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늦은 여름밤, 검은 슬립의 여인은 제단이 치워진 사원의 차갑고 웅장한 대리석 홀에 홀로 앉아 있었다. 이따금 아랫춤을 흔드는 커튼이 드리워진 넓은 창으로 달빛이 스몄다. 그녀의 치렁치렁한 머리칼을 따라 내려온 달빛이 하얗게 빛나는 긴 다리로 흘러 대리석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었고 그날은 축제의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무표정하게 남아 있는 시간들을 준비했다. 남아 있는 시간들의 순서는 정해져 있었다. 그녀의 몸으로부터 흐른 슬픈 강물이 발치로 접근해 올 때 나는 피하지 않았다. 그때 난 맨발이었다. 그리고 거의, 알몸이었다. 강물은 대리석 바닥의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냉기가 내게 전해져 뒤꿈치를 타고 위로 치솟아 머리칼을 쭈뼛 세우고는 허공으로 휘발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슬픔의 띠로 칭칭 감겨 하나가 되었다. 나의 손은 허공을 쥐고 있었다. 마치 다가올 끝을 위해 준비해 놓은 둔중하고 날카로운 무기처럼, 허공의 잔인함이 손에 쥐어졌다. 허공은 내 손 안에서 무언가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노래하는 사람의 운명이 노래를 듣는 사람의 그것과 결국 하나가 되듯, 집행관은 늘 제물과 같은 운명이 되는 법이다. 어쩌면 이 흐름 속에서 내가 제물일지도 몰랐다. 지금 흐르는 이 시간은 마치 자장가의 시간과 같았다.
지난해 늦은 여름밤, 나는 울고 있는 그녀 앞에서, 허공을 바라본 채 조지 거쉬인의 <서머타임 Summer Time>을 흥얼거렸다. 그녀는 슬쩍 고개를 들어 지금 이 순간 자장가를 흥얼거리는 나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것보다 더 잔인한 노래가 또 있을까. 몸서리쳐지도록 무시무시한 노래였다. 나는 이 자장가를 가능한 한 동요 없이, 아무 일 없을 거라는 암시가 전달되도록 담담하게 불러 나갔다. 마치 엄마가 자장가를 부를 때 아가를 잠에 빠뜨리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가야, 아무 일 없을 거야, 너는 죽는 게 아니란다, 단지 잠에 빠지는 것이니 울지 말고 어서 잠들려무나.”
여름날 삶은 아무렇지도 않고…
Summer time, and the livin' is easy…
거쉬인의 이 노래는 2,600개가 넘는 버전이 있다. 20세기 가장 히트한 노래 중의 하나일 수 있다. ‘둥기둥…’ 하는 첫 마디의 리듬은 아가가 자는 것을 돕기 위해 부드럽게 흔들리는 요람의 진동을 느끼게 해준다. <서머 타임>을 듣는 사람은, 심지어 이 노래가 자장가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조차도, 의식하지 못한 채로 그 첫 마디의 리듬을 따라 아가가 잠 속에 빠지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서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아가를 재우는 클라라가 된다. 그렇다. 이 노래는 아가를 재우는 클라라의 노래다. 클라라는 누구인가. 듀보스 헤이워드(Duboss Heyward)가 쓴 희곡에 조지 거쉬인이 음악을 붙인 니그로 오페라 <포기와 베스>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 오페라 속에서 <서머타임>을 부르는 그녀는 주연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의 역할은 <서머타임> 때문에라도 매우 중요하다. 오페라 <포기와 베스>의 첫 장면에 클라라가 자기 아이를 재우며 이 노래를 부른다. <포기와 베스>에 <서머 타임>은 네 번 나오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고 그 중의 한 번은 3막에서 베스가 부르기도 한다. 극을 이끄는 중심 테마다.
