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
내 우상이었던 존 업다이크, 그리고 뼈저린 교훈
내가 뉴욕 브루클린에서 처음으로 구했던 갈색 사암 아파트는 잡지 편집자와 그녀의 조용한 책벌레 남편이 소유하고 있었다. 그 집에는 계단을 따라 긴 서가가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먼지가 잔뜩 쌓인 서가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서가에서 ‘F’로 시작하는 작가들의 책을 꺼내려면 계단을 반쯤 올라 난간 너머로 몸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말수가 적은 책벌레 남편이 3미터 높이에서 아슬아슬하게 몸을 빼고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을 손에 쥐고 있던 나를 발견했다. 그러자 그가 수다스러워졌다. 파이어 섬에서 여름을 보내던 십대 시절에 프루스트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고, 대학생일 때는 톨스토이를 열정적으로 파고들었다고 했다. 나는 뒤늦게 독서에 빠진 터라 그의 서가와, 책에 파묻혔다던 그 한가롭고 문학적인 여름날이 부러웠다. 나는 그에게 책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는 먼저 존 치버의 단편집을 한 권 꺼내줬고, 다음에는 존 업다이크의 『달려라 토끼』를 건넸다.
치버의 단편집은 끝까지 읽지 못하고 덮어버렸다. 징징거리고 지나치게 꽉 짜인 것 같았으며, 결말은 너무 말끔하게 세공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업다이크는 달랐다. 나는 후텁지근한 열기에 휩싸인 뉴욕에서 가는 곳마다 『달려라 토끼』를 들고 다니면서 불과 며칠 만에 책을 독파했다. 대학 시절에는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에 빠졌었다. 미국의 길을 사랑해마지않는 샐 패러다이스의 이야기 말이다. 이 책, 『달려라 토끼』는 생판 정반대의 소설이었다. 감옥이나 진배없는 소도시에 스스로를 가둬놓고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남자의 이야기로, 그가 행하는 반문화적 행동은 탁 트인 고속도로로 떠나는 게 아니라 외도 상대와 잠자리를 갖기 위해 차를 타고 동네를 가로질러 달리는 것이었다.
업다이크의 소설은 나와 희박한 연관성이 있었다. 어렸을 때 동부 펜실베이니아에서 6년을 살았던 나는 성장하는 동안 그 지역을 둘러싼 분위기를 또 다른 부모인 양 느꼈고, 성인이 되고 나서야 당시 내가 숨 막히게 갑갑한 인생을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업다이크의 산문은 이를 뛰어나게 묘사하고 있었다.
업다이크에 대한 찬탄은 책에서 또 다른 책으로 이어졌고, 오래 지나지 않아 나는 업다이크 광이 되었다. 나는 전부 50권이 넘는 업다이크 초판본을 거의 다 모았다. 업다이크에게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여자 친구는 이런 내 모습을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종종 나를 따라 서점에 가서 책에 사인을 받곤 했다. 나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업다이크가 40년 전에 했던 일을 따라 했다. 여자 친구와 함께 뉴욕을 떠나 뉴잉글랜드의 하얀 미늘벽 판잣집으로 이사한 것이다. 그곳에서 여자 친구는 기술 연구를 수행하는 일자리를 구했고,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니다. 나는 글을 쓰는 대신 업다이크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업다이크는 내 나이에 이미 시집과 단편을 발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고, 그의 작품에 드러나는 압도적인 슬픔에 대해서도 더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그 슬픔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가족에서, 또한 서서히 갇혀 간다는 두려움을 해소코자 육욕에 빠져들지만 그런 시도가 계속해서 실패로 끝난다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밤마다 침실에 놓인 책장을 가끔 바라볼 때면, 나는 내용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책장이 무너져 잠든 우리를 덮칠지도 몰라 불안했다.
