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늦는 것은 엄마 때문?
노래와 그림책의 홍수 속에서
어린 손자들이 집으로 놀러 오면 남편과 나는 아주 기뻐하며 함께 논다. 그리고 때때로 ‘현대를 살아가는 아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현대를 살아가는’이라는 말이 얼마나 과장인가, 하고 스스로도 생각하지만 이는 내가 할머니이기에 실감하는 것이다. 요즘은 아이로 사는 것도 보통일이 아닌 듯하다. 물론 어느 시대에나 그랬을 테고, 결코 아이 자신이 ‘보통일이 아니구나’ 하고 느끼면서 살지는 않는다.
내 아이들이 어린 시기를 보낸 지도 벌써 30년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무엇이 바뀌었나를 보면, 아이를 둘러싼 정보와 소비재의 양이 압도적으로 늘어난 것이 가장 눈에 띈다. 게다가 세상의 속도는 너무나 빠르다. 아이는 자신이 태어난 사회에서 넘쳐나는 자극의 무리를 계속 열심히 받아들이며 세상에 몸을 맞춰간다. 어린아이라도 결코 여유롭게 있을 수 없는 것이 지금의 일본 사회이다.
아이와 지내는 시간이라고 하면 나는 노래가 먼저 떠오르고, 그다음이 그림책이다. ‘아이를 위해서’ 같은 훌륭한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내가 그것들을 매우 좋아하는 것뿐이다. 아들들의 어린 시절에 나는 아이를 핑계로 새로운 노래를 배워서 같이 부르는 것이 즐거웠다. 어른이 혼자 노래를 부르면 다소 민망할 수도 있지만, 아이와 함께라면 어디든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림책 읽기도 때로는 나를 위한 오락이어서 마음에 드는 그림책을 마음껏 봤다. 아이도 나도 서로 같이 읽고 싶어 하고, 내가 좋아하는 세계를 당당하게 즐길 수 있기에 아이는 진짜 고마운 존재이다. 게다가 아이와 함께 있으면 어른은 자주 웃는다. 웃을 수 있다는 것 또한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한 세대가 지나고 나니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먼저 동요의 수가 너무나도 많아서 놀라고 만다. 텔레비전의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도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새로운 것으로 바뀐다. 지금도 가끔 재방송하는 뮤지컬 인형극 〈횻코리효탄지마ひょっこりひょうたん島〉와 SF 시리즈 〈선더버드サンダーバード〉의 주제가를 6개월에서 1년이나 반복해서 불렀던 30년 전과는 다르다. 여유로운 동요가 사라져간다. 더구나 요즘 노래들은 길고 복잡하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빠른 가사와 반음계만으로 이루어진 ‘이 달의 노래’를 내가 겨우 외우면 다음 달 노래가 나온다. 아이를 위한 노래도 어른을 위한 노래와 똑같이 점점 빠르게 소비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들은 순수한 생명체이기 때문에 몸을 빠르게 바꿔 그 흐름을 탄다. 하지만 말과 멜로디가 너무 피상적이어서 몸이 거기에 익숙해질 여유가 없는 것 같아 염려된다.
유일하게 거의 매일 텔레비전에서 틀어주는 곡은 NHK의 프로그램 〈엄마와 함께おかあさんといっしょ〉에 나오는 체조 노래 〈아・이・우あ·い·う〉이다. 손자는 이 노래를 특히 좋아해서 작은 손을 한껏 펼친 채 ‘아 이 우 에 오!’라고 외치며 온 힘을 다해 뛰어오른다. 시내에서 서점 앞을 지나가다 이 방송 캐릭터들이 나온 유아 잡지의 표지를 보면 쪼그려 앉아 질리지 않고 쳐다본다. 아이는 이렇게 좋아하는 세계를 반복함으로써 생활에 자신을 붙들어 매고 안도감과 안정감을 얻으려고 하는데, 계속되는 강한 자극의 파도가 아이를 휩쓸어간다.
