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데니소비치와의 첫 만남은 얄궂게도 군복무 시절에서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억울하게 간첩으로 오인 받고 포로수용소에 투옥된 농민출신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묘하게 군대에서의 하루와 교차됐다. 물론 슈호프(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만큼 처절하지는 못하겠지만, 청춘이라는 하이웨이 끝에서 언제나 액셀을 끝까지 밟고 방황과 낭만을 일삼던 나에게 군대란 만만한 놀이기구가 아니었다. 하루하루가 조마조마 끝도 없이 올라가다가 덜컹하고 끝도 없이 추락하는 기나긴 자이로 드롭이었다. 이런 무언가 절묘한 상황 속에서 독자로서의 감정이입은 더욱 더 격해졌고, 이른바 책 속으로 들어가 슈호프 형님과 함께 1일 수용소 체험을 하게 되었다.
새벽3시 어김없이 기상종이 울린다. 하지만 슈호프의 몸은 오한이 들어 천근만근이다. 밖은 영하 28도, 슈호프의 몸은 27도. 자, 어느 쪽이 이길 것인가? 자연과의 싸움이자 자신과의 싸움, 슈호프의 하루는 늘상 이렇게 사투로 시작된다.
슈호프란 인물이 당연지사 범인들을 뛰어 넘는 능력자 슈퍼 히어로는 아니다. 똑똑하지도 않고 힘이 세지도 않고, 여러모로 가진 것이 없어 외부에서 소포 하나 기대할 게 없는 아주 평범한 인물이다. 어쩌면 이 사회에서 가장 평범한 서민적 캐릭터라고 할까. 이런 슈호프가 보내는 수용소에서의 하루는 만만치가 않다. 그러나 슈호프에게는 8년간의 단련된 선수생활을 통해 터득한 난관을 헤쳐 나갈 지혜가 있다. 마치 바람의 아들, 야구선수 이종범이 오랜 세월 풍부한 경험을 통해 갖춘 경기 운영의 묘 같은 것이랄까? 그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일이라는 것은 이렇게든 저렇게든 하는 방법이 여럿 있다. 아는 사람을 위해서 할 때는 솜씨껏 하고, 바보를 위해서 할 때는 그저 눈가림으로 하면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모두 지쳐 뻗어버렸을 것이다.” 그가 피우는 요령은 가히 예술이다. 식사시간에 같은 반원들 국을 타오는 와중에서도 어떤 국에 건더기가 많이 들어 있는지 확인하고, 그 국그릇에다가 엄지손가락을 담가둔 채 찜한 상태를 유지한다. 정말 삶의 치열함을 느낄 수 있다.
또 이 책에서 자주 느낄 수 있는 것은, 음식에 대한 슈호프의 경건한 태도이다. 슈호프는 빵 한 조각을 먹을 때도 그 진미를 알 수 있도록 먹는다. 조금씩 입 안에 넣고 혀끝으로 이리저리 굴리며 두 볼에 침이 흘러나오게 해서 먹는다. 그러면 빵에 묻은 설탕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작업을 하러 가는 동안에도 수용소에 남겨둔 빵을 도둑 맞을까봐서 침대 매트 사이에 집어넣고 다시 바느질을 해서 꿰맬 정도이다. 그러고 보면 우린 참 감사해야 할 일들이 많다. 너무도 당연시했던 것들, 물과 음식,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 미녀들을 가질 수는 없지만 볼 수는 있다는 것, 따듯한 집,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 우리를 위로해주는 음악, 사랑, 우정……. 어쩌면 아픔과 고통까지도 우리는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를 살아 있게 느껴주는 모든 것들에게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욕심은 끝도 없지, 그렇다고 당장 포로수용소를 갈 수도 없고, 인간은 상황에 지배를 많이 받으니까 그때그때 순간마다 감사해야 하지 않나 싶다.
솔제니친은 슈호프를 통해서 인간은 절대로 비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남들처럼 모자를 쓰고 식사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남의 밥그릇을 핥거나, 남에게 구걸하지 않는다. 수용소의 휴식시간에 가진 놈이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어디선가 사내들이 하이에나처럼 그 앞으로 모여들어 한 모금 얻어 피워볼까 애처로운 눈빛을 보낸다. 하지만 슈호프에게 비굴한 부탁이란 없다. 언제나 당당하다. 그래서일까, 신기하게도 언제나 마지막 담배 한모금은 슈호프에게로 돌아간다. 당당한 모습이 인정을 받은 것일까. 그도 아니면 상대방을 알지도 못 한 상태에서 일방적인 구애와 설득은 시간낭비일 뿐이고, 남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기대하는 바와 적당히 차이가 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커뮤니케이션의 법칙을 슈호프가 터득하고 있었단 말인가? 이른바 슈호프 형님의 고도의 심리전?