하지만 낮에는 한결 상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점점 늘어만 가는 업다이크의 책들은 다시 한 번 신호등이 되어주었다. 내 석사 논문의 주제는 업다이크가 눈에 보이는 세계의 온갖 구체적인 부분들을 꼼꼼하게 살피고 세공한다는 주장이었다. 가장 우울한 소설에서도 그의 이런 측면을 볼 수 있었다. 업다이크라는 작가가 내게 작가의 방식을 보여주는 모델이었다면, 나라는 개인이 점점 더 닮아가게 된 그의 인물들은 인간의 행동 방식에 대한 반면교사가 되었다. 나는 반복적으로 업다이크의 책을 읽으며 그의 인물들이 끝없이 환기시키는 희생적인 관계를 피하는 방법을 찾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혹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타잔』을 어린이용 책으로 축약하는 일자리를 구한 나는 나와 업다이크의 관계도 이처럼 우울한 일거리의 속성과 유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다른 작가의 삶에 나의 삶을 겹쳐놓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개인적 삶 역시 그의 인물들을 모방하려다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처마 밑으로 뉴잉글랜드의 차가운 공기가 내려앉으면 나와 여자 친구는 점점 더 자주 서로를 원망하며 몰아세우고는 했다. 나는 글을 쓰고 있지 않아서 불행했다. 그녀는 나로서는 잘 알 수 없는 이유로 불행했다. 우리는 고작 이십대 중반이었지만 기회를 모두 잃고 말았다는 느낌에 시달리고 있었다.
우리보다 두 배쯤 나이가 많은 커플 사이에서 1년을 보내고 나자, 여자 친구와 나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뉴욕으로 돌아갔다. 업다이크적 인생의 예정된 파국에서 벗어난 우리는 가능성이 재충전되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그녀에게 청혼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니까 반지가 필요했다는 말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업다이크에게로 향했다. 전부터 나는 그의 책들을 시급한 수술을 요하는 암 덩어리처럼 주기적으로 책장에서 몰아내며 애서광적 기질을 억누르고 있었다. 이 기질은 언제나, 가끔은 더욱 치명적으로 강력해져서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 나는 어느 때보다도 극단적인 수술을 감행했다. 업다이크의 책을 전부 싹 치운 것이다. 택시를 세 대나 불러야 했지만, 고작 몇 시간 만에 나는 책장 세 개에 꽂혀 있던 책들을 전부 뉴욕 서적상에게 보낼 수 있었다.
일주일 후, 택시를 타고 파크 애비뉴를 지나가는 내 무릎에는 작은 빨간색 가죽 상자가 놓여 있었다. 개운한 기분이었다. 내가 업다이크의 책들을 통해 흡수했던 온갖 마음고생과 지혜, 그리고 나약함이 영원하고 순수한 결정, 즉 결혼반지로 응축되어 있었다. 더는 가시 돋친 책들이 우울한 비난 조의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자유로이 한 여자의 남편이 될 수 있었고, 그러고 싶었다. 나는 업다이크 같은 작가가 되려고 했으나 이제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한때 업다이크를 통째로 집어삼켰던 나는 그 뼈까지 모조리 뱉어냈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속도에 대해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내와 나는 결혼하고 1년 뒤 별거했다. 그녀와 사이가 틀어질 때마다 젊은 업다이크처럼 다락방에서 글을 쓰며 홀로 지내는 생활에 환상을 품었던 내게 나만의 공간이 생기자, 나는 사방을 담배꽁초로 채웠다. 창밖을 내다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노라면 지난 10년간 읽었던 업다이크의 모든 작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면 전쟁을 방불케 하는 그의 소설 속 상황들을 보아온 것이 내게는 별로 안 좋게 작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책을 연구하며 나는 더 좋은 작가, 더 좋은 평론가가 될 수 있었지만, 삶에서는 그의 인물들이 저질렀던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내와 나는 가을에 이혼했다. 우리가 결혼식을 올렸던 메인 주 법령에 의하면 둘 중 하나가 이혼에 필요한 마지막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녀가 캘리포니아로 이사한 뒤였으므로 나는 혼자 뉴욕에서 출발해 곧 법적으로 남남이 될 전처의 가족을 만났고, 해변에 있는 그들의 집에서 참으로 경사스럽게도 가재 요리로 저녁 식사를 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장모를 모시고 법정으로 갔다. 장모는 나와 그녀의 딸을 연결하고 있던 가냘픈 법적 고리가 끊어지는 동안 바깥의 빈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곧장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그날 오후에 보스턴 미술관에서 존 업다이크와의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는 미술에 대한 에세이집인 『고요한 응시』를 막 출간한 뒤였고, 인터뷰 중 그림을 감상하며 그의 작품평을 실시간으로 듣기로 되어 있었다. 그를 인터뷰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결혼하고 4개월 뒤, 나는 그의 스무번째 소설 『내 얼굴을 찾으라』가 출간되었을 때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당시 그가 보여준 온화함과 방대한 지식에 반했던 나는, 그를 내가 버려야 했던 꿈의 화신이라기보다는 인터뷰 대상으로 대할 수 있어 안도했다.
