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1959~)의 첫 소설집 『제망매』(1997)에는 흥미로운 제목을 지닌 단편 셋이 들어 있다. 표제작과 「찬 기 파랑」, 그리고 「서유기」가 그것들이다. 두루 알다피시 「제망매」와 「찬 기파랑」은 신라 향가들이고 『서유기』는 손오공과 삼장법사가 등장하는 중국 고전소설이다. 고종석의 소설집에서 「際亡妹」와 「西遊記」는 한자로 표기되었고 「讚 기 파랑」의 ‘찬’ 역시 한자를 사용했다. 한자의 이런 적극적인 사용은 같은 제목을 지닌 고전 작품들을 작가가 뚜렷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고종석의 ‘고전 삼부작’이 옛 노래와 소설 들을 단순히 현대적 버전으로 다시 쓴 것은 아니다. 표제작인 「제망매」는 월명사가 지은 향가와 마찬가지로 죽은 누이동생을 추모하는 내용이지만, 나머지 두 작품은 같은 제목의 원작과는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뒤에서 상술하겠지만, 「찬 기 파랑」의 경우에 의표를 찌르는 설정이 돋보이며 「서유기」 역시 제목과 내용 사이의 심각한 불일치로 독자의 의식에 상당한 충격을 선사한다. 유일하게 옛 노래의 틀을 좇은 「제망매」에서도 ‘죽은 누이에 대한 사랑’이라는 작품의 주제에는 어느 정도의 현대적 변용이 가해진다.
삶과 죽음의 길은
예 있으매 머뭇거리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 다 이르고 어찌 가나닛고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온저
아아,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날 나
도 닦아 기다리겠노라
일연의 『삼국유사』 권 제5 ‘감통’(感通) 중 「월명사의 도솔가」 편에 나오는 「제망매가」의 전문이다. “월명이 또 일찍이 죽은 누이를 위해서 재를 올리고 향가를 지어 제사했는데, 갑자기 모진 바람이 불어 지전(紙錢)을 서쪽으로 날려 없어지게 했다”는 설명과 함께 실린 작품이다. 고종석의 「제망매」 역시 화자인 ‘나’의 이종사촌 누이인 ‘김혜원’의 죽음을 소재로 삼는다. 장기 체류 예정으로 프랑스 파리에 와 있는 ‘나’가 업무상 파리에 들른 매제한테서 혜원이 보름쯤 전에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그 자신 의사였던 혜원은 골수암에 스러지고 말았거니와, 세는 나이로 겨우 서른셋 창창한 나이였다.
“그래, 혜원이는 이 세상에 없다. 그래…… 그런데…… 그 아이는 이 세상에 있었던 것일까? 그 아이는 분명히 나를 스쳐 지나간 것일까? 나는 분명히 그 아이를 스쳐 지나온 것일까? 혹시 그것은 모두 꿈이 아니었을까?”
혜원의 소식을 듣고 ‘나’의 머릿속을 오간 혼란스러운 사념은 월명사의 옛 노래에서 만져지는 당혹감과 애통함에 대응한다. 고종석의 소설 「제망매」는 화자가 그런 아득한 혼란 속에서 김혜원이라는 인물이 엄연히 실재했으며 앞으로도, 적어도 자신의 기억 속에서는, 끝끝내 살아 있으리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의례와도 같다.
소설은 ‘나’가 혜원과의 지난 일들을 회고하는 부분과 혜원의 소식을 듣고서 ‘나’가 매제 및 옛 신문사 동료인 ‘정경희’와 함께 파리의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반나절의 이야기가 교차되어 진행된다. 혜원이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그가 열일곱 살이고 혜원이 열네 살이었던 1975년 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다니던 서울의 고등학교 2학년 과정에서 퇴학 당한 ‘나’가 전주의 혜원 집에 가 석 달 동안 머물렀던 것. 박정희가 학도호국단과 민방위 제도를 부활시켜서 “어린 학생부터 50대의 장년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다스리던 신민 전체의 군대식 편제화를 완수했”던 그 해의 봄에서 여름에 이르는 석 달이 ‘나’에게는 오히려 달콤한 해방의 날들로 기억된다. 콘아이스크림의 맛으로 표현되는 그 달콤함에는 혜원과 함께 산책하고 자전거를 타며 이야기를 나누던 일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린 혜원과의 입맞춤이 남긴 자릿함이 가미되어 있다.
