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에서 떠올려본 국가
성장해 친엄마를 찾기 위해 국내로 들어온 입양아, 나이트클럽 웨이터, 아버지 밑에서 숯불 피우는 것으로 청춘을 보낸 고깃집 아들, 할머니와 동생을 돌보는 소년 가장, 어딘지 나사가 하나 풀린 듯한 그 가장의 동생, 그리고 이들의 코치인 전 어린이 스키교실 강사까지. 영화 <국가대표>에 등장하는 캐릭터들과 국가대표라는 말에는 전혀 울림이 없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차헌태(하정우)라는 캐릭터는 말한다. “나 버린 나라에 국가대표? 웃기는 거 알죠?”
그러니 이들에게 국가대표라는 이름을 준 국가는 이들에 대한 진심이 없다. 그들을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스키점프대 위에 세운 것은, 어울리지 않는 국가대표라는 이름을 부여한 것처럼, 전시를 위한 것이지 그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함이 아니다. 그래서 스키점프대는 마치 그들이 몰려 있는 극한의 벼랑처럼 보인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그들 스스로도 진심 없는 국가의 술책에 의해 그 스키점프대라는 극한의 벼랑에 서 있으면서도, 바로 그 지점에서 그들은 주저하기보다는 날기로 결심한다. 왜 그랬을까. 여전히 국가라는 단어에 대한 울림이 남아서? 설마?
국가는 그들을 버린다. 하지만 그들은 국가를 버리지 않는다. 이것이 <국가대표>라는 영화가 가진 보수적인 정서다. 여기서 국가는 여러 인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동계올림픽 유치에만 관심이 있지, 그걸 위해 사실상 희생되어야 하는 스키점프 팀에는 관심이 없는 조직위원장, 먹고 살기 힘들어 자식을 입양시킨 차헌태의 어머니, “니 인생도 대표를 못하는데 우리나라를 대표한다고?” 하며 자식을 골프채로 두들겨 패는 아버지, 그리고 자식의 울타리는커녕 오히려 짐이 되는 가족까지, 모두 국가의 또 다른 모습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국가의 대표가 된다. 국가대표가 되어 자신을 버린 국가를 울린다.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들이 태극기 앞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애국가를 부르는 장면 속에는 기묘한 감정들이 교차한다. 그것은 애증이자 토로다. 왜 날 버렸느냐는 증오의 투정 속에는 그래도 날 사랑하느냐는 어린 아이 같은 애정결핍의 징후가 어른거린다. 국가라는 코드는 지구촌이라는 말이 대변해주는 21세기적 정서 속에서도 여전히 힘을 발하고 있는 것일까. 과거에는 모든 것의 맨 앞자리에 서서 개인을 구속하던 단어, 국가. 이제는 지극히 상투적인 것이 되어 있는 이 단어는 어떻게 흘러왔고 지금 서 있는 위치는 어디쯤일까.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당대 국가의 억압에 대한 우리네 정조를 영화관에서 울려 퍼지는 애국가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일제히 일어나 부동자세로 애국가를 경청하는 이 웃지 못 할 희극의 상황 속에서 대중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국가를 비웃었다. 그 저항의 풍경은 주로 동시상영관에서 연출되곤 했다. 그곳에서는 통제된 질서가 공기 속에 퍼져 있던 호화로운 샹들리에의 개봉관과는 달리, 어딘지 음습하고 퀴퀴한 냄새를 소외의 향기처럼 품고 있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사람들은, 부동자세로 일어나기는커녕 거의 드러눕듯이 앉아서 심지어 담배를 피워댔다. 대낮부터 어둠을 찾아들어 온 지질함들이 여기저기 피어 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몸으로 체화된 국가에 대한 소극적인 반항이었다. 국가는 그들을 버렸다. 그래서 그들도 국가의 말을 듣지 않는다. 적어도 영화관처럼 현실을 잊기 위해 들어간 공간에서는 더더욱.
영화관에서 애국가가 사라진 후, 우리는 영화 속에서 종종 국가를 대면해왔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쉬리> 같은 이른바 흥행 대박을 친 영화들 속에서는 늘 국가가 꿈틀거렸다. <실미도>에서는 국가가 버린 군인들이 모두 죽음을 맞이했고,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국가가 한 형제를 비극적인 운명 속으로 몰아넣었다. <쉬리>는 국가라는 이름 아래 한 개인적 멜로는 비극을 맞이하고 만다. 이들 영화들은 마치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네 민족의 비극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그 속을 들여다보면 국가가 버린 개인을 다루고 있다. 그들의 파괴된 개인적인 삶은 오히려 개발시대가 남긴 후유증을 떠올리게 한다. 잘 사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개인적 삶은 저당 잡혔고, 그렇게 키워낸 국가가 실상 자신에게 해준 것은 없다는 허탈한 인식. 국가는 그렇게 공공연하게 끄집어내져 비판받는 존재가 되기 시작했다.
