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트라우마의 불투명성
불투명한 원인
배가 침몰하자 온갖 말들이 출현했다. 마치 배가 사라진 자리를 말들이 채우고 있는 것처럼, TV를 켜면 연일 뉴스가 흘러나왔고 인터넷은 실시간으로 기사로 도배가 되었다. 진실을 찾는다는 외침 속에서 우리는 정신없이 말들을 주워 담는다. 과연 우리는 무엇이 궁금한 것일까? 도대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언어가 개입하지 않는 현실은 없다. 사건이 하나의 트라우마로서 영향을 미치는 동안에는 단순히 희생자가 맨땅에 부딪히면서 충격을 받는 과정이 아니라 언어적으로 구성된 장막이 찢기는 과정이 있다. 트라우마의 충격은 잔혹한 현실과의 대면이 아니라 언어의 찢김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렇기 때문에 트라우마적인 사건이 발생하면 또한 인간은 자연스럽게 찢긴 언어의 장막을 꿰매기 위해 노력한다. 찢겨 나간 부분을 수선하기 위해 다양한 수사학적 장치들을 동원한다.
언어의 탑을 쌓는 것이다. 신의 권위에 도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속에는 ‘모르고 싶다’가 아니라 ‘알고 싶다’의 포지션이 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를 알고 싶고 캐묻고 싶은 것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에 대해 우리가 취하는 통상적인 입장이 ‘알고 싶지 않다’임을 고려한다면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의식이란 무엇일까? 라깡은 무의식을 ‘알고 싶지 않음’의 입장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우리 안에 우리와 관련된 뭔가가 있지만 우리가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다. 우리 자신의 욕망과 관련해 받아들일 수 없고 견딜 수 없으니 알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취하는 포지션은 ‘알고 싶지 않다’가 아니라 ‘알고 싶다’이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알고 싶은 것인가? 진실을 알고 싶은 것인가? 진상을 규명하고 싶은 것인가? 하지만 진실이란 무엇인가? 배를 버려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배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사실인가? 아니면 구출하는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는 사실인가? 아니면 관리를 해줘야 할 사람들이 아무런 관리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인가? 아니면 어떤 기이한 종교집단의 부조리함인가?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 계속 무언가가 나오지만 여전히 갈증은 풀리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뭔가를 알아갈수록 우리는 점점 눈이 멀게 된다는 사실이다. 즉 지식의 맹목이 있다. 더없이 명백한 사실들이 있지만 우리는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의 뭔가를 찾는다. 특이한 것은 그렇게 그 이상의 뭔가를 찾는 한, 우리가 찾는 것은 합리적인 원인이 아닌 불투명한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일련의 연쇄적인 원인이 있다. 하지만 원인은 밝혀질수록 불투명해진다. 처음에는 선장의 태만이 있었고, 그다음에는 정부의 무능력함이 있었고, 그러고 나서 한 종교집단에 주목했고, 최종적으로 한 종교지도자의 행적에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에 대해 점점 알아갈수록 그는 합리적으로 더욱 이해할 수 없는 형상이 된다. 그가 믿고 있는 것들을 넘어 그의 사생활이나 여자관계까지 거론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럴수록 그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 된다.
그가 무슨 짓을 저질렀건 공개수배가 이루어진 것은 경제사범이라는 명목 때문이지만 우리가 그에게서 보기를 원하는 것은 그 이상이다. 즉 우리가 입은 형언할 수 없는 충격에 상응하는 어떤 불투명한 원인, 드라마틱한 원인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합리적인 형상이 아니라 잔혹하고 파렴치한 형상을 기대한다. 우리를 파멸로 몰아갈 수 있는 어떤 잔혹한 형상의 타자. 그가 도망칠수록 그는 더욱 기괴해지고 심지어 외설적인 형상이 된다.
트라우마의 타자
그런데 우리는 외상의 원인으로부터 얼마만큼이나 떠내려가고 있을까? 과연 우리가 알고 싶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걸까? 알고 싶은 것처럼 보이지만 진실에 대한 욕망이라고 보긴 어렵다. 알고 싶다고 외치지만 우리는 알아갈수록 눈이 멀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찾는 진실은 트라우마에 상응하는 잔혹한 타자일 것이다. 9・11 사태는 테러임이 분명하지만 이후 테러로 유발된 트라우마에 대한 조치들에는 바로 그것을 불러일으킨 잔혹한 타자를 확인하고 구성하는 과정이 있었다. 오사마 빈 라덴 역시 잡히지 않고 도망치는 과정에서 점점 불가사의하고 수수께끼 같은 형상이 되었다.
