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가장 좋아하는 어휘는 무엇입니까? 이유는?
A 특별히 어떤 어휘를 정해 놓고 남들보다 유난스레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문안에 답하기 위해 한동안 고민해 보았지만 딱히 이거다 싶은 어휘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무얼 쥐어 짤 필요는 없다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10월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문득 ‘시월’이라는 어휘가 떠올랐습니다. 한때 황동규 선생의 시 「十月」에 푹 빠져 지냈더랬습니다. 술자리에서 노래를 시키면 노래 대신 이 시를 외우기도 했죠.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로 시작하는 시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시의 ‘10월’을 한자로는 ‘十月’로 쓰고 읽기는 ‘시월’로 읽습니다. 이것을 한자 그대로 ‘십월’로 읽었다면 어땠을까요. 맛이 한결 덜했을 것 같습니다. 같은 이치로 ‘육월’이 아닌 ‘유월’ 쪽이 한결 부드럽지 않습니까? (말을 하다 보니 엉뚱하게도 차이콥스키의 ‘사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곡, 6월과 10월이 떠오르는군요.) 다시 ‘시월’로 돌아가 보자면, 시월은 가난하면서도 풍요롭고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계절이 아닐까 합니다. 시월의 음가(音價)와 의미론적 내포가 저에게는 두루 마음에 듭니다.
Q 신석정의 시 「작은 짐승」을 ‘나비’에 소개해주셨는데 선생님도 ‘작은 짐승’이었던 때가 있습니까? 어떤 짐승?
A 신석정 시의 ‘작은 짐승’은 훼손되지 않은 순수와 평화를 구가하는 본연의 인간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에서 그려진 것과 같은 지복의 순간은 아닐지라도, 저에게도 그에 가까운 순간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꼭 어린 시절일 필요도 없겠죠. 그러니까 ‘어린’ 짐승뿐만 아니라 ‘어른’ 짐승도 성립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Q 늘 해보고 싶어 하면서도 하지 못하는 일은?
A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는 일입니다. 제가 책을 읽고 그에 관해 기사를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대답은 조금 엉뚱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말씀 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제가 기사로 써야 할 책들과, 기사와 무관하게 읽고 싶은 책들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물론 문학 담당 기자라는 제 일을 사랑합니다. 제 분수에 넘치는 큰 행운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때로 아쉬움과 불만이 없지는 않습니다. 문학 담당 기자로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정말 좋은 작품을 만났을 때입니다. 그럴 때면 그 작품의 장점과 미덕을 기사로써 충분히 살리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합니다. 반대로, 솔직히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데도 할 수 없이 기사를 써야 할 때도 있습니다. 기사가 될까 해서 애써 읽고 나서도 결국 쓸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경우도 있죠. 그럴 때면 드물게 문학 담당 기자라는 자신의 직업을 한탄하기도 합니다. ‘이런 허접한 책을 읽는 대신 정말 읽어야 할 수많은 좋은 책들을 읽어야 하는데’ 하는 한탄이 밀려듭니다. 읽고 싶은 책을 읽는 일은 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는 오히려 더 힘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래도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라야 정말 하고 싶은 독서를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하고 있습니다.
Q 최재봉의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면 무엇인지요.
A 생명과 살림(집안의 운영이 아니라 죽임의 반대 말입니다)이라고 답하렵니다. 누군들 이런 가치를 포기하고 싶을까요. 게다가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 이것만도 아니겠죠. 그래도 가장 중요한 가치를 꼽다 보니 이렇게 근본적인 답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혹시나 싶어 덧붙이고 싶은 말은 있습니다. 생명과 살림이란 것을 반드시 소극적이고 평화(?)지향적인 뜻으로만 쓰고 싶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한 분노와 슬픔, 그리고 그에 맞선 저항과 투쟁 역시 챙기고 싶습니다. 생명과 살림이 너무도 큰 ‘말씀’이기 때문에 자칫 현실 속의 소소한 갈등과 차이에는 맹목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김지하 시인이 자서전 『흰 그늘의 길』에서 결론으로서 도달한바 ‘명상과 변혁(운동)의 결합’이 필요할 것이라고 봅니다.
Q 최재봉에게 행복이란 ㅇㅇㅇ 이다.
A < 좋은 사람들과 좋은 술을 마시며 좋은 음악을 듣는 것 > 또는 < 걱정 없이 한껏 게으른 상태 >
Q 요즘 품고 있는 고민거리나 ‘불편한 진실’은 무엇입니까?
A 신문사의 책 담당 기자에게는 일주일이면 수십, 수백 권의 책이 배달됩니다. 해당 책의 저자나 편집자에게는 하나같이 소중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겠죠. 그러나 그 중에서 추리고 또 추려 손으로 꼽을 정도의 책만 크고 작은 기사로 소화하게 되는 기자의 처지에서는 그처럼 많은 종수의 책이 상당한 부담이 됩니다. 개중에는 ‘이런 책을 왜 만들었나’ 싶은 것들도 없지 않죠. 기사로 쓰지 않은 책들은 자료실로 보내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합니다.
또한 모든 책에는 보도자료라는 게 끼워져 옵니다. 제가 주기적으로 하는 일 중의 하나는 그 보도자료들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보도자료는 대개 A4 용지의 한쪽 면들만 인쇄되어 있기 때문에 이면지로 쓸 수 있습니다. 문제는 보도자료마다 스테이플러로 철해지고 반으로 접혀져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제침기를 마련해 놓고 일일이 스테이플러 침을 빼내고 접힌 종이를 반듯하게 펴서 정리합니다. 아깝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빳빳한 달력 종이를 아껴 두었다가 교과서 표지를 쌌던 일이 기억납니다. 그러고도 남는 종이는 딱지로 만들어 유용하게 썼습니다. 그때는 이면지는커녕 지금의 상품 포장지 같은 것도 함부로 버리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딱지 접을 종이가 많은 집 아이가 부잣집 아이였습니다. 성냥 한 알이 아까운 시절이었습니다. 귀찮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궁상맞아 보인다고 생각하면서도 보도자료 이면지를 쉽사리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많은 책들과 그에 딸린 보도자료 종이들을 볼 때 마음이 불편합니다. 제가 하는 일이 독자들에게 좋은 책을 소개해서 읽도록 하는 일이고 때로는 저 자신 어쭙잖은 책을 쓰거나 번역해서 내놓는 처지에 이런 마음을 먹는다는 게 가당치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무 한 그루만도 못한 책을 너무 많이 쏟아 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을 어쩌지 못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