나는 미술관에 가다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늦게 도착했다. 카키색 바지와 스포츠 재킷 차림의 업다이크가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막 일흔 살을 넘긴 그는 여전히 무성한 머리숱에 단단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전시실 몇 곳을 통과했다. 업다이크는 다정하면서도 훌륭한 유머 감각을 갖춘 평들을 내놓았다. 마치 산문시를 듣고 있는 듯했다. 그는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찬사의 말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선가 나는 긴장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그가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할까요? 당신이 좀 피곤해 보여서 말입니다. 듣기로는 버몬트에서 왔다면서요?”
나는 버몬트가 아니라 메인에서 출발했다고 대답했다. 거기서 뭘 하고 있었느냐는 그의 질문에 이혼 절차를 밟았다고 대답했다. 인터뷰가 갑자기 뚝 끊어졌다. 그는 진짜 감정이 실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빈정거리듯 굴던 태도도 허물어졌다.
“정말로 유감입니다.” 그가 말했다. 그는 막 이혼했다는 사실을 내가 가볍게 넘기도록 두지 않았다. 그는 자신도 예전에 같은 일을 겪었다고, 지옥 같았다고 말했다. 나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그는 간결한 조언을 해주었다. 그러나 직접 자신의 삶을 언급하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보니 너무나 초현실적인 기분에 휩싸였던 나는 지금 그가 했던 말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나를 기억했던 모양이었다. 그의 스물한번째 소설 『테러리스트』의 출간이 임박했을 무렵, 『오스트레일리안』의 편집자가 내게 한 번 더 존 업다이크를 인터뷰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그의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서둘러 약속을 잡으려고 했지만 번번이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다 결국 그의 홍보 담당자와 연결되었다. 담당자는 스피커폰으로 하던 통화를 수화기로 바꿔 솔직한 말을 꺼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존 업다이크가 지난번 인터뷰에 대해 다소 복합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찢어진 청바지와 이틀간 면도하지 못한 얼굴이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고, 인터뷰 중간에 구구절절한 개인사를 늘어놓았던 것이 (내 기억으로는 어쩌다 보니 나온 말이긴 했는데) 아마도 그를 불편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나는 존이 ‘고루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상처를 받고 당황한 나는 당장 무슨 말을 꺼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내 보다 신중해졌다. 전에는 몰랐던 것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독자가 자신의 인생에서 겪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간접적인 방식으로 알아내고자 작가와 작가의 책을 만나는 것은 각자에게 사생활이 있다는 합의를 위반하는 것이다. 이는 작가의 삶을 지나치게 문자 그대로 그의 작품과 엮으려고 하거나, 소설의 기능이 실수를 연발하는 인물들을 통해 제대로, 혹은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식을 간접적으로나마 배우는 것이라고 말하는 인터뷰나 전기가 범하는 오류다.
나는 인터뷰를 하게 해달라고 홍보 담당자를 설득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나와 존 업다이크는 헬리콥터를 탄 기분이 들 정도로 높디높은 맨해튼 미드타운 고층 건물의 어느 회의실에 자리를 잡았다. 업다이크는 중간중간 칠면조 샌드위치를 베어 물며 9·11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를 이야기했다. 나는 결혼할 때 입었던 가장 좋은 정장 차림이었다. 업다이크에게는 이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치 눈송이들을 흩날리듯 시적인 문장들을 나열하는 그의 말에 단 한 번 끼어들었을 뿐이었다. 강력하면서도 내밀한, 그리고 아주 조금 기묘한, 완벽한 업다이크적 순간이었다. 그는 나의 소설이나 인생의 형태나 의미에 대해서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그건 내 일이기 때문이었다.
