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좋으면가끔 찾아와 물들이는 말이 있다두레박 만난 우물처럼 빙그레 퍼져나가는 말전생만큼이나 아득한 옛날 푸른 이파리 위에붉은 돌 찧어 뿌리고 토끼풀꽃 몇 송이 얹어머시마가 공손히 차려준 손바닥만한 돌 밥상 앞에서이뻐, 맛있어, 좋아,안 먹고도 냠냠 먹던 소꿉장난처럼덜 자란 풀꽃 붉게 물들이던 말덩달아 사금파리도 반짝 빛나게 하던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말한 게 다인 말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말나만 얻어먹고 되돌려주지 못한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붉은 돌에 오소록 새겨진
어진내에 두고 온 나지금도 청천동 콘크리트 건물 밖에는 플러그 뽑힌 채 장대비에 젖고 있는 도요타 미파 브라더 싱가 미싱들이 서 있죠 나오다 안 나오다 끝내 끊긴 황달 든 월급봉투들 무짠지와 미역냉국으로 빈 배 채우고 있어요 얼어붙은 시래기 걸려 있는 담 끼고 굽이도는 골목 끝, 아득하고 고운 옛날 어진내라 불리던 인천 갈산동 그 쪽방에는 연탄보다 번개탄을 더 많이 사는 소녀가 살고 있네요 야근 마치고 돌아오면 늘 먼저 잠들어 있는 연탄불 활활 타오르기 전 곯아떨어지는 등 굽은 한뎃잠배추밭에 배추나비 한가로이 노닐던 가정동 슬라브집 문간방에는 사흘 걸러 쥐어터지던 붉은 해당화가 울고 있어요 지금도 들리는 아이 울음소리 듣지 않으려 귀 딱고 이불 속에 숨어있다 저도 몰래 뛰쳐나가 패대기쳐진 여인과 아이와 한 덩어리 된 어린 여자 눈물방울이 아직도 흙바닥에 뒹굴고 있을까교도소가 마주 보이던 학익동 모퉁이 키 낮은 집 흙벽 아궁이가 있던 옛 부엌엔 전단지 속 휘갈긴 어린 해고자 메모 '배가 고파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요' 애호박 몇 조각 둥둥 떠다니는 밀가루죽이 아직도 부글부글 끓고 있는 효성동 송현동 송림동 바람 몰아치던 주안 언덕배기 그 작고 낮은 닭장집 창문마다, 한밤중이면 하나둘 새어 나오는 쓸쓸하고 낮고 따스한 불빛이상하기도 하죠 스무 해 전에 도망쳐 왔는데아직도 내가 거기에 있다니내가 떠나온 그곳에 다른 내가 살고 있다니요푸른 작업복에 떨어지는 핏방울아직도 머리채 잡혀 끌려가고 있다니앞으로 달려온 줄만 알았는데제자리에 선 뜀박질이었다니요
피에타인천항에서 낯선 이 포구까지오는 데 수십 일이 걸린데다그 사이 몸은 다 식고손톱도 다 닳아졌으니삼도천이나 건넜을까 몰라구조된 것은 이름, 이름들뿐네 누운 이곳에네 목소리는 없구나집에 가자 이제집에 가자(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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