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가장 좋아하는 어휘는 무엇입니까? 이유는?
A 저는 ‘땅’과 ‘고향’이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4년 전이었던가, 평택 대추리에 집회가 있을 때 가끔 다녀왔는데, 어느 날 대추리 입구에 ‘땅과 고향을 지키자’라는 격문을 보면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지만, 지금 가장 함부로 대접받고 있는 존재, 그러면서도 묵묵히 제 몸을 내어주는 제일 바보 같은 존재가 바로 ‘땅’과 ‘고향’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Q 세계 역사에서 기억하고 싶은 명장면이 있습니까?
A 저는 세계사에 대한 이해가 무척 짧기 때문에 별다른 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제가 가진 생각이란, 땅속에서 노동하고 마을에서 살아가면서 대대로 나고 죽고, 죽고 나면서 그렇게 흘러오던 ‘민중의 평화’가 근대화와 산업화, 제국주의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면서 깨어지게 된 순간이 오늘날 이 ‘근대적 재앙’의 출발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독립적 소농들의 자치 국가를 꿈꾸는 세력을 물리치고 강력한 산업화와 중앙집권화를 통해 제국주의적 팽창을 꿈꾸는 세력이 초창기 미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던 어떤 순간을 생각해 봅니다. 그 순간이 오늘날 이 세계에서 힘없고 약한 민중들이 흘려야 했던 그 어마어마한 피눈물의 출발이 아니었을까, 그 대목에 도사리고 있는 그 음침한 비극성을 가끔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Q 늘 해보고 싶어 하면서도 하지 못하는 일은?
A 일본 여행입니다. 요즘은 이런 이야기 해도 큰 욕 안 들어먹을 것 같습니다만, 저는 일본이 참 좋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일본 소설, 일본 영화들이 무엇보다 좋고, 그 속에서 일본에 대한 선망을 키워왔습니다. 교토나 홋카이도 같은 곳, <설국>의 무대인 니카타에 꼭 가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존경하는 사상가 후지타 쇼조 선생의 흔적도, 그리고 가끔 떠올려 보는 윤동주와 이상의 흔적들도 찾아보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은 제게 어느 정도 남아 있는 ‘자유주의자적 기질’이 발동될 때, 무장무장 그리움이 증폭되는 곳이라 할 수 있겠지요.
Q 이계삼의 “2009 올해의 책”을 꼽는다면?
A 사실 저는 이런저런 저널을 챙겨봅니다만, 책은 그다지 많이 읽지 않습니다. 구매하는 책 중에 완독하는 책은 10%가 될까 말까 할 정도입니다. 책을 읽을 시간이 없기도 하고, 태생적으로 한 권을 끝까지 다 읽어낼 만한 지구력과 끈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2009 올해의 책이라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늘 가까이 끼고 보는 책 두 권을 소개합니다.
● 윤재철 시집 『능소화』
저는 이 시집의 아련한 허무가 참 좋습니다. 행간 속에 넉넉한 허허로움도 담담하고 부드러운 달관의 느낌도 마치 품이 넉넉한 옷을 입은 듯 편안합니다. 허무가 따뜻하게 느껴질 만큼 나이를 먹은 것도 아닌데, 이 시집을 자주 찾는 이유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머리맡에 두고, 때로는 학교 교무실에 꽂아두고 읽고 또 읽습니다.
●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나락 한알 속의 우주』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말씀을 담은 책입니다. 저는 15~6년 전 군 복무 시절 <녹색평론>에서 이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나름대로는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이 책이 나온 지는 아주 오래됐습니다만, 역시 머리맡에 두고 시시때때로 아무 쪽이나 꺼내어 읽습니다. 자애로운 어머니의 말씀 같고, 힘들고 지친 사람들을 보듬어주는 손길이, 그러면서도 인생과 세상에 대한 한없는 겸손이 느껴집니다. 한 번도 뵌 적 없지만, 무위당 선생님의 말씀 속에서 저 자신이 늘 위로를 얻기 때문에 늘 이 책을 들춰봅니다.
Q 이계삼의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면 무엇인지요.
A ‘고통에 대한 응시’입니다. 버트런드 러셀이 자서전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을 겁니다. “에로스적인 사랑, 지식에 대한 충동으로 천상으로 끌어올려지는 나를 지상으로 끌어내린 것은 연민이었다.”는 내용의 이야기였을 겁니다. 연민이란 결국 ‘고통에 대한 응시’에서 생겨나는 게 아닐까요. 제가 글을 쓰는 힘도,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나와 내 구체적인 이웃들이 받고 있는 고통, 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대한 혐오는 결코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겠지요. 이 세상을 정직하게 응시했을 때 만날 수 있는 것은 힘없고 약한 것들에게 가해지는 어마어마한 폭력들의 파노라마가 아닙니까.
Q 이계삼에게 행복이란 ㅇㅇㅇ 이다.
A 1. ‘자유’보다는 하위의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2. 억지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을 할 때, 그때 찾아드는 안도감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3. 밤 늦은 시간, 자전거에 몸을 싣고 엠피쓰리를 귀에 꽂고 골목길을 느릿느릿 다닐 때 찾아오는 어떤 느낌이기도 합니다.
Q 요즘 품고 있는 고민거리나 ‘불편한 진실’은 무엇입니까?
A 1. 전교조 운동이 갈수록 어떤 ‘계층성’을 띠게 되면서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실제적 고통-일제고사와 학교 교육의 파행, 청소년 인권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맞서 싸울 수 ‘없는’ 방식으로 점점 구조화되어 가는 것이 큰 고민입니다.
2. 지역 활동에 집중하고 싶은 마음(올해는 공부방을 위시하여 지역에서 작은 공간을 마련하는 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과 글쓰기 청탁 속에서 나 자신의 포지션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스스로를 보면서 ‘불편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3. 이명박과 맞서 싸워야 할 사람들이 ‘내 안의 이명박’ 운운하며 스스로 차분해지는 모습들을 자주 봅니다. 자책해야 할 사람은 절대 자책하지 않고, 자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너무들 자책하는 것 같아 그것이 보기 괴롭습니다.
Q 누군가에게 묻고 답변을 듣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까?
A 저는 최소한 10년 안으로 한국의 경제와 거기에 연동하는 여러 지표들이 몰락이나 거기에 준하는 수준으로 주저앉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열쇳말은 ‘빈곤’, ‘농업’, ‘풀뿌리 연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가 되면 이런 문제의식을 담고 있지 않은 진보적 담론, 의제들이 별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l 복면 인터뷰이 이계삼은…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