*
나는 언제나 작가들과의 만남에는 뭔가 짜릿한 것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우연히 유명 인사를 만났을 때, 화면으로 먼저 봤던 인물의 물리적인 실체에 두 눈이 재적응하는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독자인 당신이 허구의 세계, 그러니까 묘하게 육체에서 분리된 기분을 느끼면서도 당신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세계를 창조한 이가 정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살과 피를 가진 살아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과 관련이 있다.
나는 내가 작가들에 관해 썼던 글이 그 때 가졌던 만남의 본질을 드러내기를 바랐다. 내가 한두 시간, 혹은 그보다도 오랜 시간 동안 대화하며 바라본 그들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인터뷰는 진짜 대화가 아니다. 그보다는 대화의 한 형식이며, 따라서 인터뷰와 말하기의 관계는 허구와 삶이 지닌 관계와 유사하다. 허구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허구는 스스로를 정의하는 일련의 규칙들을 준수해야 한다. 그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따라서 인터뷰가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처럼 흘러가야 한다면, 이 역시 대화와 관련한 일련의 관습을 따라야 한다. 한데 이러한 관습 중 몇 가지는 우리가 자연스러운 상호작용에 대해 알고 있는 바와 상당히 모순된다. 다시 말해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사람은 온갖 질문을 던져야 하고, 인터뷰 당사자로부터 더 많은 것을 이끌어낸다는 목적에만 부합하는 정보들을 말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진행자나 당사자 어느 쪽도 대화가 인위적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신경을 꺼야 한다. 나는 업다이크와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 개인사를 드러내는 바람에 이러한 세 가지 규칙을 전부 위반하고 말았다.
소설가들은 결코 자기 작품의 대변자였던 적이 없다. 이 점은 중요하다. 물론 찰스 디킨스는 책이 나올 때마다 여러 날에 걸쳐 기차에 몸을 싣고 50여 개 도시를 순회했다. 하지만 그는 예외였다. 그는 유명한 사람이었다. 마크 트웨인이나 오스카 와일드, 거트루드 스타인, 그리고 정도는 다르지만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들은 온갖 종류의 일에 대해 글을 쓰고 발언하면서, 자신들의 유명세를 통해 19세기 소설이 지니고 있던 권력을 공론의 장으로 이어지게 했다. 심지어 순문학 소설의 독자층이 꾸준한 감소세로 들어서기 시작했던 때였는데도.
1980년대에 체인 형태의 서점들이 확장세를 보이고 각종 문학 축제들이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대중을 상대로 한 낭독회도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즈음 나와 인터뷰했던(이 책에도 실려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백여 번째로 단상에 오르러 가던 때를 기억했다. 그는 부커상과 노벨상을 수상하고도 대중 낭독회에 나서야 했던 윌리엄 골딩과 함께 낭독했다. 이시구로의 기억에 의하면 골딩은 초조해서 연신 몸을 떨고 있었다.
샐린저나 토머스 핀천 등의 소설가들은 대중적 역할에서 빠지는 쪽을 선택했다. 어떤 작가들은 이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업다이크를 포함한 많은 작가는 애매한 태도를 취해왔거나 취하고 있는데, 이는 작가 본인들이야 대중의 주목을 즐길지 모르겠으나, 방구석에 혼자 앉아 있던 그들을 세상의 빛에 노출시킨 그 작품 자체는 독자, 저널리스트, 팬들과 공개적으로 자신에 대해 논하는 걸 전적으로 반대하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시작했을 때, 나는 준비를 지나치게 했다. 때로는 20개나 되는 질문을 미리 작성하기도 했다. 나는 충실히 인터뷰를 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질문 목록은 점차 줄어들었고, 어느덧 나는 책만 읽었을 뿐 질문 하나도 미리 생각하지 않고 인터뷰 장소로 가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고, 이는 우리가 진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예측할 수 없는 새롭고 훌륭한 대화를.
