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 이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서 지금 딛고 있는 땅, 숨 쉬고 있는 저 대기, 마시고 있는 저 물 같은 것들이 사실은 누군가의 희생과 노력에 의해 제공되고 있다고. 만일 그렇다면 바로 그 ‘누군가’에 대해서 당신은 충분한 감사의 표시를 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도대체 그 ‘누군가’가 누구냐고 되물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바로 그 누군가는 분명히 있다. 당신이 딛고 있는 땅은 그냥 존재하는 게 아니다. 지렁이 같은 생물은 물론이고 수많은 미생물들의 노력에 의해 거기 있는 것이다. 당신이 숨 쉬고 있는 대기 역시 매연 속에서도 불평 없이 산소를 내어주는 나무들이 있어 존재하는 것이며, 물은 당신에게 오기까지 기꺼이 수많은 길을 휘돌아 왔기에 거기 있는 것이다. 그러니 생각해 보라. 얼마나 고마운 존재들인가.
이것은 그저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는 자연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당신이 아무것도 모른 채 잠자고 있는 사이, 밤새 당신이 어질러놓은 거리를 묵묵히 청소하는 사람이 있고, 당신의 편안한 잠자리를 위해 밤을 지키는 경찰아저씨, 군인아저씨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또 그다지 멀리서 찾지 않아도 우리 곁에 늘 있다. 당신이 당연한 듯 편안하게 살아가게 하기 위해 저 바깥에서 아무리 힘겨운 일도 마다치 않는 우리네 가장들이 있지 않은가. 또 당신이 마음껏 밖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묵묵히 가정을 살리는 우리네 살림꾼들도 있다. 늘 우리 뒤에는 항상 그 누군가가 있다. 그리고 그 누군가를 우리는 대개 바보를 대하듯, 당연하게 여기거나 혹은 평가절하하면서 살아간다.
오래전, 인터넷으로 연재된 강풀의 만화 『바보』를 보면서 눈 끝이 매웠던 것은 그걸 보던 시간대가 눈이 뻑뻑해질 한밤중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보라는 말의 상투적 의미에 매몰되어 살아오던 진짜 바보 같은 가슴 언저리를 둔중하게 내리누르는 그 새로운 의미가 주는 회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바보라고 말할 때, 그 바보는 물론 정신적으로 어떤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을 지칭한다. 그러나 바보라는 말은 이것 말고 다른 의미로도 쓰인다. 그것은 자기 잇속 챙기지 못하고 남에게 늘 희생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바보라는 말에 기대 표현한다.
강풀의 만화 『바보』에서 바보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갖고 있었다. 독자들은 처음 바보를 전자의 의미를 갖고 바라보다가, 차츰 텍스트를 읽어나가면서 후자의 의미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 과정은 위에서 말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며 딛고 있던 땅에 대해 갑자기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되는 것과 거의 같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더럽고 무언가 위협적으로만 느껴왔던 바보란 존재에 대해서 결국에 그 자체로 고마운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바보』에서 승룡이는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더러운 것을 막아주면서 저 자신은 낡고 허름해져도 묵묵히 아무 말 없는 신발 같은 존재다. 그는 바로 그 비천한 위치에 있는(장애가 있다는) 바보라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백안시된다. 아버지는 연탄가스로부터 그를 구하고는 돌아가셨고(그로 인해 승룡이는 바보가 된다), 그런 승룡이에게 어머니는 돌아가시며 여동생 지인이를 맡기셨다. 지인이는 그러나 승룡이를 바보라는 이유로 싫어한다. 그런 그녀를 늘 한 걸음 뒤에서 돌보는 건 승룡이다. 승룡이의 친구였던 지호와 상수마저도, 어린 시절 승룡이에게 상처를 준 인물들이다. 그런 그들을 역시 승룡이는 늘 변함없는 마음의 친구로서 대한다.
