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변방의 중심, 거창의 역사
거창지역어의 특이성, 지역사의 독립성
김태순과 최남식은 오랫동안 거창지역의 역사를 연구하였다. 20세기 후반 이곳 지역사 연구는 이 두 사람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거창박물관은 1980년대 이들의 소장품 기증을 계기로 설립되었다.
1970년대 향토사학자 김태순은 거창지역어를 조사하였다. 그는 국어사전의 표제어에 대응하는 지역어를 하나하나 찾아서 기록하였는데 그 어휘 항목이 무려 2,000여 개에 달한다. 그의 선구적인 작업은 국어학자들의 이곳 지역어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1987년 「거창지역어의 음운 연구」라는 박사학위 논문이 나왔고, 그밖에도 몇 개의 석사학위 논문, 학술논문이 있다. 그들은 이곳 지역어가 지닌 특이성에 주목하고 그 음운의 형성과정과 변화를 분석하였다.
연구의 공통적인 결론은 거창지역어가 특이하다는 것이었다. 지역어의 모음 변화는 “거창어가 겪는 특이한 변화”이고, 전설모음화도 “특이한 변화”를 겪었으며, 모음역순동화는 다른 방언과는 다른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거창지역어는 서부경남 지역어로 분류하기 어려울 정도로 특이성을 지녔다. 거창지역어의 특이성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언어는 오랜 역사의 산물이므로 거창어의 특이성은 곧 거창역사의 독립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곳 지역민들이 최초로 독립성을 확보한 것은 고대 거열국의 건국이었다. 당시 지역민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영역에서 독립성을 유지하였다. 지역민의 동질성은 이때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거창지역어의 특이성, 거창역사의 독자성은 이때 형성되었다.
6세기 거열국의 멸망 이후 이 지역은 중앙정부에 복속되었는데 항상 변방이었다. 수도권에서 보아도, 진주권에서 보아도, 대구권에서 보아도 마찬가지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이곳이 귀양지였을 정도로 변방이었다. 이때부터 지역민은 중앙권력과 특별한 관계 속에 들어갔고, 중앙권력–지역세력–지역민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었다.
거창지역사에서 중앙정치의 변동은 바다에서 이는 크고 작은 파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 심연에는 역사의 거대한 태풍에도 거의 동요되지 않고 지속되는 지역의 향촌세력, 대응논리, 고유문화가 있었다. 지역사의 장기지속성! 그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주인공이 역사에 등장하였고 시대마다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곳은 중앙권력이 볼 때 변방이었지만 거창역사의 주인공은 항상 지역민이었다. 이것이 지역사가 따로 서술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토박이와 외래인, 지역사의 주인공
조선 말기 81세의 나이로 이곳에 이주한 인물이 있다. 경상북도 각산 출신의 장복추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피해 가조의 당동으로 이주하여 1899년에 숨졌다. 그는 ‘영남의 삼징사’로 불리는 당대 영남의 대표 유학자였다. 그가 이곳에 오자 지역 인사들은 크게 환영하였다. 그의 주위에 지역 인물뿐만 아니라 삼남의 유학자들이 몰려들었고, 장복추는 그 문인들로 관선계를 조직하였다. 그 규약에는 “학문의 시작은 경건하고, 그 파함은 태만을 경계하며, 서로에게 선을 권함에 있다.”고 하였다. 관선계 명단에는 윤주하, 변계석, 오종영 등 약 250명이 기록되어 있다. 장복추는 5년이라는 짧은 기간 이곳에 거주하면서 많은 문인들을 거느렸던 특이한 인물이었다.
장복추가 큰 인망을 얻은 것은 성리학자로서의 학행에 있었다. 그는 짧은 기간 이곳에서 인생의 말년을 보내면서 의미 있는 저술을 남겼다. 예컨대 그는 『거산설』에서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궐기하자 일제를 비판하면서도 “병법에 어두운 자신과 같은 사람이 전쟁에 관여한다면 백성에게 화를 입히게 될 것이다.”라는 독특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장복추보다 조금 일찍 이곳으로 이주하여 그와 교류하였던 곽종석은 의병봉기에 대해서 “의병봉기가 고종에게 누를 끼칠 것”이라며 거병을 거부하였다. 장복추와 곽종석은 외래인으로 조선 말기 이 지역의 유학사상을 대표하였다.
이 지역의 토박이와 외래인은 누구였을까? 1997년에 발간된 『거창군사』는 입향조를 조사하여 기록하였다. 읍 지역에는 고려시대에 정장리에 정착한 유향귀를 포함한 40명이 기록되어 있다. 각 면별로 입향조를 보면 주상면 22명, 웅양면 17명, 고제면 20명, 북상면 45명, 위천면 50명, 마리면 67명, 남상면 48명, 남하면 25명, 신원면 7명, 가조면 36명, 가북면 32명 등이다. 여기에 기록된 입향조만 총 400명이 넘는다. 이들은 대소문중을 이루고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현재 토박이는 대체로 이들의 후손들이다. 이렇게 보면 토박이들도 한때는 외래인이었다.