아이의 말이 늦는다고 하는데…
이런 세상에서 자라는 아이들과 30년 전 아이들의 차이를 몇 가지 발견했다. 하나는 아이들이 말을 시작하는 시기가 대체로 늦어졌다는 것이다. 내 아들들 세대는 대개 첫돌 무렵이면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다르다. 가전제품의 스위치나 기계의 작동법에 대한 이해는 빠르지만 말은 늦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말을 일찍 하는 것이 좋다거나 늦는 게 문제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말을 시작하는 시기가 늦춰지는 현상이 사회의 변화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손자도 한 살 반 무렵에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30년 전의 아들들과 비교해보면 늦은 편이다. 그런데 아이 엄마는 “같은 무렵에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에서는 빠른 편이 아닐까요?”라고 말한다. 물론 공원에서 만나는 손자의 놀이 친구들 가운데에는 두 살이 넘어도 말을 거의 하지 못하고 손짓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아이도 있다. 그런 아이들의 엄마들은 자꾸만 걱정한다. 대부분의 육아 관련 책과 모자수첩의 발달 평균치에는 옛날과 똑같은 발달 기준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육아 상담 등에서는 이 현상을 사회 변화의 문제로 보지 않고 “엄마가 아이한테 말을 거는 것이 부족한 게 아닙니까?”라는 등 엄마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는 건 아닌지 마음에 걸린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일본의 시사주간지 《아에라AERA》에서 〈그림과 아이의 말, 충격〉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배경에는 부모가 아이에게 말을 적게 건다는 이유가 숨어 있다”는 제목이 나오고, 주로 부모를 탓한다. 기사에는 최근 ‘새로운 유형의 언어 지체’ 현상이 눈에 띈다는 지적과 함께 이에 대한 어느 대학병원 소아과 의사의 견해를 실었다. 그는 “아기가 울면 부모가 어른다. 부모가 웃으면 아이도 웃는다. 그런 쌍방향의 ‘응답적 환경’이 상대방의 표정에서 마음을 읽어내는 힘과 이야기하는 힘을 키웁니다. 그러나 텔레비전으로 대표되는 일방통행의 자극은 그 ‘응답적 환경’을 빼앗습니다. 그것이 원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텔레비전과 비디오 시청이 불러오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 뒤에는 좀 더 큰 사정이 있다. 언어 말고도 아이가 습득해야 할 대상이 급증했다는 사실이다. 즉, 생활 속에서 익히려고 하는 것, 게다가 익히기 쉽지 않은 것이 아이 주위에 너무나 많다는 말이다. 어느 스위치를 누르면 무엇이 움직이는지, 어느 버튼을 어떻게 누르면 소리가 커지는지, 텔레비전의 내용을 보기 전에 먼저 화면과 버튼의 관계를 알려고 한다.
손자도 우리 집에 오면 언제나 그랬다. 아이가 돌아가고 난 뒤에는 여기저기 스위치가 눌러져 있고, 다이얼이 돌아가 있었다. 갑자기 난방이 안 돼 급하게 알아보면 어느새 스위치가 냉방으로 가 있기도 했다. 아이는 스위치가 기기를 작동하는 핵심임을 아는 것이다. 만지면 야단을 맞는 컴퓨터로 어른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한 것이다. 아이는 앞으로 살아갈 사회에서 컴퓨터가 중요한 것 같다는 냄새를 맡는다. 어느 세 살배기 여자아이가 아버지의 컴퓨터를 만지고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화면을 원래대로 돌려놓아서 부모는 이 아이가 천재가 아닌가 하고 놀랐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부모와 대화를 나누지 않고도 직접 보거나 해봄으로써 알고 익힐 것이 일상생활에는 얼마나 많은가.
수동형을 강제당하는 삶
아이나 어른에 상관없이 인간의 용기는 대체적으로 일정하다. 하루에 쓸 수 있는 분량이 대개 한정돼 있다. 사람은 우선순위에 따라서 당장 필요한 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다른 것은 뒤로 돌린다. 지금 아이들에게는 틀림없이 말을 하기 전에 많은 ‘일’이 있었던 것이다. 말이야말로 중요하다는 것은 어른들의 기준이고 아이는 아이대로 사정이 있다.
앞에서 말한 《아에라》 기사에 따르면, 어느 조사에서 생후 1년 6개월 된 아이 500명을 대상으로 알아보니 40퍼센트가 다섯 단어 이하를 말하고, 5퍼센트는 한 단어도 말하지 못했다. 이 결과는 학계의 통설(1년 6개월 무렵 20단어 이상이라는 기준)을 크게 밑돈다고 한다. 아이의 말이 늦는 현상이 전체적인 경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상대방이 하는 말을 대략 이해하지만, 말하기라는 과제에 힘쓸 여유가 자신에게 좀처럼 오지 않는다. 들려오는 노래는 자꾸 바뀌고, 새로운 그림책과 장난감에도 적응하고 싶다. 처음으로 보는 것이 계속 나타난다. 아이는 말을 시작하기 전에 매일 새로운 자극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말하는 것을 뒤로 미루고 있는 아이의 속사정이 아닐까? 받아들일 자극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수동적인 자세를 강요당하는 것이다. 스스로 능동적으로 해볼 기회를 빼앗기고 아이는 정보의 바다에 빠진다. 우리 어른은 아이의 말이 늦다고 걱정하고 그것을 엄마들의 책임으로 돌리기 전에 자신들이 만든 이른바 ‘풍부한’ 시대가 아이를 수동적인 존재로 몰아간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어른과 아이만의 일이 아니다. 초등학생, 중학생과 청년들의 ‘학력 저하’ 문제도 유아의 말이 늦어지는 원인과 아주 비슷하다. 대학생들에게 “이번에 찾아뵙겠습니다”를 한자로 쓰게 하니까 어느 학생이 “近藤がいます”(이 문장을 발음 그대로 읽으면 ‘곤도라는 성의 사람이 있습니다’라는 이상한 의미가 된다)라고 써서, 이를 한탄하는 이야기를 읽었다. 그 대학생은 ‘찾아뵙는다’라는 경어를 몰랐던 것이다. 아마 연장자를 접할 기회가 적었던 탓이리라. 그것을 쉽게 ‘학력 저하’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아이와 젊은이가 지금 사회에서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고 있는지, 우리 어른은 좀 더 겸허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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