우리는 과연 그가 산 채로 잡혀서 모든 것이 밝혀지기를 바랐을까? 우리가 원한 것은 그가 모든 원인의 불투명성을 안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잔혹한 타자로 사라지기를 바랐지, 한 명의 평범한 가장이나 신앙심 깊은 종교지도자로 사라지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잔혹한 타자란 트라우마의 원인일까, 아니면 트라우마를 처리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까?
프로이트가 트라우마의 문제와 처음 마주쳤을 때 당면했던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환자들이 보이는 신경증의 증상은 어렸을 적에 겪은 유혹의 사건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유혹의 사건이 원인이기 때문에 이를 ‘유혹설’ 혹은 ‘뉴로티카neurotica’라고 했다. 모든 유혹설의 중심에는 바로 쾌락과의 만남이 있다. 잔혹한 타자, 나를 해치는 타자, 나를 착취하는 타자, 나를 이용하는 타자와의 만남이다. 히스테리 환자들이 이야기하는 타자의 전형적인 형상이라 할 수 있다.
왜 배가 뒤집어졌는지가 분명하고 어떻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가 분명한 세월호 참사의 경우는 비교적 답하기가 어렵지 않겠지만, 트라우마가 개인의 은밀한 차원으로 내려갈수록 그 원인은 특정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늘 어떤 의문을 갖고 있었다. 트라우마적인 사건이 정말로 일어난 일인가? 과연 환자가 보았다고 추정되는 광경은 발생한 일인가, 아니면 그저 그의 상상력에 불과한 것인가?
분명한 것은 그 사건이 일어났든, 일어나지 않았든 우리는 지금 나름의 표상들을 동원해서 찢긴 상처를 봉합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자가 치료 중인 것이다. 원인들의 사슬을 끼워가며 궁극적으로 잔혹한 타자의 현상을 만들어내면서 우리는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
절대적 무력 상태
우리가 알고 싶다는 명목으로, 그러니까 진실 규명이라는 명목으로 쏟아내는 언어들을 한 꺼풀 벗겨내면 거기에는 우리가 느끼는 것들이 있다. 경악, 불안감, 죄의식, 분노 등과 같은 정동情動들이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는 무엇에 분노하는 것일까? 무엇에 대한 죄의식일까? 우리는 정부가 무능력하기 때문에 분노하는 것일까? 아니면 선장이 배를 버리고 달아나서 분노하는 것일까? 그것을 보고 어떻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이 분노하지만, 그럼에도 그 누구도 자신이 그런 상황 속에서 선장처럼 행동하지 않으리라고는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분노는 사실은 우리 자신에 대한 분노일지 모른다. 일차적으로는 그들을 지키지 못한 타자에 대한 분노이겠지만, 알고 보면 우리 자신 역시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한 타자들이다.
따라서 분노의 껍질 속에는 죄의식이 있다. 특히 희생당한 사람들이 어린 학생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기원인 어른으로서 죄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희생자들이 무력한 상태에 놓인 인간이었기에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해 우리는 죄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분노한다.
하지만 우리가 분노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보다 그 상황이 우리 자신에게도 닥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밖에서 그들을 보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배가 침몰하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무기력한 우리 자신을 보는 것이다. 무기력한 상태에서 타자들을 기다리고 있지만 아무도 응답을 해주지 않는 상황.
타자가 꺼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혼자 힘으로는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 타자에게 절대적으로 종속된 채 구출을 기다리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 상황이다. 우리는 어른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죄의식을 느끼지만, 또한 우리 자신이 모두들 한 명의 아이다. 무기력하게 누군가를 기다리던 아이. 바로 이러한 위치에서 우리는 다시 타자로서의 우리 자신을, 타자로서의 정부를, 선장을, 혹은 어떤 종교지도자를 비난한다.
트라우마적인 사건은 우리가 유년 시절에 처했던 바로 그 절대적인 무력감을 환기시킨다. 1926년 프로이트는 「억압, 증상, 그리고 불안」에서 이 절대적 무력 상태를 ‘Hilflosigkeit’라고 쓴 바 있다. 비탄, 곤궁, 조난의 상황이다. 무기력한 상태에서 살려달라고 외치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상황이다.
