 기능을 지니고 있으니까. 규범적인 기능이라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닌, 그런 기능을 갖고 있으니까. 한 집단에게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여러 사람에게 그것은 명백하게 작용했다. 가열한 정신분석 비판을 전개한 푸코가 만년에 인터뷰에서 술회한 내용은 옳다. 즉, 라캉을 읽는 자가 읽음을 통해 자신이 욕망의 주체가 되었음을 발견하도록, 라캉은 자신의 발언과 문장을 설정해놓았다. 읽기는 단순히 지적인 이동에 그쳐서는 안 된다. 하나의 고난이자 곤란, 시련이자 단련, 욕망의 극장이어야 한다. 침침한 눈으로 응시하면서 텍스트를 읽고, 정처 없이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이로를 좇아 노트에 필기하는, 개념의 윤곽을 좇으려는 작업이 혹란 속에서 욕망을 계속 자극하게끔. 그리고 바로 그 욕망이 읽는 자를 라캉적인 주체로 만들어가게끔. 그렇다. 라캉이 원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라캉의 난해함은 라캉적인 주체를 생산하기 위함이다. 난해함에 도전하고, 그것을 겨우 읽을 수 있게 되는 것. 그리고 그 개념을 다루게 되는 것. 그 긴 과정 한복판에서 생각뿐 아니라 거동도 조금씩 변해가는 것. 이것이 라캉적인 주체를 만들어내는 제조 과정이다.
따라서 라캉이 한 말은 무엇이었는가, 라캉은 무슨 말을 했는가, 라캉의 진의는 무엇이었는가, 이렇게 따져 들어갈수록 우리는 라캉의 함정 깊숙이 빠져들어간다. 이는 해석학적인 함정 혹은 그 이상의 것을 내포하는 함정이다. ‘무한한 탐색으로, 글쓴이의 진의에 대한 끝없는 촌탁忖度(남의 마음을 미루어서 헤아림을 뜻한다.─옮긴이)으로 이끄는 난해한 성전’을 위조할 수 있음을 알고 있는 자가 만든 함정이다. 프로이트의 성전에 주석을 다는 라캉이 위조한 성전. 각양각색의 삽화와 도표에조차 깃든 성전에 대한 경건한 태도야말로 정신분석적 주체를 가능하게 한다. 라캉의 문장을 말라르메의 문장에 비유한 자는 옳았다. 그는 슐레겔과 말라르메를 계승하는, 아이로니컬한 난해함의 옹호자에 속한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라캉은 읽는 행위를 마치 종교적인 단련이라도 되는 듯 여겼다. 읽는 행위가 한 주체의 교정이고, 갱신, 생산이기조차 하게끔. 독해 불가능한 것을 읽기, 그것이 주체를 만들어낸다. 실제로 라캉은 자기도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에는 “명백한 의도가 있다”고 말한다. 이때 생기는 “오해의 폭” 때문에 비로소 이해되는 것이 있다고.2 라캉은 그들과 함께 창화하리라. 난해함은 과연 악일까, 그것은 필요하지 않을까, 이해가 안 된다고 불평하는 자들은 “〈밤〉이 없는 잉크병에서 이해 가능이라는 근거 없는, 자만에 찬 유약을 떠내고 있을” 뿐인 것이 아닐까, 하고.
따라서 라캉의 개념을 거론하면서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알고자 하는 것,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처음부터 알 수 없게 만들어져 있고, 알 수 없음으로 인해 기능하는 개념들의 주변에서 우왕좌왕하는 것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우습기까지 하다. 알고자 하기 때문에, 알고 싶어 하기 때문에 알지 못할 때 원한을 품게 된다. 그리고 알게 되었을 때는 그것을 여기저기 설파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이런 광대짓을 우리는 너무 오래 보아왔다. 푸코가 정신분석을 비판하면서, ‘“함정에는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저는 단호히 외부에 머무르면서 외부에서 비판하고자 합니다. 굳이 정신분석의 담론 안에 들어가서 이런 개념은 이상하다는 등의 발언을 하는 일은 “절대로 피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 함의는 명확하다. 텍스트를 응시하면서 잘려나간 단편들을 끼워 맞추듯 그 해석의 순환 속에 몰입하는 것은 이미 항상 정신분석의 함정에 빠질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니까. 라캉학파의 주체 형성이라는 이 사태에 대해서는 푸코의 비판을 음미한 후에 제3부 제8장 제99절에서 다시 논하겠다. 아직 먼 이야기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라캉의 바깥에서 논하는 것은 필자의 역할이 아니다. 푸코의 정신분석 비판에는 나중에 많은 지면을 할애해야겠지만. 그러나 라캉에 관한 두터운 주석을 다는 것 또한 필자의 역할은 아니다. 하지 않는 이유는 이미 논했다. 라캉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바깥에서 비판하는 것도 아닌, 그런 존재 방식이 가능할까?
가능할지 여부는 모르겠다.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우리의 물음은 이러했다. “라캉은 왜 난해한가?” 그리고 필자는 라캉의 난해함이 규범적인 기능을 지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해보았자, 라캉은 왜 난해한가라는 물음에 답했다고 할 수 없다. 라캉의 난해함이 지닌 기능을 논한 것에 불과하고, 라캉의 난해함을 낳은 원인은 논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물음은 다음과 같다. “라캉의 난해함은, 그가 내놓은 개념의 어디에 원인이 있는가?” 우리는 이 물음을 좇아 라캉을 비스듬하게 가로지르려 한다. 이 질문에 대한 마지막 해답을 이 장에서 제시하기는 벅차다. 마지막 장에서 한꺼번에 내놓게 될 것이다. 르장드르와 푸코를 검토한 후에 비로소 명쾌하게 논할 수 있다. 그러면, 시작하자.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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