아가를 재우는 일은 무엇일까. 그건 무엇보다도 부드럽게 시간이 가길 바라는 일이다. 아가가 잠에 빠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모든 것이 조용한 방을 떠다니는 먼지처럼 서서히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초침의 간격이 점점 벌어져 나중에는 영원의 간격으로 확장되는 것을 느낀다. 살바도르 달리가 그린, 늘어진 시계. 아가를 재우는 일은 아가를 꿈의 상태, 사이키델릭한 혼돈의 상태로 끌어들이는 일이다. 그 시간 동안의 권태를 참으며 느릿느릿 그 권태를 즐기는 일, 그 권태 속에서 아가가 망각의 상태로 빠지기를 기다리는 일이다. 아가를 재우는 일은 조용한 유혹이다. 아가를 재우다 보면 자기 자신도 잠든다. 남을 유혹해 놓고 결국에는 그 유혹의 심연에 함께 빠지는 일이다. 클라라는 그렇게 아가를 잠 속으로 유혹하고 오페라 <포기와 베스>는 조용히, 그렇게 관객들을 마력적인 자기 세계 속으로, 일종의 반수면 상태로 끌어들이며 시작한다… 엄마는, 그리고 엄마의 시간은 아가와 함께 그렇게 죽음의 호수에 빠진다. 또는, 음악이 뚫어놓은 구멍으로 들어가 영원의 상태를 맛본다. 그 안에서 아가와 엄마는 하나다.
“음악이 하늘에 구멍을 뚫는다. (보들레르)”
그렇다. 순간 하늘에는 큰 구멍이 뚫렸다. 하늘이 열렸다. 열린 장막으로 빛이 새들어왔다. 나는 그녀의 흐느낌을 듣고 있었다. 나의 눈은 검은 휘장 사이로 빛나는 그 아름다운 몸을 향해 빛을 뿜었다. 그것이 달이었다. 음악은 그녀의 가슴에도, 나의 가슴에도 큰 구멍을 뚫어놓았다. 우리를 휘감은 슬픔의 주파수가 공명하며 하늘로 올라갈 때 죽음이 보였다. 빠르게 내려오는 것과 천천히 올라가는 것들이 마주치며 북소리를 만들었고 그때 튄 잔인한 파편들이 회오리처럼 휘돌면서 축제의 끝을 제사로 만드는 뼈아픈 멜로디를 만들었다. 나는 축문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황혼, 멱라수†
1
안녕, 은빛 강물
다발로 엮여 흘러가던
금빛 머리칼
니 속으로 뛰어들어가 적시던 내 몸
황혼의 둑에 말리고
나는 너를 그리며
붉게 잊으리
밤이 시작되면
그렇게 노랠 부르리
2
종이학 모양의 꽃이 핀
죽음의 세계
긴 휘장 두 장이 은하수를 타고 내려와
노을 가득한 강물에 다리를 적셔
향기가 나고
그 향기를 돛 삼아 떠나는 사람
오 기쁜 탄식이여
즐거운 비가여
널 보고 싶어 하고 싶지 않다
너의 표정은
멜로디처럼 지척에 있는데
반짝이는 별들 속엔
눈물이 출렁
술 달린 장식들과 하얀
살을
꿈꿔도 되니
† 멱라수(汨羅水):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미수이 강’을 이르던 말. 중국 초나라의 굴원이 투신한 강으로 알려져 있다.
언뜻 눈을 떴다. 꿈이었나. 우리는 강변북로를 질주하고 있다. 나는 핸들을 잡은 채 나도 모르게 어떤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있었나 보다. 아니, 라디오에서 어떤 노래가 나오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내 옆에 앉은 그녀는 잠들어 있다. 슬프고 지친 표정이다. 생일 케이크가 뒷자리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아직 포장을 뜯지도 않은 그 케이크는 상자 속에서 이리저리 놀아 모서리 부분이 문드러져 있다. 세레모니가 시작되기도 전에 훼손된 그 케이크가 지금의 상황을 말해준다. 이미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버렸고 그 노래는 시집에 실려버렸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 번 시집에 실린 시들은 영원히 그 시집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시들은 입에서 입으로, 마치 혀처럼, 또는 손에서 손으로, 마치 진동처럼, 눈에서 눈으로, 마치 실타래처럼, 귀에서 귀로, 마치 파도처럼 너울거리던 자유의 시기를 거친다. 그 시기를 거쳐 시는 마침내 화산이 터지듯 태어난다. 그리고는 천천히 시집 속에서 식는다. 그렇게 운명을 견디는 법, 또는 운명에 순응하는 법을 터득하면서 글자들로 남는다. 그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과 마찬가지다.
