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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고민은 계속된다
지금까지 나는 동서고금의 공통된 교육 목적 네 가지를 강조했다. 그 네 가지는 역할을 전달하는 것, 문화적 가치를 전하는 것,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 특정 학문의 내용과 사고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교육에 생기를 불어넣어온 세 가지 덕목의 조화를 강조하기도 했다. 즉 자신의 문화 속에서 진실한 것, 아름다운 것, 선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교육기관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이를 실천해왔음을 아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 실천 과정에서 여러 가지 논란이 일곤 했는데, 그 논란의 흐름은 수많은 축을 따라 그 극단을 오가며 변해왔다.
폭과 깊이의 축
일반적으로 교육은 최대한 많은 정보를 다루고 가능한 한 많은 진실을 전달해야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그러나 때로는 적은 수의 주제를 더 깊이 있게 탐구하는 데 따르는 장점도 인식되곤 한다. 영국계 미국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이렇게 주장했다. “극소수의 중요한 아이디어만 아동 교육에 도입하고, 그 아이디어로 모든 조합이 가능하도록 하자. 오늘날 미국에서는 “적을수록 더 좋다”고 주장하는 시어도어 사이저Theodore Sizer 같은 교육가들과 문화적 문해력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상당량의 핵심 지식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허시 같은 교육가들 사이의 갈등을 볼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싱가포르에 이르기까지 어느 곳에서든 이 같은 논쟁은 맹렬히 계속되고 있다.
지식의 축적과 구성의 축
오랜 시간 동안 대다수 학교는 그 사회에서 높이 평가하는 지식을 많이 축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해왔다. 교사가 강의를 하고 학생들이 교재를 읽으면서 지식을 흡수해 기억하고 반복하여 암기했다. 사실 중세의 교재들은 자료를 충실하게 암기는 방법에 상당히 주의를 기울이곤 했다. 그것이 정신의 그릇을 채우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고대에도 지식을 ‘구성하거나’ ‘변화시키는’ 입장 역시 존재했다.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 그 전형적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어떤 교육자들은 학생들에게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던지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학생들이 대안이 되는 답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것과 계속해서 의문을 제기하면서 나름의 결론을 내리는 것을 장려했다.
공리주의적인 결과와 지적인 성장 자체를 중시하는 축
교육자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이 돈을 많이 벌거나 일본보다 앞서는 것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수월하게 하는 데는 효용성이 있음을 보여주라는 압력을 오랫동안 받아왔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전통도 있었다. 특히 존 카디널 뉴먼John Cardinal Newman 같은 영국의 교육가와 고대의 키케로나 공자는 앎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입장에서는 세상을 탐구하고 정신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한 덕목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물질적 재화를 늘릴지 아닐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서 놀랄 만한 귀결은, 몇몇 미국의 기업 경영자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급속히 변하는 세계를 준비하는 최선의 방법이 전통적인 자유교양 교육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획일적인 교육과 개별화된 교육의 축
대부분의 학교는 모든 아이들을 하나의 방식으로 가르치고 평가한다는 의미에서 획일적이다. 이러한 접근법은 동아시아 사회뿐 아니라 프랑스나 프랑스어권 국가 같은 중앙집권적인 사회에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획일적인 교육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이것이 가장 공정하다고 주장한다.
반대 입장에서는 개인들의 강점, 욕구, 목표 간의 커다란 차이를 강조하는 개별화된 교육을 주장한다. 이 입장에서는 개인 간의 차이를 고려하는 교육을 확립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본다. 아마도 실제로 이러한 교육이 더 공정할 것이다. 이와 같은 교육에서는 어떤 종류의 마음가짐이 중요한지 가치를 정하지 않고, 학생들의 현재 모습을 중심으로 각 학생들에게 눈높이를 맞춘다. 또한 각 학생들이 그 사회의 다른 학생들과 똑같아지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각 개인이 그 지역사회의 설계에 따라 조형되어야 한다는 로크John Locke의 시각과 다른 '루소적' 관점에서는 개인이 가지고 태어난 자연스러운 본성이 드러나고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많은 사적 단체가 주도하는 교육과 공적 책임으로서의 교육의 축
역사적으로 교육은 주로 사적인 일이었다. 세계 최초의 공립학교인 미국의 공립 초등학교는 19세기 중엽에야 설립이 추진되었다.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공교육은 분명 20세기의 현상이다. 오늘날 공교육은 독립적이고 비영리적으로 운영되는 종교적・비종교적 학교를 선호하는 사람이나 사기업이 학교를 운영하길 바라는 사람들 모두에게서 공격을 받고 있다. 이와 달리 제퍼슨주의적 관점에서는 교육이 공적 책임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지역사회가 비용을 지불하고 그 사회 구성원들에 열려있으며 공동체의 이상과 가치를 보전하고 전달하는 데 헌신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 견해는 미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제는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실제로 대학 수준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학문을 무시하거나 융합하는 교육과 학문의 통달을 강조하는 교육의 축
오늘날 학문이라는 개념은 많은 지역에서 비난을 받고 있다. 구식이고, 강압적이며, 문제 중심 교육이나 주제 중심의 교육과 조화되지 않고, ‘한물간 백인 남성’pale male stale의 영역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최소한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는 그 학문의 개념을 교육과정에서 무시하거나 학생들에게서 차단하고, 학생들 자신의 호기심에 따르도록 하는 편이 낫다고들 한다.