이미 우리는 유년 시절에 그런 상황을 경험했다. 어머니에게 기생하던 시절, 어머니 없이는 목숨을 연명할 수 없던 시절, 오로지 타자에게 종속된 채 생존할 수밖에 없던 시절, 우리는 어머니와의 분리를, 어머니의 신체와의 분리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양식이 되었던 젖가슴과의 분리, 우리에게 생명줄과도 같았던 어떤 원초적인 대상과의 분리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프로이트는 외적인 위험이란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한 그 첫 번째 위험을 환기시킬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죽음에 실패한 사람들
이를 통해 세월호 앞에서 우리가 다양한 포지션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서서히 가라앉는 거대한 배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무능력한 타자의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배 안에 있는 무기력한 아이들의 위치에 있기도 했다. 타자의 위치에서 우리 대신 책임져줄 누군가를 원했지만, 무엇보다 그러한 타자의 위치에 있는 우리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무기력한 아이들의 위치에서 타자를 비난하기도 했다.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지만 다양한 수준이 존재한다. 일단 죽음이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사람들, 소위 죽음의 문턱에서 생존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버린 가족들이 있다. 물론 우리는 결코 그들이 될 수 없다. 그들의 경험은 형언할 수 없는 경험, 공유할 수 없는 경험이다.
그들과 우리가 다른 점은 우리는 뭔가를 떠들 수 있고, 인터넷 검색을 할 수도 있고, 온갖 표상들 사이로 우리의 정동들을 밀어 넣어 분산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자책하기도 하고, 규탄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를 목표로 삼아 그에게 책임을 몰아주기도 한다. 이를테면 나름의 내러티브를 구성하며 우리는 자가 치료를 하는 셈이다. 이 사건이 우리의 유년기적인 무기력함을 환기시켰다면, 우리는 표상의 연쇄를 통해 애초의 사건으로부터 멀리까지 떠내려가면서 그것을 나름의 방식으로 망각해가고 있는 중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경증이 구성되는 방식이다. 요컨대 신경증의 증상이란 견딜 수 없는 정동을 견디는 한 방법이다. 앞서 이야기한 잔혹한 타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증상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트라우마의 불투명한 원인을 집약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들을 통해 트라우마의 참혹한 현실을 마감질한다. 그리고 그러한 증상은 우리의 책임을 해석 가능한 표상의 연쇄를 따라 타자에게 전가시킨다는 점에서 또한 전이적轉移的인 신경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을 간신히 모면한 사람들, 그리고 소중한 대상들이 사라져가는 장면을 목격한 가족들은 자가 치료조차 불가능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표상의 연쇄로도, 어떤 내러티브로도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지목해서 비난하는 것과 자신이 짊어진 책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절규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세월호 참사가 그들에게 트라우마를 야기했다면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만이 아니다. 단순히 사망을 통고받은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들을 절망 속에 빠트린 것은 무기력한 상태에서 아이들이 서서히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죽어가는 자들의 시선과 마주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방금 전까지 통화하며 목소리를 들었던 아이들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것이다.
살아서 돌아온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가장 충격적인 일은 그들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죽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죽어가는 자의 시선을 목격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에 마주친 시선으로 죽음의 시선을 자신에게서 떼어내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라 실패한 사람들이다. 함께 죽지 못해 죽음에 실패한 사람들이면서, 동시에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생존에도 실패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경우 트라우마는 그들에게 신경증적인 증상, 즉 전이적인 신경증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트라우마적인 사건이 발생시킨 충격이 표상의 연쇄로 통합되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용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닌 한, 전이적인 신경증으로의 길이 열리지 않는다. 이때 그들에게 남은 길은 트라우마가 표상의 매개체를 거치지 않고, 즉 타자를 경유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육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각인하는 것이다. 소위 정신신체현상phénomène psychosomatique이 바로 그런 결과 중 하나다.
또 유사한 맥락에서 그들에게 애도란 불가능하며 멜랑꼴리적인 대상화가 발생할 가능성이 많다. 표상의 연쇄를 경유하지않고 대상에 직접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들은 한편으로 그들을 죽게 놔둔 자이면서, 동시에 자신들이 죽인 바로 그 대상이기도 하다. 다만 이러한 동일시는 우리가 세월호의 희생자들에게 했던 것과는 좀 다른 동일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자기 비난의 사슬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불가능한 동일시, 책임을 타자로 돌릴 수 없는 동일시다.
요컨대 우리처럼 타자에게 책임을 돌리기보다는 자신이 모든 책임을 떠맡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비난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정부의 무책임함을 질타하는 것은 우리가 정부를 비난하는 것과 다르다. 우리는 정부를 비난하면서 우리 자신의 책임을 덜어내지만, 그들은 아무리 정부를 비난해도 자신의 책임을 덜어낼 수 없다. 자신의 책임을 덜어내거나 공유하기 위해 타자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에게는 타자의 존재가 더 이상 불가능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타자를 비난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