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생각해 둔 묘비명이 있습니까?
A “나는 행운아다. 다행히도 실패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실패야말로, 저항적이고 전위적인 정신을 옹호하는 예술가라면 마땅히 지향해야 하는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실패가 내포하고 있는 모독과 소외, 고독 등은 확실히 보편적 삶의 가치와 이격되어 있는 예술가의 저항을 표방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죠. 참을 수 없이 당혹스러운 것은 예술가들이 전위의 탈을 쓴 채 세상이 정해놓은 지극히 모범적인 욕망의 노선(학위, 승진 등등)을 따라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입니다.
Q 세상을 향해 “이건 진리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A 과학적 사실을 뛰어넘을 때, 모든 진리는 예외 없이 편견으로부터 탄생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습니다. 그것을 전제하고 말한다면 내게 진리는 “합리보다는 야만, 이해보다는 오해가 이 세상을 규명하는 데 훨씬 더 유효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00퍼센트 꿀은 존재해도 100퍼센트 합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Q 타임캡슐에 묻어 전하고 싶은 세 가지는?
A 수기로 쓴 내 첫 번째 소설의 초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찍은 최초의 내 사진.
어떤 내용이 담길지 나 자신조차도 알 수 없는 내 최후의 책.
Q 살기 좋은 서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 그 서울의 모습은?
A ‘살기 좋은’이라는 조건절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장자 외편』 21장 <전자방田子方>에서 묘사된 ‘풀을 먹는 짐승’이나 ‘물에 사는 벌레’처럼 도를 체득한 존재가 아닌 다음에야 누구나 자기 살림, 자기 이익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다 아는 것처럼 서울은 이미 구성원들 사이에 합의된 공동체적 정서가 완전히 붕괴된 메갈로폴리스입니다. 계급과 계층, 세대 간의 이해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도 첨예하게 맞서 있죠. 이처럼 이격된 다양한 차이들을 일시에 해소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럴 경우 ‘단순함’이 하나의 열쇳말이 될 수 있을 듯합니다. 나는 먼저 속도를 조금만 줄일 것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앞으로 내딛는 자신의 발걸음을, 두뇌의 회전속도를 감속했으면 좋겠습니다. 학교나 군대에서 단체구보를 해본 이라면 이해할 것입니다. 소수의 빠른 전열이 이끄는 구보행렬이 얼마나 공포스럽고 끔찍한 것인가를. 빠른 것은 대체로 무모하고 건방집니다. 배려와 여유, 심지어 몽상까지 모두 느린 속도에서 태어나는 것이죠. 우리는 느리게 걸으면서 꿈을 꾸고 우리의 뒷모습을 상상합니다. 그것은 성찰을 가능하게 해 다른 이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고 비로소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이해하게 합니다. 다소 추상적인 이야기지만 자신의 속도를 조금씩 줄이는 것, 그것이 살기 좋은 서울의 기본적인 바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Q 늘 해보고 싶어 하면서도 하지 못하는 일은?
A 클럽에 가서 미친 듯이 춤을 추는 것.
다소 소원한 관계인 어머니와 단둘이 여행을 떠나는 것.
내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연극 대본을 쓰고 그것을 직접 연출하는 것.
Q 김도언의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면 무엇인지요.
A 매우 고전적이지만 자유와 평등이 내가 꿈꾸는 가치입니다. 사실 인간의 삶에서 추구할 만한 가치라는 건 생각만큼 다양하지 않습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옹호하고 실천하는 나의 수단은 물론 글쓰기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교묘하고 영악한 폭력과 대면해 있습니다. 전 시대의 폭력이 누구나가 금방 그 위협을 감지할 수 있을 만큼 직설적이고 우직한 것이었다면, 현대의 폭력은 말할 수 없이 부드럽고 은근합니다. 그것은 가면을 쓰고 바이러스처럼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이성을 교란시킵니다. 정밀하고 영리한 대응-미학적 저항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나의 글은 예외 없이, 교활한 방식으로 (마치 시혜처럼) 인간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문제 삼고 이를 고발하고자 하는 내적 동기에서 출발할 것입니다.
Q 김도언에게 행복이란 ㅇㅇㅇ 이다.
A “삶이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길 바라는 것”
좀 비관적인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행복은 기실 조금 덜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얼마나 지속되느냐의 여부가 아닐까, 오래된 생각입니다.
Q 요즘 품고 있는 고민거리나 ‘불편한 진실’은 무엇입니까?
A 살아오는 동안, 공적인 인연이나 사적인 연유로 제법 많은 사람들을 만나 왔지만, 나는 그때마다 내가 사람(타인)을 불편해하는 운명을 타고났음을 확인했던 것 같습니다. 타인이 지옥일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확실히 나는 타인에 대한 경계의 정도가 좀 심한 편이었죠. 20대 초반 한때는 지독한 혐인증嫌人症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사람을 과도하게 불편해하고 경계하는 습벽이 결코 자랑할 수 없는 슬픈 괴벽임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타고난 것을 부정하거나 숨기려고 할 때, 오히려 더 큰 자중지란의 나락 속으로 빠져 들으리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죠. 자폐도 아닌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딱한 노릇입니다.
지금 와서 고백하는 것이지만 내가 사람 중에서 가장 불편해하는 부류는 남을 이기려는 사람입니다. 나에겐 그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눈빛이 불투명하고 집요하며 이기적인데, 역설적이게도 매우 의존적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의존적’이라는 말은 다시 생각해보면 역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본질적으로 타자를 제압하는 데서 자신의 존재 증명을 찾기 때문에, 대립적인 이항이 갖춰지지 않은 보편적 상황에서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모순을 의존적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남을 이기려는 부류의 사람들은 불편할 뿐만 아니라 무섭기도 합니다. 나는 지금껏 한결같이 그런 부류를 피하고 비판해왔습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유전자적 요인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 아버지는, 내 인격이 형성되던 중고등학교 시절 틈만 나면 “져주면서 살아라”고 말씀하셨거든요. 나는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외로움과 무기력의 아우라에 치가 떨렸습니다. 하지만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 이상하게 우울한 유전자에 감염되었던 것이죠. 다시 하던 얘기로 돌아가면, 내가 가장 불편해하고 무서워하는 사람은 권력을 가진 이도 아니고 지위가 높은 이도 아니고, 남을 이기려고 작심한, 혹은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작정한 사람입니다. 이미 세속적인 권력을 움켜 쥔 부류는 궤멸할 수밖에 없는 도덕적 모순을 안고 그것의 생리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 사람들(물론 예외는 있겠지만)이기 때문에 불편해하거나 무서워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냥 대놓고 무시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상대를 이기려고 작심한 이들은, 대체로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은폐하면서(마치 누우나 가젤을 잡으려고 접근하는 맹수처럼) 그렇지 않은 자의 표정을 짓습니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용의주도하게 상대를 피습하고 암살합니다. 아, 모를 것은 몰라도 좋을 텐데 그런 것이 내 눈엔 너무나 잘 띄더란 말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 내게는 너무나도 불편한 진실입니다. 가장 마음이 아픈 건, 순한 짐승 같은 사람들은 그들의 날카로운 이빨에 찔려 죽어가면서도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도통 모른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