지난해 늦은 여름밤, 나는 그렇게 차갑고 푸르스름한 흥얼거림으로 장작더미에 불을 붙여 한 덩어리의 기억을 화형시켰다. 지금, 잿더미가 된 기억의 시체를 싣고 나는 어딘가로 돌아가고 있나. 새벽 네 시. 내가 그리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내가 돌아가는 곳은, 화려했던 오후의 산책로일지도 모른다. 오후는 차라리 적막했다. 언제나 그렇듯, 오후는 과거의 시간이다. 해가 넘어가면 우리는 모든 것이 붉어질 시간을 본능적으로 준비한다. 그리고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 오후는 과거의 시간이다.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함께 웃고 있다. 우리 이외에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이 적막의 융단에 반짝임을 수놓고 있는 바람소리와 햇빛의 속삭임, 이따금 들리는 새소리와 이제 지칠 대로 지쳐가는 초록 안에서 왠지 행복은 터질 것만 같아서 권태로웠다. 우리의 욕망은 핑크색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고 침처럼 흘러내리는 우리의 미소는 동물적이었다. 그때 벤치에 앉아서 듣던 노래를 너는 기억하니? 나의 기타소리를 들으며 흐뭇해하는 너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가던 바람의 부드러운 침입을 당연한 듯 허락하던 일을 기억하니? 술잔 안으로 꽃잎이 떨어졌지. 너는 또 해보고 또 해보고 또 해보라고, 자꾸자꾸 나에게 노래를 시켰고 내가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 부를 때마다 너는 조금씩 내게 다가왔고 취기가 올라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을 때마다 목소리의 잔영은 조금씩 부서져 갔고 그림자가 길어지면서 기억이 아련해질 만큼 멀어져 갈 때 결국 너는 내게 기댔지. 기억하니. 꽃향기 맡으러 언덕을 올라 조용한 벤치를 찾던 우리의 시간을.
꼭 그렇진 않았지만 구름 위에 뜬 기분이었어.
나무 사이 그녀 눈동자 신비한 빛을 발하고 있네.
잎새 끝에 매달린 햇살 간지런 바람에 흩어져.
뽀오얀 우윳빛 숲 속은 꿈꾸는 듯 아련했어.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우리들은 호숫가에 앉았지.
나무처럼 싱그런 그날은,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산울림)
우리 모두는 꼭 그렇지 않은, 딱히 뭐라 이야기할 수 없는 그런 정지된 시간을 가지고 있다. 삶의 공백, 진공 상태 속을 행복하게 부유하는 너와 나의 끝없이 반복되는 키스, 사랑한다는 그 말, 정말 아무 뜻도 없는 그 말, 완전한 거짓말, 그 말을 토해 놓고 서로 놀라 서로의 눈을 바라보게 되는, 다시는 헤어질 수 없을 것 같아서 너무나 치명적인, 그러나 이미 그 말을 한 바로 직후부터 헤어짐이 시작되는, 미래로 흐르던 시간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먼 과거로 빨려 내려가는, 그런, 다시 못 올, 조용할 때마다 이승으로 솟구쳐 오르며 노을을 이루는 그런 저승의 시간.
다시 옆을 보니 아무도 없다.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려 뒷자리를 보니 케이크도 없다. 모든 것이 사라졌고 비는 그쳐 있었다. 고속도로 진입로를 하염없이 걷던 나는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한기가 느껴졌다. 저녁이 오고, 선선한 바람이 분다.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 그때 우리 모두는 집으로 돌아간다. 지친 몸을 침대에 던질 때 그 누구도 내게 아무것도 묻지 말아 주길. 나는 나의 혀를 결이 다른 저 시간 속에 내동댕이치고 왔다. 나는 벙어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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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성기완
나는 오랫동안 시와 음악을 오갔다. 어쩌면 둘을 가르는 좁은 벽 위에 서 있었는지 모른다. 벽 위에서 시를 쓰고 노래를 만들고 기타를 쳤고 잡글을 썼다. 『쇼핑갔다 오십니까?』(1998), 『유리 이야기』(2003), 『당신의 텍스트』(2008), 이렇게 세 권의 시집을 냈고 『나무가 되는 법』(1999), 『당신의 노래』(2008), 이렇게 두 솔로 앨범을 발매했다. 산문집도 있다. 『장밋빛 도살장 풍경』(2002), 『홍대 앞 새벽 세시』(2009), 그렇게 두 권. 변변찮은 이 작품들은 내 꿈의 흔적들. 나는 만남을 꿈꾸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