나는 진짜 이야기꾼이란 쓸 수 있어서가 아니라 써야만 하기 때문에 쓴다고 믿는다. 그들은 세계에 대해 말하고자 하고, 이때 오직 이야기로만 말해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이 책에 수록할 인터뷰들을 선택해야 했을 때, 나는 절박한 필요라는 감각을 느꼈던 작가들을, 그와 동시에 중요하고 아름다우며 즐길 수 있는 작품을 썼던 작가들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인터뷰 도중 로버트 피어시그는 ‘강요받았다’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는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을 쓰도록 ‘강요받았다.’ 부분적으로는 자신이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세계의 이질적인 부분들과 그의 경험을 전체로 만드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서사가 주는 위로’라는 이 주제는 인터뷰마다 꾸준히 등장했다. 에드위지 당티카나 알렉산다르 헤몬, 피터 캐리를 비롯해 나와 대화했던 몇몇 소설가는 두 세계에 발을 걸치고 살아가며, 그들은 이러한 삶을 살기 전과 후로 양분된 시기를 갖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책이 문학작품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두 세계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기 위한 방식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기억을 살아 있게 하는 방식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인터뷰를 진행하는 사람의 역할이란 이곳과 저곳, 조각난 것과 하나였던 것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것이 아니라 그 간격을 더욱 신비스럽게 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토니 모리슨이나 응구기 와 시옹오, 루이스 어드리크와 같은 작가들에게 어떤 장소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정치적인 차원과 관련되어 있다. 역사를, 그리고 역사가 억압하거나 감춰온 감정들을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와 같은 작가들은 언어에 대한 집착 때문에 글을 쓰게 됐고, 그들의 작품은 이 최초의 불꽃에서부터 점점 더 심오한 차원으로 발전되었다. 마크 다니엘레프스키나 수잔나 클라크와 같은 작가들은 그들이 사로잡혀 발전시키고 있던 것을 글로 써서 막 출판하기 시작한 상태였고, 그들은 말을 아끼는 법 없이 자신들의 작업에 대해 수많은 얘기를 해주었다. 한편 어떤 작가들은 작가 생활의 막바지에 다다라 있었다. 필립 로스나 노먼 메일러가 이런 작가들이다. 이들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게 되었을 때나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자신들의 작품이 읽혀야 하는 방식을 이미 고민하고 있었다.
이 책에 수록된 모든 글은 신문이나 잡지의 마감일에 맞추어 쓰였다. 2013년부터 포함시킨 글은 예외다. 설사 내가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쓰지 않았더라도, 최소한 미국에서는 1인칭에 끔찍하리만치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 책에 실린 글에서 나를 많이 드러냈다면 꽤나 거창하게 군다는 소리를 들었을 테다. 나는 아마도 내가 던지는 질문들에, 그리고 내가 기록하는 것들 속에 자리할 것이다. 나는 그들의 책에서 내가 파악한 것들과, 우리의 만남이라는 서사에 흐름을 부여하기 위해 선택한 인용문 속에 존재한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해야만 하듯이. 하지만 내가 깃들어 사는 자아, 우연적이고 선택적인 요인들로 만들어진 나라는 사람은 글에서 분리되었길 바란다. 나는 독자들이 보다 쉽게 이러한 구도 속으로 걸어 들어가 독자들 자신도 그곳에 있다고 상상하기를 바라며 인터뷰를 해왔다. 소설가 중 알렉산다르 헤몬과 피터 캐리, 에드위지 당티카는 내 친구들이기도 하며, 따라서 나는 그들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그들과 거리를 두어야 했다. 한편 20년간 인터뷰를 하지 않았던 로버트 피어시그나 좀처럼 인터뷰에 나서지 않는 임레 케르테스, 모옌과 같은 작가들을 대할 때, 내가 인터뷰의 열쇠를 쥐려고 했다면 솔직히 터무니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또 나는 기교에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기교를 개념으로 접근할 때 생기는 문제는 작가의 머릿속을 벗어나지 않은 아이디어와 마찬가지로 기교 또한 지나치게 이상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무는 다른 환경에서는 다르게 조각된다. 