민주화를 거쳐 국가라는 거대담론이 촌스러운 어떤 것으로 치부되던 상황에서도 여전히 국가는 그림자 속에 자리했다. <괴물>, <추격자> 같은 대박 영화들 속에서 국가는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숨겨진 적으로써 등장한다. 카메라 앵글 속에서 국가는 보이지 않지만, 카메라 앵글 안의 사건들은 카메라 바깥에 존재하는 국가로부터 생겨나는 것이었다. <괴물>에서 국가는 괴물로부터 국민을 지켜주기는커녕 오히려 국민을 억압하는 존재로 어찌 보면 진짜 괴물처럼 보였고, <추격자>에서 국가는 가까스로 잡은 괴물 같은 연쇄살인범을 오히려 풀어주는 무능력을 보였다. 이 영화들 속에서 국가는 이제 괴물이 되었다. 국가가 방조하는 괴물과 사투를 벌이는 이들에게, 국가란 존재는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한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설령 그것이 국가적인 문제라 할지라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국가는 오히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존재다.
이처럼 국가라는 말이 애국이라는 의미에서 떨어져 나와 이제는 괴물로 치부될 정도로 상투적인 어떤 것이 된 마당에, 불쑥 튀어나온 <국가대표>라는 영화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이 영화 속에서 국가는 괴물이면서, 동시에 애국이라는 보수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존재로 등장한다. 철저하게 개인을 희생시키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괴물 같은 국가. 그럼에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진짜 국가대표가 되는 개인들. 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정체가 하나로 묶일 수 있는 것은 이 영화가 스포츠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국가가 들먹여지는 것은 전쟁 같은 피부로 와 닿는 국가적 분쟁 속에서나 가능하다. 그러니 전쟁 이외에 국가라는 향수를 가장 강력하게 발휘하는 것은 전쟁을 패러디한 스포츠의 세계다. <국가대표>는 바로 그 스포츠가 향수하려는 국가에 대한 대중들의 양가감정을 스키점프라는 종목을 통해 보여준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서민들을 무자비하게도 스키점프대 위로 내모는 괴물 같은 국가와 그 절체절명의 상황을 이겨내고 오히려 새처럼 활강함으로써 그 복잡한 현실을 단번에 뛰어넘는 개인.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 끄집어내지는 과거 국가에 대한 향수. <국가대표>는 바로 그 사라져가는 국가에 대한 마지막 향수를 스포츠를 통해 끌어내는 영화다.
이 땅에 앉아 마우스를 클릭하고 자판을 두드리는 것만으로 뉴욕의 증시현황을 보고, 파리에서 물품을 구입하며, 중국의 여행지를 살펴보는 시대에, 국가는 이제 지기 시작하는 해처럼 그 존재가 흐려지고 있다. 의식과 공간의 불일치. 이 공간에서 다른 공간을 의식하게 만드는 매체들로 인해 국가는 그 공간적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국가적인 틀로 사고하기보다는 이제 전 지구적인 틀로 사고하는 것이 일반화되어가는 마당에, 국가는 정치적인 차별성보다 경제 문화적인 차별성이 오히려 강조되는 경향을 띠고 있다. 이런 세계 속에서 민족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나 통할 수 있는 애국에 대한 정서는, 전 지구적이라 할 수 있는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정서 속에 묻힐 수밖에 없다. 국가라는 단어는 앞으로도 여전히 우리를 뭉클하게 만들 수 있을까. 글쎄. 이미 상투적인 의미로 전락해가고 있는 국가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점점 무심해져 갈 것이 분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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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이고 칼럼니스트이다. TV나 영화 같은 대중적인 문화 속에 담겨진 현실을 모색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소녀시대, 빅뱅의 아저씨 팬이고, 유재석과 강호동의 팬이면서, 벤야민이나 맥루한의 팬이기도 하다. 늘 TV를 끼고 살고 영화관을 전전하는 삶에 대해 혹자들은 부러움을 표명하기도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현재 YTN라디오의 고정패널로 대중문화 관련 가이드를 하고 있고, 잡다한 방송출연과 잡지기고, 칼럼기고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공간, 인간, 시간'이라는 주제로 우리의 대중문화를 바라볼 수 있는 책을 집필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