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제국
우리 시대의 문화를 감각으로 판별한다면 아마도 ‘부드러움’이라는 단어가 적절할 것 같다. 이 시대는 미세하고, 부드럽고, 유들유들한 것들이 거칠고, 딱딱하고, 꼿꼿한 것들보다 사랑받는다. 권위주의와 군홧발과 이데올로기와 대규모 시위의 시대가 지난 곳에는 민주주의와 소통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촛불집회가 자리를 잡았다. 딱딱한 시대가 이데올로기에 의한 전쟁의 시기였다면, 부드러운 시대에는 즐거움과 쾌락을 줄 수 있어야만 힘을 얻는다. 부드러움과 달콤함은 한 쌍의 감각이다. 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매체는 아마도 딱딱하게 누르는press 휴대전화를 매끄러운 터치와 가상의 앱들로 대체한 스마트폰일 것이다.
부드러움의 감각은 소통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토크 콘서트’라는 형식이 그것이다. 최근 SBS의 〈지식 나눔 콘서트 아이러브 인〉이 보여주듯, 청춘과 심리에 관한 베스트셀러를 펴낸 교수들과 ‘소프트’웨어로 유명해진 벤처사업가 출신 교수, 말랑말랑한 언어로 수많은 팔로워를 거느린 소설가가 무대에 올라 희망에 대한 ‘토크’를 하면 가수들이 뒤에서 ‘콘서트’로 분위기를 띄운다. 또한 〈KBS 스페셜 ‘괜찮아 서른’〉을 비롯한 지상파의 소위 ‘스페셜’ 다큐들은 알바하는 대학생이나 만년 고시생의 모습을 담으면서도 약속이나 한 듯, 속삭이는 목소리의 성우와 감각적인 미장센, 일상을 주제로 한 인디밴드들의 노래를 결합하여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청년들이 따르는 이 시대의 ‘멘토’들은 왜 모두 착해만 보이고, 왜 ‘다큐’들은 입만 열면 희망, 꿈, 미래, 청춘, 위로, 용기만을 말할까? 폭력적이고 거칠어져가는 세상에 등장하는 청년 실업, 교육 전쟁, 경제 위기, 불행, 절망 등의 문제를 부드럽고 매끈한 소통과 공감의 형식으로 풀어가는 ‘토크 콘서트’와 ‘스페셜 다큐’의 정체는 무엇일까?
바로 이 간극 속에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시대에 더욱 충만해진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다. 그것은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모순들, 체제 자체에 대해 급진적으로 문제 제기를 해야만 할 여러 과제들을 희망과 청춘의 문제로, 심리적인 문제로, 자기계발과 혁신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방식이다. 신자유주의의 주체 생산 방식인 ‘자기 관리’는 토크 콘서트와 스페셜 다큐가 말하는 ‘희망과 꿈’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볼 것이다. 착한 멘토들이 서사화하듯 위기와 불안을 돌파할 진정한 열쇠가 ‘자기’를 바꾸는 데에 있다는 말과 ‘철의 여인’ 대처의 유명한 “사회는 없다”는 말 사이의 거리는 가깝다. 모두가 ‘자기’만을 찾는 사회를 가장 반기는 이들이 누구일까?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가장 거친 폭력들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가장 부드럽고 달콤한 언어들이 번성한다. 체제의 문제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사회에서 자기의 내면으로 돌아가라는 조언들이 인기를 얻는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유행어는 역사적으로 사회의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청춘들을 내면의 고민과 아픔이라는 심리적 틀 속에 묶어두는 구속복straitjacket이다. 사회적 문제에 저항하는 거친 투사들은 감옥에 가고, 자기를 혁신하라는 부드러운 멘토들은 국민적 명사가 되는 감각적 불균형은 근본적 사유 자체를 억압하는 부드러운 시대가 닿는 종착지다. 부드러움이라는 문화적 감각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가장 정치적인 접근이 요청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2012. 0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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