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A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과 ‘인간다움’ 사이에 거리가 있다는 전제가 이 질문에는 들어있는 것이죠. 개별적 인간과 ‘인간임’ 사이의 차이가 하이데거식의 존재론적 차이라면, 우리말에서 ‘인간다움’은 그와는 또 다른 차이를 말하는 듯싶습니다. 윤리적인 차원과 미학적인 차원 모두에 가 닿는다고 해야 할까요. ‘-다움’이란 말의 뜻을 섬세하게 풀어줄 수 있는 국어사전을 우리가 아직 못 가진 듯싶어서, 대신에 ‘답다’에 대한 영어사전의 풀이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세 가지로 풀고 있습니다.
첫째는, 같다(be like). 인간다움이란 ‘인간 같음’이란 뜻입니다. 그 말은 곧바로 ‘같잖은 인간’이 있다는 걸 전제합니다. 인간 같지 않게 말하거나 행동하는 인간이 바로 ‘같잖은 인간’이죠. 혹은 인간으로서 기대되는 말이나 행동에 어긋날 때 우리는 그가 “인간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둘째는, 되다(be becoming to). 인간이란 ‘자라나는’ 존재이자 ‘되어가는’ 존재란 뜻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판단이 거기에는 들어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덜 된 인간’이란 말을 쓸 수 있는 것이죠. 젖을 덜 먹고, 덜 자란 인간도 있고, 덜 돼먹은 인간도 있습니다. ‘인간다움’이란 말은 그런 걸 상기시켜줍니다.
끝으로, 값어치가 있다(be worthy of). 인간이란 형태, 즉 꼴을 갖고 있다면, 그 꼴에 맞는 값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죠. 인간으로서의 ‘꼴값’입니다. 이에 못 미치는 인간이 ‘값싼 인간’이겠죠.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인간을 말합니다.
이렇듯 ‘같잖은 인간 VS 인간’, ‘덜 된 인간 VS 인간’, ‘값싼 인간 VS 인간’이라는 차이와 대립을 사유하고자 하는 것 자체가 저에겐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무엇 같습니다. 그러한 차이에 대한 인식은 우리의 말과 처신을 조신하게 만들지 않을까요?
Q 가장 좋아하는 외국 작가가 있습니까?
A 러시아문학을 전공하고 또 강의하고 있는 만큼 러시아 작가들이 친숙합니다. 많이 읽다 보면 또 자연스레 좋아하게 되고 그렇지요. ‘가장 좋아하는’이란 단서가 붙으면 무슨 ‘이상형 월드컵’ 같은 걸 떠올리게 되는데(멍청한 일이 대개 그렇듯이 요즘 유행하고 있지요), 억지로 꼽자면 아무래도 푸슈킨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이름을 앞세우게 됩니다. 푸슈킨은 전공논문을 쓰면서 점점 매력을 느끼게 되었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대학에 들어와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읽으면서 ‘이 작가다!’ 싶었습니다. 대학 졸업논문을 데뷔작인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썼고, ‘로쟈’란 제 닉네임은 『죄와 벌』의 주인공에게서 가져온 것이기도 하죠. 멀지 않은 장래에 이들 좋아하는 작가들에 대한 책을 쓰는 것이 한 가지 목표이기도 합니다. 생존 작가로는 밀란 쿤데라를 좋아하는데, 요즘은 활동이 뜸한 편이라 아쉽습니다. 2000년 이후로는 새로 읽은 작가들이 많지 않아서 ‘좋아하는 작가’도 제때 업데이트가 안 되고 있습니다. 주로 철학자들을 즐겨 읽은 탓인지도 모르지만요.
Q 유토피아가 어떤 시공간이길 희망하십니까?
A 개인적으론 두 사람의 철학자와 한 사람의 작가를 떠올리게 됩니다. 먼저,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유토피아를 실제의 삶과 유리된 어떤 이상사회에 대한 몽상과는 무관한 것으로 규정합니다. 그는 유토피아가 우리가 더 이상 ‘가능한 것’의 한계 안에서 살아갈 수 없을 때 제기되는 생존의 문제이며, 가장 심층적인 차원에서의 어떤 불가피성의 문제라고 봅니다. 가장 기본적으론 “이대로는 지속할 수 없다.”라는 삶의 절박함이, 현재의 사회적 좌표계에서는 할당돼 있지 않기 때문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표상되는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용산참사의 희생자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 또한 이러한 유토피아적 시공간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킵니다. 때문에 유토피아적 충동과 기획은 언제나 현재적이며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리고 들뢰즈 같은 경우는 유토피아란 말 대신에 ‘에리환(Erewhon)’이란 말을 씁니다. 영국의 소설가 새뮤얼 버틀러의 작품 제목에서 가져온 것인데, ‘no where’(어디에도 없는 곳)란 문구의 철자를 재조합해 만든 단어입니다. 이것은 또 ‘now-here’(지금-여기)의 변형이기도 한데요, 말하자면 ‘지금-여기’이면서 어떤 부재의 장소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 ‘에리환’이란 말을 갖고서 들뢰즈는 시간성/무시간성, 역사성/영원성, 특수/보편이라는 양자택일을 넘어서는 ‘반시대성(untimely)’을 가리키고자 합니다. 유토피아의 공간이 어떤 부재의 공간을 뜻한다면, 유토피아의 시간이란 이런 반시대성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요?
