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않은 순간에 무심한 바람처럼 그것은 찾아온다. 사소한 각성 혹은 쉽게 다룰 수 없는 느낌 혹은 아무것도 아닌 슬픔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한숨처럼. 추억의 가벼운 탄식처럼. 나는 밑줄을 긋는다. 보던 책을 잠시 덮고 갈라진 시간의 틈으로부터 비밀을 읽어낸다. 묻는다. 당신은 안녕한가. 나는 안녕하지 않아도 괜찮은가.
부재
그 그림들은 비록 수세기 동안 불변한 채 남아 있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단 하나의 순간만을 보여준다. 덧없는 순간과 끝없는 지속이 서로 매우 가까이 끌어당겨져 있고… 변화 그 자체를 의미하는 순간은 수집가의 책장 속 마른 나뭇잎처럼 납작하게 눌려 있고,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머물 운명인 것이다.
- 제임스 엘킨스, 『그림과 눈물』 중에서
어쩌면 우리를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변하지 않는 것들 속에서 변해버리는 것들, 그 두 가지의 격앙된 대비일지도 모른다.
‘끝없는 지속’이라는 것이 ‘덧없는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덧없는 순간이 끝없이 지속된다는 것, 그리하여 시간의 존재가 소멸하고 시간에 기대어 있는 우리의 삶 역시 소멸한다는 것, 그런 사실을 응시하는 것이 오래된 그림을 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든 것의 부재. 신의 부재. 사랑의 부재. 아름다움의 부재. 부재를 느끼는 것은 그것이 한때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부재가 고통스러운 것은 그들이 여전히 존재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덧없는 순간은 지나가고 끝없는 부재만이 지속될 뿐이다. 부재를 상기시키는 순간을 응시할 수 있는 힘이 나에게는 없을지도 모른다.
특별한 그림으로 인해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으나 그림 또는 순간 속에 각인된 잔인한 지속성이 나를 울고 싶게 만든다.
고치다
삶은 고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
- 손철주, 『꽃 피는 삶에 홀리다』 중에서
고치다; 낡거나 고장이 나거나 한 물건을 손질하여 제대로 되게 하다. 그릇되거나 틀리거나 한 것을 바로잡다.
어디가 낡고 어떻게 고장이 났는지, 어디부터 그릇되었고 어디서 틀린 건지, 알고 싶을 때가 있다. 고칠 수 있다면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 하는 건지. 혹은 알아도 고칠 수 없는 건지. 고칠 수 없음을 견뎌야 하는 건지.
사랑의 죽음
안녕, 로이스, 내가 한 모든 행동에 대해 당신을 용서하겠소.
- 로버트 펜 워런, 『모두가 왕의 사람들』 중에서
안녕, 디, 난 요즘 끝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해요. 그 생각들은 꿈속에서처럼 뒤죽박죽이어서 말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무엇인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 끝의 시작이라는 건 알겠어요. 끝의 시작에서 끝의 끝까지 가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시작은 했으니까, 언젠가는 정말로 끝이 나겠죠.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졌어요.
안녕, 디, 내가 한 모든 행동에 대해 당신을 용서하겠어요.
바람이 사는 법
남달리 삶의 즐거움을 자랑스럽게 포옹하는 내가 이 즐거움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해본다. 거기에는 바람 외에 아무것도 없다. 바람은 우리보다 더 현명해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며, 자신의 역할에 만족하고, 결코 자신의 속성에 맞지 않는 안정감이나 견실함을 기대하지 않는다.
- 미셸 드 몽테뉴, 『체험에 관하여』 중에서
그런 거였구나. 안정감이나 견실함은 바람의 속성이 아니고 바람 자신은 스스로에게 그것을 기대하지 않는 거였구나. 자신의 속성이 아닌 것을 기대하지 않는 것, 그것이 자신에게 만족하는 방법이었구나.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바람인가. 너는 얼마나 바람인가.
나는 바람이 되고 싶지만 될 수 없는 존재인가. 바람의 흉내를 내지만 어딘가에 뿌리 내리고 싶은 욕망 때문에 결코 이 삶에 만족할 수 없는 것인가.
바라보는 것은 소유된다
클라리벨 콘은 수집을 죽이는 일(killier)이라고 생각했다 - 아름다운 사리들이 다른 모든 것을 목졸라 죽인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핵심을 파악했다. 수집은 단순히 소유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 자체가 일종의 갈망인 바라보기.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것은 소유되고, 넋이 나가는 것이다.
- 퍼트리샤 햄플, 『블루 아라베스크』 중에서
그리하여 나는 너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너를 소유한다.
너의 시간을, 너의 잠깐 동안의 망설임을, 곧 닥쳐올, 너의 부분적인 미래를.
너의 부드러운 정신을, 너의 날카로운 상처를, 너의 빛나는 통찰력과 문득 스쳐지나간 그림자를.
너의 위험한 생각을, 너의 평화로운 갈망을, 너의 부적절한 의식을.
그리하여 나는 너와 헤어진 후에도 그 기억을 더듬어 몇 번이고 같은 방식으로 너를 소유하게 된다.
이 세상에 진정한 소유가 있다면 그런 것이 아닐까.
늙은 세상
“왜 그처럼 자살이 늘어났을까요?”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아마도 세상이 늙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사람들이 현실을 똑똑히 이해하게 되면서 그것을 감수하지 못하게 된 거죠.”
- G. 모파상, 『안락사용 안락의자』 중에서
그토록 탄력에 넘치던 피부가 쪼그라들고, 어디서나 곧고 바르게 서 있던 자세가 무너지고, 눈빛에서는 더 이상의 총명함과 다정함을 찾을 수 없으며, 세상의 모든 것에 - 심지어 사랑하는 연인에 대해서조차 무감각해져버린, 이 세상.
세상의 일부분인 나는 하나의 세포처럼 떨어져 나가서 가끔 죽는다.
성장을 멈춘 사람의 키가 더 이상 자라나지 않듯 내 마음에서 자라나는 것은 더 이상 없다. 성장을 멈춘 사람의 머리카락이 빠져나가듯 내 마음은 많은 것들을 버리려고 한다. 한때 나를 괴롭혔던,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게 만들었던 욕망의 흔적도 이미 죽었다. 기다림조차 나를 애끓게 만들지 못한다.
“그냥 그런 거지.”
이해를 하려 들자면 못할 게 없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으니 무엇이든 이해해버리는, 잊어버리는, 돌아서는 시들어버린 마음.
그런 게 아닐까, 모파상이 얘기한 늙은 세상이란 건.
그러니 그대, 나의 마음이 아직 살아 있을 때 내 이름을 부르라. 우리가 살아 있는 시간은 이토록 짧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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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황경신
작가. 월간 <PAPER> 편집장. <무크> 취재기자, <행복이 가득한 집> 취재기자, <이브> 수석기자로 활동한 후 1995년부터 월간 <PAPER>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종이인형』, 『그림 같은 신화』, 『세븐틴』, 『나는 하나의 레몬에서 시작되었다』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