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책에 관한 짧은 이야기 하나.
어린 시절, 아버지와 내가 했던 책 찾기 놀이에 대한 것이다. 아버지는 큰맘 먹고 거금을 들여 100권에 달하는 세계명작소설을 구입하셨다. 그 전집을 구입하셨던 마음이야 묻지 않아도 알 일이다. 아들이 저렇게 많은 책들을 읽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갔으면 하는 마음. 한 가지 부연설명을 하면, 아버지는 할아버지께서 대학 진학을 반대해서 대학을 가지 못하셨던 아픈 기억이 있다. 말 그대로 만석꾼이었던 할아버지는 넓은 땅에 아버지를 데려가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여기 이렇게 땅이 많은데, 공부는 해서 뭐혀?”
그러니 아버지에게 책이란 각별한 의미였을 것이다. 그토록 읽고 궁구하고자 했으나 끝내 포기하게 된 꿈.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아마 개발시대를 살았던 아버지들 대부분 그랬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중동의 개발현장에서 맨손으로 돈을 벌어 집으로 부치지만, 그 돈을 갖고 자식만큼은 공부를 시켜 편하게 살게 하고픈 그런 마음. 자신이 못한 것을 자식이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 다행스러운 것은 아버지가 그렇게 공부를 강권하는 분은 아니었다는 거였다. 그 100권이 나란히 꽂힌 책장 앞에서 우리가 한 것은 책 찾기 놀이였으니까.
‘해저 2만리’ 하고 내가 문제를 내면, 아버지가 그 책을 찾고, 또 아버지가 ‘15소년 표류기’하고 말하면 내가 그 책을 찾는 식이었다. 아주 단순한 놀이지만 그것은 숨은 그림 찾기처럼 재미있었다. 기억에 남는 건, 유독 찾기 힘든 책이 있었다는 것이다. ‘걸리버 여행기’나 ‘로빈슨 크루소’ 같은 책들은 ‘척’하면 ‘착’하고 찾아낼 수 있었지만 유독 이 책만은 찾으려면 한참을 위에서부터 지그재그로 살펴봐야 했다. 그 책은 다름 아닌 ‘레미제라블’이었다. 아마도 제목이 주는 이미지가 별로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책 찾기 놀이에 열중했을 뿐,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던 나는 다만 그 제목이 주는 이미지를 늘 상상하곤 했다. ‘해저 2만리’면 그 바다 속을 막연히 그려 넣었고, ‘보물섬’이면 보물이 숨겨져 있는 섬을 생각했으며, ‘알라딘의 마술램프’면 뭐든 문지르면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를 떠올렸다. 그러니 내가 책을 접한 것은 그 책의 실제 내용과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다만 그 ‘책과의 경험’으로서의 책 찾기 놀이가 주는 기억이 책에 대한 잊혀지지 않는 경험으로 자리하면서 지금까지도 아련한 향수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제목을 발견했을 때의 그 희열과 손으로 집었을 때의 그 크기와 중량감으로 기억되는 그 책 속에, 수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그러니 내 머릿속 책에 대한 첫인상은 내용보다는 그 외형에 대한 것들이다. 비 오는 날 눅눅해진 책에서 콤콤하게 피어나는 특유의 향기나, 책장을 넘기다가 종이 날에 손이 베여 점점이 묻어나던 피, 혹은 급하게 책장에서 책을 찾아내다가 우르르 쏟아져 떨어지는 책들이 내는 둔탁한 소리 같은 것들이 내가 책에 대해 갖는 인상이다.
이것은 어쩌면 디지털 시대가 오기 전 책의 시대를 살았던 많은 분들이 갖는 공통적인 인상일 지도 모른다. 책에는 그 매체가 지니는 기능적인 어떤 것을 넘어서는 독특한 아우라 같은 것이 있다. 따라서 내 경우에는 책을 읽는 것이 물론 어떤 기능적인 목적성에 의한 것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 어린 시절 책과 접했던 잊지 못할 경험을 계속하고픈 감각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런 막연한 향수와 유혹을 이기지 못해 어떤 구체적인 책을 읽겠다는 생각도 없이 찾아간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들을 읽었을 뿐이다. 그것이 지식이 되고, 그 지식을 실타래처럼 뽑아내어 맥락의 얼개를 짜내 글을 쓰는 것으로 먹고살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지금 먹고사는 이유는 어쩌면 그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했던 책 찾기 놀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될 때도 있다.
디지털 시대에 들어와서 원고지를 치우고 컴퓨터 자판 앞에 처음 앉았을 때의 그 허전함은 바로 그 종이가 주는 아날로그적 경험치를 이제는 과거의 한구석으로 접어두어야 한다는 아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사람은 적응하기 나름인지라, 처음에는 자판과 머리가 공조하지 못하던 글 작업은 차츰차츰 적응이 되어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프린터로 뽑아내어 책상 한 귀퉁이에 종이를 쌓아둘 수 있었다는 것. 하지만 파일로 작성해 이메일로 전송해버리는 요즘은 그마저도 별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책이 가지고 있던 아날로그적 특성들을 하나씩 지워내고 달랑 내용들만 남겨지는 세상을 향해 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물론 문자매체 자체가 시각에 의존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거기에 책이라는 구체적인 등가물이 있어서 손으로 만져도 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책장 넘어가는 그 소리를 음미했던 시절이 있었다면, 이제는 전적으로 시각에 밀착된 책의 시대가 오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뷰어 하나씩 갖고 하드디스크에 수천 권의 책을 담아 보는 시대. 그때가 되면 그 수천 권의 책들이 놓여진 도서관에서 그 책들이 뿜어내는 아우라에 젖어 있던 그 감성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책에 대한 감각적인 유혹이 책을 찾게 만들고 읽게 만들었던 것처럼, 이제 디지털 시대에 와서는 글의 어떤 것들이 그 안의 내용들을 읽게 만들까. 보다 현란한 멀티미디어적인 콘텐츠들의 유혹? 소리와 색상이 가지는 원색적인 유혹? 아니 그것보다는 글자가 가지는 유혹이 더 크지 않을까. 이른바 제목들이 갖는 수많은 낚시질들의 향연. 어린 시절, 책장 앞에서 아버지가 불러주는 책을 찾기 위해 제목들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 시절의 설렘과는 전혀 다른, 그 무엇.
책이 골동품처럼 되어버린 어느 시기에 우리는 모두 저마다 각자의 책에 대한 기억들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당신 바로 옆에 있는 한 권의 책, 그 일상 속에 붙박인 상투적인 그림처럼 존재하는 그 책이 어찌 소중하지 않을까. 문득 책 한 권을 들어도 보고, 만져도 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또 책장을 넘기며 그 소리도 들어보는 건, 어린 시절 아버지와 했던 그 책 찾기 놀이의 아련한 추억처럼, 언젠가 지금 이 순간의 기억이 추억으로 도래할 것임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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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이고 칼럼니스트이다. TV나 영화 같은 대중적인 문화 속에 담겨진 현실을 모색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소녀시대, 빅뱅의 아저씨 팬이고, 유재석과 강호동의 팬이면서, 벤야민이나 맥루한의 팬이기도 하다. 늘 TV를 끼고 살고 영화관을 전전하는 삶에 대해 혹자들은 부러움을 표명하기도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현재 YTN라디오의 고정패널로 대중문화 관련 가이드를 하고 있고, 잡다한 방송출연과 잡지기고, 칼럼기고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공간, 인간, 시간'이라는 주제로 우리의 대중문화를 바라볼 수 있는 책을 집필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