‘바보’가 말하려는 것은 저 길바닥에 있던, 그래서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던 바보가 자꾸 들여다보면 나와 굉장히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에서 바보는 늘 주는 쪽이고 나는 받으면서도 바보를 밀어내는 쪽이다. 바로 그 관계를 만화를 통해 발견하는 순간, 때늦은 참회가 밀려온다. 그렇게 주변을 다시 둘러보면 새롭게 보이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우리는 왜 그다지도 무심하게 살아왔던가.
깨달음은 짧고 삶은 무뎌지는 터라, 그런 생각들은 또다시 상투 속으로 묻히고 바쁜 일상 속에 마모되어 버렸었나 보다. 그러다 그 바보라는 단어가 다시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시고 그 생애를 정리한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생전에 그리신 그림에 씌어진 “바보야”라는 글귀 때문이었다. 추기경이 돌아가시기 전 그린 자화상이었다. 왜 “바보야”라고 쓰셨는가에 대해 묻자, 추기경은 “제가 잘났으면 뭘 그렇게 크게 잘났겠어요. 다 같은 인간인데… 안다고 나대는 것이 바보지. 그런 식으로 보면 내가 제일 바보스럽게 살았는지도 몰라요” 하고 말했다. 그 전시회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 뭐냐고 묻자, 추기경은 “바보…”라고 말하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사람 좋은 웃음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셨을 때도 영상 속에 남아 내내 가슴을 아리게 만들었다. 어쩌면 저렇게 힘든 길만 골라서 갔을까. 그래도 웃으면서 자신의 힘든 삶조차 농담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웃기는 걸 보고 정말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을 웃기는 자는 자신의 고통을 숨긴다고 하는데, 그 웃음 속에 숨겨진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위대한 바보의 웃음은 수많은 사람들을 정말로 웃게 했을 것이다. 세상은 그런 바보들에 의해 순간 살 만한 것이 되어버린다.
현실에서 바보 같은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그러한 것처럼 『바보』 속의 승룡이 역시 자신을 기꺼이(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기에 ‘기꺼이’다) 희생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다시 살아가게 해준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예수의 희생을 닮았다. 바보 입장에서 보면 이 세상은 참으로 죄가 많다. 그러나 그 죄를 모두 짊어지고 바보는 희생함으로써 세상을 살리는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것은 기적을 낳는다. 지호는 비로소 바보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상수는 암울한 과거를 털어 버리고 새로운 삶을 갖게 되며, 지인이는 그동안 잃고 있었던(사실은 거부하고 있었던) 자신의 오빠를 되찾게 된다. 동사무소에 사망신고를 하러 간 지인이에게 사무소 직원이 관계를 물었을 때, 반복하는 이야기, “이 사람은 제 오빠구요. 저는 이 사람 동생이에요” 라는 말은 지인이의 다짐이면서,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에 대한 호소이기도 하다. 당신이 늘 당연시하며, 혹은 심지어 평가절하했던 존재들은 바보같이도 당신을 위해 희생하고 있던 당신의 오빠이자, 동생이자, 아빠이자, 엄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위대한 바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흘리는 당신의 눈물은 이미 그 바보들에 의해 당신 역시도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승룡이도, 김수환 추기경도, 김대중 전 대통령도 그렇게 우리에게 눈물 한 방울과 웃음 한 자락씩을 남기고 간 위대한 바보들이다. 그러니 이제 남은 건 바로 그 당신이 바보라 칭해왔던 이들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진정한 고마운 마음으로 껴안는 일이다. 세상의 모든 바보들은 아름답다. 그리고 그들이 있어 세상이 아름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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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이고 칼럼니스트이다. TV나 영화 같은 대중적인 문화 속에 담겨진 현실을 모색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소녀시대, 빅뱅의 아저씨 팬이고, 유재석과 강호동의 팬이면서, 벤야민이나 맥루한의 팬이기도 하다. 늘 TV를 끼고 살고 영화관을 전전하는 삶에 대해 혹자들은 부러움을 표명하기도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현재 YTN라디오의 고정패널로 대중문화 관련 가이드를 하고 있고, 잡다한 방송출연과 잡지기고, 칼럼기고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공간, 인간, 시간'이라는 주제로 우리의 대중문화를 바라볼 수 있는 책을 집필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