현대 산업사회가 진전되면서 거창지역민의 이농이 심해졌다. 게다가 정치·경제적으로 출세한 인물들이 대부분 고향을 떠남에 따라 인재층이 얇아졌다. 고학력 지식인들이 고향에 머무르는 경우는 드물었다. 거창지역사를 통틀어 보아도 현대만큼 지식층이 빈약한 때는 없었다. 각급 학교의 교사·교수직은 지식인이 거창지역으로 들어오는 주된 창구였고 그들이 지역의 지식층으로 자리 잡았다.
이 지역으로 이주했던 인물들은 종종 지역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곤 하였다. 거창고등학교를 일으킨 전영창 교장이 대표적이지만 외래인의 공헌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거창고등하교 교사로 왔던 정찬용 선생이 있었기에 거창YMCA가 출범했고, 거창대성중학교 교사로 왔던 이종일 선생이 있었기에 거창국제연극제가 가능했으며, 도립거창대학교 하종한 교수가 있었기에 지역의 문화유산을 총정리한 『거창의 문화유산』이 발간될 수 있었다.
외래인이 지역사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새로운 눈으로 이 지역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토박이라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지역의 장점을 발견하고, 여기에 전문가의 능력을 가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였다.
지역사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수천 년의 지역사에서 끊임없이 외래인이 들어와 토박이가 되었으며, 토박이와 외래인은 항상 지역사의 주인공들이었다.
애국자와 매국노, 사실을 찾아서
한겨레 티브이hanitv는 2012년 “코리안 헤리티지”라는 영상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 프로그램은 전국 각지의 문화유산을 소개하는데, 그중 1회와 2회는 이 지역을 다루었다. 이 프로그램을 본 지역민이라면 향토에 자부심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외지인들에게 한번 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코리안 헤리티지 제1회의 주제는 “거창의 선비정신을 만나다”이다. 그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정온고택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위한 장소가 되기도 했다.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이 이 집에 머물면서 의병운동을 도모했던 곳이다. 이강은 1909년 이곳에 40일간 머물렀는데 이 현판의 글씨기 의친왕의 것이다. 사선대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이다. 동계고택을 찾은 의친왕은 사선대에서 청년들을 모아 의병의 근거지로 삼으려고 했다.
이 부분은 제1회 프로그램에서 옥에 티이다. 해설은 1909년 정온고택의 주인 정태균이 마치 의친왕 이강과 함께 의병운동을 도모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오히려 정태균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위천에 온 일본군에게 이 집을 작전본부로 제공한 바 있었다. 조재원은 “거창지역 항일운동과 사선대의 진실”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사실을 규명하였다.
『거창군사』의 기록에 따르면 “1909년 10월 위천의 전 승지 정태균을 방문하여 한 달 동안 머물면서 이 지방의 뜻있는 우국청년들과 접촉하고 북상의 사선대 일대를 장차 의병의 근거지로 삼으려고 준비를 하다가 일제에 탄로되어 서울로 호송되었다.”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거창군사』의 기록은 사실이 아니다. 실제 의친왕 전하가 거창을 방문하여 사선대를 의병의 근거지로 삼으려고 접촉했던 인물은 독립지사 임필희 선생이다. 하지만 정태균은 독립운동과는 전혀 무관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1935년 발간된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표창자명감’이라는 자료에는 정태균의 주요 경력이 실려 있다. 이 자료에는 “정태균이 1909년 폭도(의병)가 각지에서 봉기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위천면에 (일본군)수비대가 파견되자 이들에게 주택을 개방하고 임시 막사를 제공”했다고 기록돼 있다.
한겨레 티브이는 본의 아니게 역사를 왜곡한 셈이다. 그것도 친일파를 독립운동가로 탈바꿈시켰으니 보통 오류가 아니다. 한겨레 티브이는 이 프로그램의 내용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왜 이와 같은 오류를 범했을까? 역사왜곡의 책임은 한겨레 티브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창군사』의 오류가 그 근거를 제공하였다. 사실을 올바로 인식하는 것은 지역사 연구의 첫걸음이다.
『거창군사』 소송사건, 지역사를 보는 시각
1997년 거창문화원은 『거창군사』를 발간하였는데, 무려 1,9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 책은 자연환경, 역사적 변천, 효열·누정·비석·재·당·원·사, 문화재, 민속 문화, 문화·체육, 종교, 관광·명승지, 군세 등을 포괄하고 있다. 가히 지역사를 비롯하여 지역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불행히도 문화원이 심혈을 기울여 편찬한 『거창군사』는 법정소송에 휘말렸다. “『거창군사』에 대한 판매 및 배포 중지 및 개정을 요구하는 법정제소가 거창군연편록위원 8명의 연명으로 제기되었고, 대법원까지의 최종 심급 과정을 거쳐 최종심인 대법원에서 ‘이 사건 신청을 모두 기각한다.’는 주문의 판결로서 일단락되었다.”고 한다.
