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처음 만났던 1981년 여름을 기억한다. 그때 나는 열다섯 살. 그때 너는, 나의 큰언니가 낳은 첫 아이로, 그리고 내 생의 첫 조카로 내 앞에 왔었지.
그때 나의 큰언니는 스물다섯 살, 나의 어머니는 마흔일곱 살. 갓 태어난 아기의 엄마와 외할머니는 그렇게도 젊고 고운 모습으로 기도를 드렸단다. 병원에서 우리집으로 데려와 방에 눕힌 아기의 머리맡에 찬물 한 사발을 떠놓고…
그 아름다운 모습과 경건한 분위기는 나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너의 그 순간, 나는 단숨에 너에게 반해버리고 말았지. 내 나이 열여덟 살의 첫사랑보다 3년 앞서 그렇게 다가왔던 너는, 나의 첫정이었다.
너의 얼굴, 너의 미소, 너의 냄새, 너의 웃음소리… 정말 무조건 보고 싶던 그 마음을 네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맹목적으로 그리운 존재가 바로 너였다.
큰언니는 거의 주말마다 너를 데리고 친정 나들이를 했지만,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단다. 주말만 손꼽아 기다리다가 방학이 되면 짐을 싸들고 너의 집이 있는 도시로 달려가는 버릇이 스무살 무렵까지 이어졌으니까.
물론 지금은 그 정도로 너에게 집중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이, 첫정으로 다가왔던 사랑 또한 세월에 무디어졌고 그 모습은 변했다. 사랑의 그러한 속성을 너도 이제는 알고 있겠지? 그토록 작은 아기였던 네가 어느덧 이십대 후반으로 자라는 동안, 아마도 어떤 형태로든 사랑을 경험해 보았을 테니까.
그러나 내가 알기로 너는 이제 첫 번째 연애를 시작하였다. 짝사랑도 외사랑도 아닌 ‘연애’. 두 존재가 ‘서로’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사랑.
물론 너는 그동안 어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연애를 해본 적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컴퓨터 바탕 화면에까지 사진을 띄워놓고 가족들에게 알리는 연애는 분명 처음이다. 그만큼 공개하고 싶은 사랑, 세상 속으로 함께 섞여들고 싶은 사랑을 너는 처음으로 시작한 셈이겠지.
지난 여름, 그래서 우리는 흥분했다. 너의 엄마, 너의 아빠, 그리고 너의 삼촌과 이모들… 이른바 꽃미남도 아니고 몸짱도 아니지만 그 누구보다도 착하고 성실한 너를 제대로 알아본 여자가 대체 누구인지 우리는 정말 궁금했다.
상대가 대학 동아리 후배인데다 나이 차이도 제법 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 우리들은 신기해 했지. 너의 아빠 또한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복학생 선배로서 대학 동아리 후배인 너의 엄마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으니까. 어쩌면 그런 것조차 아빠를 닮았냐며 깔깔거리기도 했단다.
그렇게 우리는 어른의 체통도 잊은 채 너와 함께 들떴다. 나는 슬그머니 네게 용돈을 건네주면서 여친 얼굴 좀 보여 달라고 떼를 써보기도 했지. 하지만 이모한테까지 소개하기는 아직 부담스럽다며 고개를 가로젓던 너.
그런 너를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그날. 미처 나를 발견하지 못한 너는 환한 얼굴로 여자 친구의 손을 잡은 채 거리를 걷고 있더구나. 꼭 잡은 두 손은 나와 눈이 마주친 뒤에도 풀릴 줄을 몰랐고…
그 얘기를 전해 듣자 너의 엄마는 웃으면서 말했단다.
“우리집에 인사 왔을 때에도 그렇게 손을 꼭 잡고 있더라.”
그런 얘기들을 전해 들은 너의 삼촌은 단박에 이렇게 말하더구나.
“와, 부럽다.”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지.
“왜? 오빤 예전에 안 그랬어?”
“안 그러긴…. 지금 돌아보면 내가 어찌 그랬을까 싶은 행동은 다 하고 다녔지.”
그래, 너희들은 지금 그런 시절을 보내고 있는 거란다. 돌아보면 어느새 아련하게 그리워질 그 순간. 어쩌면 그 기억으로 평생을 살아가게 될지도 모를, 바로 그 기억의 현재.
손을 잡는다는 건 그런 것이지. 너를 안고, 너에게 입맞추고, 너를 보호하기 위해 네 손을 잡아준 적은 있을지언정 너와 내가 함께 손을 맞잡은 적은 없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끌어당겨 체온을 주고 받은 기억이 우리에겐 없다. 그것이 바로 사랑과 연애의 다른 점, 어쩌면 결혼과 연애의 다른 점, 나아가 추억과 현재의 다른 점일지도 모른다.
너희 둘 다 대학 졸업반인지라 취업만 되면 결혼까지도 할 수 있으리라 어른들은 내심 기대하는 눈치지만, 너의 첫 연애는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때 비로소 너는 진짜 어른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세상과의 첫 불화이자 인생과의 첫 대결이 되기도 할 테니까.
세상 속에 당당하게 섞이고 세상으로부터 승인 받고 싶으나 뜻대로 하지 못하는 것. 그러한 경험은 너를 한층 성숙하게 만들 것이니 그리 되어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너의 첫 연애가 보다 단단해지고 마침내 결혼에 이르는 것. 그러한 경험은 시행 착오를 줄여주고 진화하는 사랑을 펼쳐보일 것이니 그리 되어도 역시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자의 경험보다 후자의 경험이 더 나으리라고 생각한단다. 젊은 날 가능하면 많은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형태의 연애를 해보는 게 좋다고들 하지만, 굳이 그런 시행 착오를 자청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너보다 십수 년 앞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면서 살아온 내 입장에서 말해보자면 그렇구나.
무엇보다도, 결혼과 함께 진화해 가는 사랑이 생각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그럴 듯 하거든. 변하는 게 아니라 웅숭깊게 변모해 가는, 우물처럼 깊어가는 사랑. 멀리, 거듭 진화하는 사랑. 지난 여름 이후로 어느새 가을과 겨울이 지나 봄을 맞은 지금, 사계절을 모두 함께 한 너희들에게도 그런 사랑이 희미하게 윤곽선 정도는 드러내지 않았을까?
너의 첫 연애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되든 지금은 우선 네가 더 많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나도 더 많이 기분 좋은 에너지를 전달받을 수 있을 테니까. 이제는 아련해졌지만 언젠가 나도 분명 느껴 보았던 마음에 다시금 취해볼 수도 있을 테니까. 세상이 무작정 아름다워 보였고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보였던, 지구라도 들어올릴 것 같았던 그 놀라운 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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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고은주
1995년 단편 「떠오르는 섬」으로 <문학사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1999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했고 소설집 『칵테일 슈가』, 장편소설 『아름다운 여름』, 『여자의 계절』, 『현기증』, 『유리바다』, 『신들의 황혼』, 『시간의 다리』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