사랑도 마찬가지던가. 제 아무리 록커라고 해도 무턱대고 사랑해달라고 땡깡을 부리면 내가 여자라도 전혀 일말의 매력 포인트도 찾지 못 할 게 지당하다. 눈길 한번 줄 이유 없다. 여기서 다시 한번 독서의 미덕이자, 삶의 교훈이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나타나면 절대로 하이에나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남자라면 당연히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되어야한다.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가는 것은 단두대 형장의 이슬일 때뿐이다.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는 슈호프의 노동 작업일인 블록 쌓기에서 나온다. 슈호프는 억울하게 수용소에 수감되어 언제 나가게 될지도 모르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주어진 작업에 대해서는 철두철미한 사명감을 갖는다. 왜일까? 도대체 희망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블록 쌓기가 조금이라도 삐뚤어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그의 행동은 무엇일까? 그는 암울한 시대, 혼돈스러운 정치에 휘둘리는 지극히 평범한 서민들을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슈호프는 좌절하지 않는다. 그는 블록 쌓기를 통해 어떻게 보면 권력체제 자체에 저항한다고 볼 수 있다. 정신이다. 그는 절망하지 않는다.
그는 노동을 하면서 작업반장과 경쟁까지 하는 강건함을 보인다. 몸살이 걸린 와중에도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괭이질을 하다 보면 땀이 흥건히 고인다. 솔제니친은 자신의 수용소 생활을 기반으로 거의 실화에 가깝게 소설을 썼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생활이 그때의 포로수용소만큼 힘든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닮아 있는 구석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사람이 사는 곳 어디든 권력이 생겨나고 시대의 아픔이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읽고 느낀 것은 희망이다. 슈호프는 절대로 좌절하지 않는다. 그는 자존감을 잃지 않았다. 어떠한 시련과 상황에서도 그는 인생을 대충 살지 않았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인생을 허투루 살지 말라던 잠언은 힘든 실천을 강요하기에 흔해 빠진 식상한 말이 될 뿐이다. 하지만 슈호프는 정말이지 형기가 시작해서 끝나는 만 10년의 시간, 그러니까 무려 3천5백35일이나 되는 단 하루를 허투루 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참으로 실천이다.
시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눈부신 약속이다. 날려버린 시간들이 아쉬워진다면, 다시 한번 천만금의 보화를 주더라도 살 수 없는 시간의 무게를 생각해 보자. 슈호프는 시간의 가치를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흔히 실천할 수 없는 시간의 존재감을 터득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오늘을 단 하루처럼 사는 방식을 택했으리라.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질타한 시인은 안도현이다. 진정으로 슈호프 형님이라면 이 질타로부터 자유로울 터이다. 자, 한경록의 하루는 어땠는가? 반성이 있다면, 실천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남자다. 남자라면 세계와 인생과 자신의 영혼이 놀랄 만한 단 하루의 장관을 만들겠다는 배포가 있어야 한다. 편견 없는 둥근 눈으로 슈호프 형님을 본받으리라.
사족 하나. 슈호프는 달이 매월 새로 생기는 줄 알았단다. 마을에서 하나님이 없어진 달로 별을 만든다고 생각했단다. 그렇게도 진중하고 카리스마 자존심의 슈호프 형님에게도 유머와 위트의 구석은 있다. 아니 고단하고 지난한 수용소 생활에서의 낭만적 유쾌함이 있다. 왜 하나님이 달을 가지고 별을 만드느냐고 물어본다면, 슈호프는 아마도 이런 대답을 날리리라 싶다. “그야 뻔한 일이지! 별이라는 건 오래되면 땅에 떨어지는 거니까 그만큼 더 만들 필요가 있거든.” 정말 굉장한 책에 굉장한 캐릭터다. 김추자가 아니라 강추다. -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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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한경록
밴드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초인적 낭만가. 1998년 크라잉넛 1집 『말달리자』로 데뷔. 2008년 7월 현재 <김창완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과 함께 "대규모 공연" 전국 투어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