끝으로 『당신들의 천국』의 작가 이청준. 제 기억에 소설 속의 한 인물을 통해서 작가는 아무리 대단한 유토피아라 하더라도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자유, 그러니까 유토피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감옥과 다를 바 없다는 주장을 폅니다. 말하자면 행복하지 않을 권리가 허용되지 않는 행복은 완전한 행복, 이상적인 행복이 못 된다는 것이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러한 화두들을 품고서 더 고민해보는 것입니다.
Q 늘 해보고 싶어 하면서도 하지 못하는 일은?
A 먼저 ‘하지 못한다’는 말의 뜻이 모호한데요. 그것이 능력이나 역량의 부족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그냥 소망이 무엇이냐는 물음과 같겠습니다. 하지만 할 수는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여건상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일이 무엇이냐는 물음이라면, 당장은 ‘몇 권의 책을 쓰는 일’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한 러시아 작가의 단편에 ‘기적을 행하는 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런 식입니다.
“지금 나는 졸리지만 자지 않을 것이다. 나는 종이와 펜을 가지고 이야기를 쓸 것이다. 나는 내 안에서 어마어마한 힘을 느낀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어제 이미 다 생각해놓았다. 이것은 기적을 행하는 자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는 우리 시대에 살면서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기적을 행하는 자이며, 어떤 기적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를 아파트에서 쫓아낸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그 아파트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대신 아파트에서 고분고분 떠나 교외에 있는 헛간에서 지낸다.”(다닐 하름스, 「노파」)
저도 푹 자고 컨디션이 좋은 날엔 ‘어마어마한 힘’을 느끼며 대단한 걸작을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적어도 제가 읽고 싶은 책을 쓸 수 있겠다는. 하지만 현재로선 그렇게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그렇게 못하고 있습니다. 아파트에서 쫓겨나지 않는 걸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Q 이현우의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면 무엇인지요.
A 이건 ‘당신의 보물은 무엇인가?’이란 질문을 조금 고상하게 표현한 것인가요? 책을 사 모으고 책을 읽고 책에 대해 강의하는 것이 일상이니 만큼, 그냥 ‘책’이라고 해야겠지만, 너무 ‘책상물림적’이란 인상을 줄 듯싶어서, ‘책을 읽을 자유’라고 하겠습니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책을 쓰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책을 만드는 사람이 있어야 하며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하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책을 읽을 자유’는 그 모든 것을 필요로 하기에 손쉬운 자유는 아니라고 해야겠지요. 고상하고 고급한 자유입니다. 모두에게 그런 자유가 허용되는 사회라면 살 만한 사회이지 않을까요?
Q 이현우에게 행복이란 ㅇㅇㅇ 이다.
A 드디어 ‘복면 인터뷰’의 ‘복면’ 같은 질문이 나왔네요! 맨얼굴로, 맨 정신으로는 질문하기 어려운! 저에게 행복이란 주변 사람들이,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이 행복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 정신인 사람이라면 주변의 불행 앞에서 자신의 행복을 말하기 어렵겠죠. 인류의 불행 앞에서 자신의 행복만을 음미하기 어려울 테구요. 해서 모든 행복은 순간적이며 상처받기 쉬운 행복입니다. 궁전이라도 짓고 그 안에 틀어박혀 있지 않는 한 말이죠. 때문에 ‘행복’이란 말은 저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계량화할 수 있는 만족 같은 거라면 몰라도(주변 사람들의 불행이 우리를 얼마나 만족스럽게 하는지요!). 그러니 이렇게 정리될 수 있겠네요. 행복이란 ‘난센스’다.
Q 요즘 품고 있는 고민거리나 ‘불편한 진실’은 무엇입니까?
A ‘요즘’이 ‘오늘’을 가리킨다면 두 건의 주간지 원고를 외출도 해야 하는 오늘 무사히 끝낼 수 있을까라는 게 고민거리입니다. ‘일주일’을 뜻한다면, 계속 늦어지고 있는 어느 책 원고를 빨리 끝내야 하는 것이구요. 조금 더 늘려 잡으면, 다시 포화상태에 이른 책들을 처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이건 내년쯤에 ‘요행’이 떨어지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편한 진실’이라, 이건 지구 온난화 문제를 말하는 건가요? 그것이 정말 ‘불편한 진실’이라면 털어놓기도 불편한 것일 텐데, 일종의 ‘자학’을 감행해보라는 질문 같기도 합니다. 그럴 수야 없지요! 대신에 다른 사람이 아닌 저에게 ‘불편한 진실’은 말해볼 수 있습니다. 그건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들보다 적게 남았다는 것. 그래서 새삼스러운 건 아니지만 욕심 부린 책들을 다 읽지 못할 거라는 것. 그리고 어쩌면 쓰고 싶은 책들도 다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한국사회로 넘어가면 다음 대선에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건 어쩌면 종말보다 더 나쁜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것. (*)
인터뷰이 소개
이현우
‘로쟈’라는 ID 혹은 필명으로 알려진 그는 대학 안팎에서 러시아 문학과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비교시학」(2004)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겨레21>과 <교수신문> 등에 서평을 연재하고 있다. 인터넷서점에 ‘로쟈의 저공비행’이라는 이름의 블로그를 꾸리고 있으며, 이른바 ‘인터넷 서평꾼’으로 활동하고 있다. 얼마 전 1997년부터 2009년까지 쓴 글을 정리해 『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