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이거야?”
첨성대 앞에 선 아이는 잔뜩 실망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가족은 첨성대를 보기 위해 경기도에서 경주까지 무려 다섯 시간을 달려온 터였다. 아이의 손에는 『선덕여왕과 신라영웅들』이라는 책이 들려 있었다. 드라마 <선덕여왕>을 어깨너머로 보던 아이는 어느새 <선덕여왕>의 팬이 되어 있었고, 여름방학이 되자 경주로 놀러 가자고 졸랐다. 아마도 그 드라마와 책에 있던 내용들을 직접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서 보니 첨성대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고, 심지어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이의 실망을 쉬 이해할 수 있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 마음이었으니까.
드라마 속에서 덕만(이요원)은 바로 이 첨성대를 세울 것을 내세워, 천문을 읽는 월천대사의 마음을 돌렸다. 이것은 드라마 속에서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신라의 권력을 송두리째 미실(고현정)이 쥐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월천대사가 알려주는 천문의 정보를 독점해 정치에 이용했기 때문이다. 덕만은 바로 그 미실이 독점한 천문의 정보를 첨성대를 세워 백성들에게 돌려주려고 한 것이다. 물론 이 드라마 속의 이야기가 실제 역사의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주는 감흥은 적지 않다. 첨성대라는 역사책에서나 보던 이름이 이토록 큰 느낌을 준 것은, 거기에 덧붙여진 이야기가 그럴 듯하고 또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야기가 만들어낸 거대함과 실제의 아담함(?)이 주는 대비효과가 왜 크지 않았겠는가. 이것은 또한 드라마 속에서 미실이 천문을 갖고 만들어내는 이야기와 맥을 같이한다. 하늘의 일식은 그 과학적인 원리를 몰랐던 당시에 백성들에게는 공포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거기에 미실은 이야기를 덧붙인다. ‘태양이 사라진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이니 그 불길함을 없애기 위해서는 가야 백성들을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저 보이는 징조에 이야기를 덧붙이니 그 징후는 실로 거대한 사건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이야기가 가진 힘이다. 미실의 진짜 힘은 천문을 읽는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고, 그 사실에 이야기를 덧붙이는 스토리텔러로서의 능력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 미실과 대적하는 덕만 역시 미실의 방법을 이용한다는 점이다. 즉 그녀 역시 스토리텔러다. 그녀는 미실에게 거짓 정보를 주어 일식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공표하게 하고, 실제로 일어날 일식의 예언으로서 등장한다. 물론 그 예언은 미리 덕만이 조작해 퍼뜨린 것이다. 그러니 덕만의 스토리 구성 능력은 미실보다 한 수 위다. 게다가 그녀는 그렇게 스토리텔러로서의 힘을 발휘해 자신의 위치를 확보한 후에, 그 거짓들을 다시 되돌려놓으려고 한다. 첨성대를 세워, 천문이 신적인 능력이 아니라 과학임을 알리려는 것이다.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이것이 완벽한 스토리텔링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사극 속 인물들은 과거처럼 칼을 들고 서로 싸우기보다는, 이야기로서 싸움을 한다. 그것은 물론 정치의 다른 말이다.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퍼뜨리고 조직하는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그녀들은 어쩌면 지금 이 시대를 잘 표현하는 인물들로 보인다. 지금은 정보전의 시대고, 감성의 시대며, 이야기의 시대, 즉 스토리텔링의 시대이기도 하다. 흔히 <선덕여왕>에서 발견하게 되는 여성적 카리스마라는 것은 바로 이 감성의 시대가 요구하는 이야기를 무기로 삼은 여성성이 극대화된 현대인들의 창의적인 리더십을 말하는 것만 같다.