서사도 그러하다. 따라서 나의 또 다른 희망은, 이러한 개략적인 인터뷰들이 작가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에 어떤 분위기로 이루어진 맥락을 다시 불어넣는 것이었다. 책들이 꽂힌 서가는 그 무게와 부피로 말미암아 모종의 필연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나와 만나 대화한 작가들은 모두 작품을 구상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잠정적으로 보였는지, 작품을 완성한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얼마나 머뭇거리고 두려웠는지, 특히 혼자만의 수많은 생각과 기회와 실패의 결과가 그들의 손을 떠나 세상으로 나갔을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소설가가 진짜로 하는 일을 알아내기 위해 인터뷰 진행자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입을 열도록, 이야기를 하도록, 생각을 말하도록 하는 것뿐이다. 이는 결정적인 삶의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움직이는 창문 너머를 슬쩍 엿보는 것에 가깝다. 작가들은 늘 진화하고 있으며, 꾸준히 책을 출간하고, 다른 작가들과 항상 직간접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1990년대 초 뉴욕 시에 살았던 조너선 프랜즌과 제프리 유제니디스는 미국 소설에 19세기 소설의 향취를 되살리려는 노력을 공유했다는 이야기를 각각 내게 들려주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이 달성한 바는 한때 디킨스가 그의 시대에 미국과 영국에서 성취했던 단계에 도달했다. 유제니디스는 타임스 스퀘어 광고판에 등장할 수 있는 유일한 순문학 작가일 것이다. 프랜즌은 업다이크 이후 최초로 『타임』의 표지를 장식한 소설가다.
인터뷰를 하면서 알게 된 작가들의 이러한 관계는 대부분 사적이라기보다는 문학적이었다. 모옌은 귄터 그라스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모옌과 귄터 그라스는 둘 다 윌리엄 포크너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포크너는 토니 모리슨과 조이스 캐롤 오츠에게 등불이 되어주었고, 조이스 캐롤 오츠는 조너선 사프란 포어를 가르쳤다. 포어는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를 차용(비록 포어는 최근까지 월리스를 읽은 바 없지만)했다는 말을 들었고, 월리스의 나침반은 돈 드릴로에게 향해 있으며, 드릴로 자신은 영향이라는 주제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런 식이다.
이러한 유대감, 즉 작가, 그리고 독자로서의 작가 사이의 깊은 관계는 희망적이다. 독자인 사람과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은 유대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13년간 작가들을 인터뷰하고 글로 묶으면서 나는 이 점을 늘 중요하게 다루어왔다. 읽는 것은 기쁨이다. 물론 읽기가 힘겨울 때도 있지만, 그런 와중에도 기쁨은 존재한다. 하지만 좋은 글을 쓰기란 늘 어렵다. 노벨상이나 퓰리처상을 받은 작가든 10년에 걸쳐 첫 소설을 쓴 작가든 모든 작가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할 때마다 어떻게든 끝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그러다보면 두 개의 힘을 서로 분리하기가 불가능해진다. 작가들을 작품에서 분리하기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어려운 일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들의 몸은 그들 작품의 몸이며, 업다이크처럼 수많은 작품을 쓴 작가들도 빛의 소멸에 맞서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다. 회상록 『자의식』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의 육신이 썩어 먼지로 돌아가고 무덤을 표시했던 비석조차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흩어지는 동안, 우리가 수백 년 동안 한 조각의 꿈도 없이 잠을 잔다는 생각은 사실상 소멸 그 자체만큼이나 무시무시하다.” 그리고 그는 2004년의 인터뷰에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많은 글을 썼습니다. 제 삶과 경험의 거의 모든 면면을 어디선가 썼을 겁니다. 그런데도 빠진 것들이 남아 마지막까지도 포착되지 않으리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지요.” 이 책에서 70명의 작가는 그들이 빠뜨리고 싶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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