이와 대비되는 견해에서 학문은 인간의 중요한 업적을 나타낸다. 흔한 비유를 빌자면 학과목으로 인해 “인간은 야만인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모든 학문에는 진리, 아름다움, 도덕성 중 하나 이상이 내제되어 있다. 특히 문제의 틀을 잡고 접근하는 방법에 녹아 있다. 학생들은 그 시대에 맞는 학문 분야와 기술에 통달해야 한다. 종국에 학문의 단점을 발견하고 그 결점을 피하거나 초월하는 데 성공하게 될지라도 말이다.
평가를 최소화하거나 비판하는 교육과 평가와 사정査定에 뿌리를 둔 교육의 축
모든 학생, 선생님, 교육 행정가는 시험을 좋아하지 않는다. 공립학교마저 일반적으로 시험을 필요악으로 여긴다. 요즘 시험에 대해 학교 내외에서 상당한 논란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평가란 필연적으로 부당한 것이라서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주의 깊게, 개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정반대의 견해는 평가를 모든 배움의 본질적이고 긍정적인 측면이라고 해석한다. 교사를 비롯한 능숙한 전문가들이 끊임없이 평가에 참여하는데 그들은 평가가 때로 보상을 받는 경험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평가받는 이들은 문제를 발견해 스스로 해결책을 고안해내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기술이 향상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학생들에게 처음부터 평가가 있음을 알려야 하고, 평가는 교육의 일부분이 되어야 하며, 학생들은 가능한 한 빨리 (자기)평가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상대적이고 개별성이 고려된 기준과 보편적이고 높은 기준의 축
오늘날 어느 누구도 기준 그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이러한 의견일치는 바람직할 것이다. 정치인들, 사업가들, 부모들, 교육자들은 누가 가장 자주 적극적으로 기준을 적용하거나 언급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경쟁한다. 그러나 기준을 옹호하는 의견에도 서로 다른 갈래가 있다. 불쾌한 기준이나 자존심 손상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기준은 부드럽게 제시되어야 하고, 학생의 능력이나 목표를 고려해 끊임없이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는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교사와 학생들에게 어떤 결과를 부여하기 전에, ‘배움의 기회’를 모든 학교와 지역사회에 동일하게 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융통성은 없지만 보편론적인 접근에서는 모든 학생들에게 명확하고 높은 기준을 밝히고 그러한 기준에 계속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학생들이 그것을 달성하도록 특단의 노력을 기울이며, 기준이 충족되지 않을 때의 결과를 명백하게 설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학생들이 그러한 기준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고 그 기준으로 그들을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들이 논의될 것이다.
과학기술을 소개하는 교육과 인간적 측면을 강조하는 교육의 축
특히 사업가들이나 정치인들은 기술을 구원자로 여긴다. 기술을 통해 결과적으로 교육을 전문화할 수 있고, 모든 학생들을 열성적인 학습자나 최소한 효과적인 학습자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 많은 인본주의자들은 기술의 발전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사회가 이미 비인간화되었고, 컴퓨터는 인간적인 측면의 종말을 앞당길 뿐이라고 말한다. 교육은 반드시 인간과 인간 정신의 독특한 속성 사이에 소중한 결속을 형성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현대판 러다이트Luddite(영국 산업혁명 당시 기계화, 자동화에 반대해 기계 파괴 운동을 주도했다)들은 과학기술이 다른 영역을 침범하지 말고 자기 자리를 확고하게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각 입장의 이러한 이율배반적 측면에 관한 나의 생각은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넓이보다는 깊이를, 축적보다는 구성을, 지식의 유용성보다는 지식 자체의 추구를, 획일적인 교육보다는 개별화 교육을, 공적인 목적을 갖는 교육을 선호한다. 또한 교사 중심의 교육보다 학생 중심의 교육을 선호하고, 발달적 차이와 개별 차이를 배려하는 교육을 지지한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내가 교육의 장에서 리버럴하고 진보적인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학문에 뿌리를 둔 교육 또한 좋아한다. 그런 교육에서는 학생들을 정기적으로 평가하고 학생들의 학업 수준이 높은 기준에 도달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나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진영에 서 있다.
마지막으로, 과학기술에 관해서는 정확하게 중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신기술은 놀라운 가능성을 약속하지만 그것을 목적보다 수단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필은 스펜서의 아름다운 소네트를 쓰는 데도 사용되지만 다른 사람의 눈을 찌르는 데도 사용할 수 있다. 컴퓨터는 반복 훈련을 하여 질리게 하는 방식으로 교육내용을 전달할 수도 있고, 과학적 수수께끼에 흥미를 북돋울 수도 있다. 또한 교육이나 계몽을 할 수도 있고, 즐거움이나 가르침을 줄 수 있으며, 감각을 무디게 할 수도, 소비지상주의를 자극할 수도, 인종적 고정관념을 강화할 수도 있다. 인터넷은 활기차고 건설적인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개인을 동료에게서 고립시켜 둔감하게 만들 수도 있다. 심지어 증오를 조장할 수도 있다.
나는 더 적절한 시기에 이 조정된 입장과 관련해 다양한 교육자 및 학부모들과 연대하게 되기를 바란다. 논란이 더욱 격렬해져 논란 자체가 힘들어지는 순간이 오면 모든 분노가 나에게 향할까봐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감내해야 할 몫일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과거를 돌아보고 광대한 공간을 가로질러 모든 곳을 조망해보면, 우리는 교육의 중요하고도 보편적인 목적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가치를 전달하는 것, 역할을 모델화하는 것, 표기법과 학과목에 통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인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을 무시하는 것은 새로운 시대와 세계를 내다볼 때 어리석은 일이다. 또한 이미 명백하게 진행되고 있는 큰 변화와 교육 및 학교 수업에 앞으로 틀림없이 영향을 끼치게 될 많은 커다란 변화들을 무시하는 것도 역시 근시안적인 생각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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