문화원은 이후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에 거창군사검증학술연구 용역을 맡겼다. 그리고 거창군연편록위원회, 관련문중관계자, 문화원향토사위원을 중심으로 위원회를 조직하여 용역 결과와 연편록, 기타 제기된 문제를 검토하여 2009년 『거창군사 보정자료』를 펴냈다. 보정자료집을 보면 보정자료 총 251개 항, 정오표 252개, 향후 검토자료 13건에 달하였다.
방대한 책을 내다보면 작은 오류나 체제상 중복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정작 이 소송사건의 심각성은 다른 곳에 있다. 『거창군사』에 대한 논란은 주로 자기 가문 인물의 지위, 역할, 충성 등이 빠졌거나 축소 서술되었다는 지적이었다. 족보적 시각이다. 연편위원 쪽은 전근대 시각에서 소송을 제기했으니 이 소송에서 패하는 것은 애초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거창군사』 소송사건은 17세기 거창향안 절취사건 이후 지역사 최대의 역사 싸움이었다. 그 성격도 3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동일했다. 시대착오이다. 이 때문에 역사학계에서는 ‘향토사’ 대신 ‘지역사’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리고 향토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학자들도 지역사연구로 접근하고 있다.
현대는 왕조시대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시대이다. 신분제 문중의 시대가 아니라 평등한 민주주의 시대이다. 거창인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거창군에 사는 사람들이다. 민주주의 시대에는 그에 걸맞은 역사서술이 있다. 역사의 평가도 달라진다. 조선시대의 충신이나 역적은 더 이상 현대의 충신이나 역적이 아니다. 조선시대 지역 최고의 ‘역적’ 정희량은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권력다툼의 주인공일 뿐이며, 반란을 진압한 조선의 ‘공신’이 꼭 현대의 공신은 아니다. 조선시대 열녀를 기준으로 오늘날 젊은이들의 연애를 ‘부정한 짓’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거창군사』 소송사건은 역사서술의 시대착오가 불러일으킨 해프닝이다. 현대인들은 더 이상 조선시대의 봉건적인 시각으로 역사를 보지 않는다. 민주주의 시대에는 민주주의의 눈으로 지역사를 볼 일이다.
보편성과 특수성, 거창사를 한국사에 비추다
지금까지 거창지역사의 편찬 주체는 거창문화원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문화원은 오랫동안 향지, 군사, 읍지, 총서 등 비중 있는 책들을 편찬해왔다. 여기서 발간된 각종 향토사와 관계 자료는 지역사연구의 기초사료이다.
역사연구에는 엄밀한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역사의 진실은 정확한 사실 속에서만 밝혀진다. 이 책에서는 검증된 사료만 사용하고자 하였다. 문집, 족보 등의 향토자료는 논증된 것이 아니면 사용을 자제하였다. 비록 논문으로 발표된 사실이라도 반론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으면 제한적으로 이용하였다. 그리고 고증된 사료를 한국사에 비추어 재해석하였다.
역사학은 시간과 변화를 다루는 학문이다. 지역사 연구는 지역과 지역인들의 변화과정을 추적하는 일이다. 지역사 연구목적은 역사 속에서 형성된 지역과 지역인의 특성, 곧 정체성을 밝혀내는 것이다. 지역인의 정체성은 그들의 사고방식이자 활동양식이므로 그것을 알 때 지역인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지역사의 성격은 한국사에서 지역사가 가지는 특성을 통해 발견된다. 지역사는 한국사의 일부이므로 한국사와 공통점을 갖지만 동시에 지역사만의 특징도 있다. 이러한 지역사의 특징에 주목하면 지역, 지역인, 지역역사의 성격이 드러난다.
이 책은 한국사의 보편성 위에서 거창역사의 특수성을 밝혔다는 점에서 기존 역사서와 뚜렷이 구별될 것이다. 기존의 책들은 대체로 지역, 문중, 인물과 그 위대성을 찾아내는 데 중점을 두었다. 반면 이 책은 특정 가문이나 특정 인물의 위대함을 따지지 않았다. 지역의 모든 인물과 사건이 지역사의 주인공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수만 년의 역사에서 어찌 이 지역에 훌륭한 인물, 위대한 일만 있었겠는가. 현대 역사학에서 보자면 충신과 역적, 애국자와 매국노, 양반과 평민, 남자와 여자 등 모든 인물, 경사스러운 일과 비극적인 일, 특별한 사건과 일상생활 등 모든 사건은 지역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을 한국사에 비추어 거창지역사의 독특한 성격을 밝힌 것이 이 책이다.
이 책은 한국사의 지평에서 지역사의 특징에 주목하여 거창인의 출발, 거창지역의 전통, 중앙권력과 외세에 대한 거창인의 태도, 근현대 거창인의 활동양상을 추적하였다. 이를 통해 ‘거창이 어떤 곳인지, 거창인이 누구인지’를 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가능한 한 역사에 대한 평가를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려고 하였다.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거창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독자가 거창사에서 발견한 이 지역의 정체성이다.
이제 거창과 거창인의 뿌리를 찾으러 떠나보자.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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