실제를 보고는 실망하는 아이에게 불쑥 별자리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게 별자리는 언제부턴가 스토리텔링의 완벽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선덕여왕>을 보면서 화두처럼 던져지는 “북두칠성의 개양성이 둘로 갈라져 여덟이 되는 날, 미실을 대적할 자가 오리라”는 예언에서도, 천문을 사이에 두고 권력의 대결구도를 벌이는 스토리텔러들 미실과 덕만의 말싸움을 보면서도, 그것이 모두 스토리텔링의 의미를 환기시킨 것은 바로 그 별자리의 이미지가 강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끝날 때, 인물의 정지된 화면 위로 반짝반짝 빛나며 별자리들이 드리워지는 엔딩장면은 늘 이 이야기가 별자리의 스토리텔링을 구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아주 오래전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의 조상들에게 하늘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거야.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그 하늘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했어. 허공에 손을 들어서 아무 연관 없이 떠 있는 별들을 이리 연결하고 저리 연결하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만든 거야.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 손에 방망이를 든 것 같은 오리온자리, 전갈 모양의 전갈자리… 그렇게 그림을 그리듯이 별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내자 하늘은 다른 존재로 변해 있었어. 수많은 이야기들, 그것도 알 수 없는 두려운 존재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와 똑같은 형상을 지닌 존재들의 친근한 이야기들이 거기 있었지. 별자리를 만드는 행위는 그래서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해주었어. 불안한 하늘과 불안한 내일을 그 별자리는 이야기를 통해 어떤 희망으로 바꿀 수 있었지. 첨성대는 그 별을 보던 곳이야. 덕만은 별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걸 백성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었던 거야. 백성들 스스로 각자 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말이지.”
각각의 흩어져 있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 별들을 가지고, 어떤 맥락을 만들어 이야기로 꾸민 별자리 이야기는 정보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세상에는 별처럼 산개한 정보들이 무수히 널려 있다. 그것들은 각각 존재할 뿐, 어떤 연관관계를 가지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걸 바라보는 사람이 별자리를 만들 듯, 정보들의 맥락을 이어나갈 때, 그것들은 드디어 의미를 갖게 된다. 정보에 맥락을 부여하는 기술, 그것이 바로 스토리텔링이 가진 힘이다. 무의미한 세상에 의미 부여하기. 어쩌면 그것은 인간의 생존이 달린 문제인지도 모른다.
사실, 문득문득 산다는 건 아무런 맥락도 없고, 무차별적이며, 논리적이지도 않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그저 굴러가는 것이고, 정해진 것은 딱 하나, 결국엔 죽는다는 것뿐이라는 인식에 다다를 때, 마음은 한없이 공허해진다. 무엇을 위해 이 고생을 하고 있고, 무엇을 위해 이렇게 숨을 쉬고 있는가, 또 무엇을 위해 이토록 헌신적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들이 집요하게 머리를 파고들어 온다. 이것은 어쩌면 저 원시에 벌거벗은 인간들이 했던 그 고민과 다를 게 뭐가 있을까. 그들 역시 그저 아무런 이유 없이 우연한 계기로 죽음을 맞이하고 하나씩 사라져갔던 주변인들을 바라보며 “내가 왜?”하고 질문하지 않았을까. 그러니 그들이 별을 보며 별자리를 이야기로 만들고, 삶을 바라보며 삶의 어떤 성장의 그림을 그리게 한 그 능력은 우리 인간에게 가장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을 살면서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는 내일을 그려보는 능력. 허구에 기대 현실을 바꾸는 그 능력.
덕만도 별자리를 보며 자신의 앞날을 그려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림이 없었다면 그녀는 결코 여왕의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현실은 상상을 만들고, 상상은 현실을 만든다. 경주의 별 밝은 밤, 아이와 별자리를 그려보며 나는 속으로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이야. 이제는 상상을 하렴. 저 보잘것없는 실체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 실체 뒤에 있는 어마어마하게 큰 꿈을 떠올려보렴. 그것이 너를 꿈처럼 크게 만들어줄 거야.’
이것은 우리가 늘 지나치며 상투로 치부하며 살아가는 모든 것들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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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이고 칼럼니스트이다. TV나 영화 같은 대중적인 문화 속에 담겨진 현실을 모색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소녀시대, 빅뱅의 아저씨 팬이고, 유재석과 강호동의 팬이면서, 벤야민이나 맥루한의 팬이기도 하다. 늘 TV를 끼고 살고 영화관을 전전하는 삶에 대해 혹자들은 부러움을 표명하기도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현재 YTN라디오의 고정패널로 대중문화 관련 가이드를 하고 있고, 잡다한 방송출연과 잡지기고, 칼럼기고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공간, 인간, 시간'이라는 주제로 우리의 대중문화를 바라볼 수 있는 책을 집필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