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시계를 자주 보십니까?
A “단풍 들 때 봐!” “첫눈 내릴 때 전화해.” “해질 무렵 보러 갈게.” “문득 만나.” 내가 좋아하는 약속의 말들이다. 좋게 말하면 무심, 적나라하게 말하면 무책임해 보이는 말들… 그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은 단연 ‘문득’이다. 문득 누군가 보고 싶고 문득 전화를 하고 문득 떠나고 문득 돌아온다. 이기적이다. ‘문득’이란 시간 체험은 몹시 주관적인 거니까. 오직 홀로된 자신만이 문득의 시간을 안다. 쯧쯧. 이러니 애초에 ‘사회생활’이란 내게 그림 속의 ‘네온사인 피는 도시’인 것이다. 그 도시를 열렬히 원해본 기억도 실은 없지만, 그 도시가 이런 나를 순순히 받아들여 줄 리도 만무. 그러니 혼자서도 잘 놀 수 있는 작가가 장땡이다.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대도시 출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글쟁이로 여러 해 살다 보니 이제 도시의 시간은 적당히 나를 포기해주었다. 저 좋을 때 ‘문득’ 나타나고 사라지는 일에 굳이 부연설명 하지 않아도 되어 참 좋다. “작업 중이야.” 그걸로 구구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과분한 삶. 시계를 자주 보지 않아도 되는 삶. 아유, 감사해라.
Q 천사를 만난다면 인간으로서 자랑하고 싶은 것은?
A “(당신이 ‘말 그대로’ 천사라면) 당신은 당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겠군요. 아유, 심심하겠어요! 인간은 종종 죽음을 생각하며 삶의 황홀을 맛보죠. 죽음 때문에 우리는 자주 쓸데없는 생각에 빠진답니다. (정말 황홀한 건 ‘쓸데없는 짓들’에서 종종 출발하죠.) 어떻게 죽는 게 ‘잘’ 죽는 것일까. 어떻게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을 것인가.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을 것인가. 죽음을 사유할 필요가 없다면 철학하기는 힘들겠고 문학하기는 더욱 힘들겠고 죽은 것들이 어떻게 산 것으로 몸 바꿔 입는지 실감하기란 애당초 어려울 테니, 어째요, 심심해서, 어찌 천사의 삶을 견디죠?”
Q 세계 역사에서 기억하고 싶은 명장면이 있습니까?
A 헉! 무엇이 ‘세계’이지? 뜨아! 무엇이 ‘세계 역사’이지? 알 수 없다. 데이터를 끄집어내 보려고 눈썹을 모으고 ‘생각하는 사람’ 자세로 동공의 초점을 모은다. 아아 도대체 생각할수록 미궁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날마다 새로운 세계가 탄생하는데. 날마다, 달마다, 유정한 모든 순간들마다 전혀 새로운 세계가 불쑥 태어나 생로병사하는데. ‘지금 이 순간’만이 세계인데. 역사라고? ‘순간’들이 퀼트처럼 이어 붙여진 그거 말이지? 한 조각의 순간밖에 실은 없는, 무정한, 유정한 그 조각보들. 조각보는 한없이 크고 넓게 끝없이 이어붙일 수 있고 내 손길은 몇 개의 조각을 이어붙이다 사라질 텐데. 끝이 안 보이는 조각보 저 끝에서 누군가 방금 이어붙인 조각을 향해 아침인사하고 싶어지는 내가 있다면 하! 참 기특하지. 당신, 당신, 당신들인 나, 나, 나에게 인사할래요. 사랑하는 당신이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쉰 바로 그 순간, 그 ‘명장면’을 기억하고 싶어요!
Q “나는 고발한다”라고 외치고 싶은 사건이 있습니까?
A 이 질문지를 받은 2009년 11월 22일. ‘4대강 살리기 첫 삽 뜨다’ 운운하는 뉴스. 부끄러움 모르는 저 언어사기를 고발하고 싶다. 엇다대고 ‘살리기’래? 녹색을 사칭한 채 돈 세는 것밖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지껄이는 언어도단에 치욕을 느낀다. 아직도 이런 반생명적 토목건설공사로 돈줄을 관리하는 이 나라의 무지와 야만. 사기죄로 고발하고 싶다. 세상에, 저렇게 작정하고 강을 죽이려드는 짓을 너네 나라 사람들은 그냥 두니? 너네 나라 학자들은 다 뭐하니? 너네 나라 작가들은 다 뭐하고 있니? ‘4대강 사업’ 때문에 졸지에 후진국의 후진 작가가 되어버렸다. 후진국이라는 거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아직도 이런 반생태적 토목공사가 횡행하는 나라니까.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야만적 수준이니까. 그런데 말이지. 정치하는 사람들이 후진 통에 졸지에 후진 작가가 되어버리는 건 억울하다. 무지하고 뻔뻔한 정책으로 시민과 작가를 통째 후지게 만드는 정치꾼들,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고 싶다.
Q 늘 해보고 싶어 하면서도 하지 못하는 일은?
A 별로 없다. 해보고 싶으면 그냥 한다.
Q 김선우의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면 무엇인지요.
A 사랑과 자유.
Q 김선우에게 행복이란 ㅇㅇㅇ 이다.
A 맘껏 사랑하고 사랑받고 자유롭고 자유롭게 하는 것. 스스로 충만한 시간을 누리고, 내 존재로 다른 누군가를 더불어 충만하게 할 수 있다면!
Q 요즘 품고 있는 고민거리나 ‘불편한 진실’은 무엇입니까?
A 갈수록 글쟁이라는 것을 축복으로 느끼게 된다. 맨몸에 펜 하나면 어디서든 무엇이든 쓸 수 있다! 멋진 일이다. 뭔가 ‘쓰고 있는 순간’을 떠올리면 행복해진다. 쓰고 있는 것을 끝내는 순간 그다음 쓰고 싶은 것이 떠올라 몸이 근질거리는 순간의 전율. 글쟁이임을 흔쾌히 긍정하는 바로 그 순간, 덜컹, 동시에 불편하다. 문학이 우리의 삶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문학을 통해 우리 삶이 어떻게 아름다워질 수 있을지, 우리 삶의 질이 문학을 통해 어떻게 풍요로워질 수 있을지, ‘나’는 어떻게 ‘우리’와 만날 것인지, 20대 초반에 품었던 질문들이 이제는 그냥 ‘문학이’가 아니라 ‘내 문학이’로 말머리를 바꾸어 내 앞에 도사리고 있다. 그렇지… 그런데… 나는 어디까지 쓸 수 있을까. 내 문학이 굶주려 병든 아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죽 한 숟갈보다 가치 있는 순간을 만들 수 있을까. 우리 앞에 버티고 선 차디찬 절망들 앞에서 내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만 쓸 뿐’이라고 우선은 대답하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