그렇다. 이종사촌 사이인데다 피차 아직 십대 중반과 후반 나이인 두 사람은 비록 가벼운 터치라고는 해도 입술을 맞댄 일이 있다. 그리고 그 점이 월명사의 옛 노래에 대한 고종석 소설 「제망매」의 현대적 변용의 가장 큰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종사촌 사이인 십대 중후반 소년·소녀의 입맞춤을 ‘근친상간’이라는 말이 거느린 어두운 열정의 뉘앙스 속에 가둘 일만은 아니다. 그 입맞춤에 생물학적인 욕망이 얹히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근친간의 교접을 금지하는 관습과 제도가 두 어린 영혼들의 욕망에 필요한 제약을 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초여름 밤 옥상에서 얘기를 나누던 끝에 처음에는 이마에, 다음에는 입술에 갖다 댄 ‘나’의 입술을 두고 혜원은 “오빠 입술이 아이스콘 같았어”라 품평(?)하고, ‘나’는 그런 혜원의 뒷머리를 주먹으로 가볍게 쥐어박지 않았겠는가. 그 주먹질은 자신들의 입맞춤에 혹시라도 따라붙을지 모르는 어두운 그림자를 떨쳐 버리려는 상징적 행위라 할 수 있다.
혜원과의 두 번째 기억은 1980년 봄으로 이어진다. 이번에는 서울의 의과대학에 입학한 혜원이 ‘나’의 집에서 지냈던 2년 동안이다. 야학 활동에 열심이던 혜원과, 그런 종류의 ‘개인적 시혜’가 사회 전체의 구조적 변화와는 무관한 것이라 생각하는 ‘나’ 사이에 자그마한 논쟁이 벌어지고, 그런 대화의 끝에 혜원을 사랑스럽게 여긴 ‘나’가 다시 혜원의 이마에 입을 맞추게 된다. 이번에는 이마에서 입술로 옮겨 가지는 않았는데, “우리 둘 다가 너무 어른이 됐다는 걸(…)상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혜원과의 마지막 기억 차례다. 서울을 떠나기 보름쯤 전, 혜원이 골수 이식 수술을 받기 전날이었다. 너무도 이른 나이에 찾아온 사신(死神)의 어이없는 방문에도 평소의 의연함과 따뜻함을 잃지 않으며 오히려 “주위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려고 애썼고, 그럼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혜원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런 혜원에게 ‘나’는 프랑스로 떠날 예정임을 밝히고, 혜원이 담배를 피우겠다고 해서 나간 복도 끝 비상계단 층계참에서 혜원은 말한다. “뽀뽀 한번 해줘요.” 링거병을 손에 든 ‘나’가 혜원의 이마에 입을 맞추자 혜원은 “아니, 입술에”라고 수정 주문하고, 두 사람은 다시 입술을 포갠다. 당연하다는 듯 “오빠 입술이 아이스콘 같았어”라는 품평이 뒤따르지만, “나는 이번에는 그 아이의 뒷머리를 쥐어박지 않았다.”(참고로, 혜원과 ‘나’는 둘 다 결혼한 상태였다.)
‘나’가 혜원과의 이런 달콤하고도 고통스러운 추억을 곱씹는 동안 파리의 세 사람은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고 센강 주변을 산책하며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주최의 심포지엄을 참관하거나 페르-라 셰즈 묘지를 거닌다. 묘지 장면을 끝으로 소설은 마무리되거니와, 화자의 행로가 궁극적으로 묘지를 향하는 것은 소설의 전개상 당연해 보인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 죽음에 관한 소설이 아니겠는가(이에 앞서 화자의 옛 신문사 동료 정경희는 서울에서 있었던 김남주 시인의 사십구재에 참석했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준다). 묘지에서 1871년 파리 코뮌의 지도자였던 발레리 브로비에프스키의 묘비명을 만난 화자는 이런 새로운 묘비명을 짜낸다.
“김혜원(전주 1962~서울 1994):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의사. 자신이 투사인 줄 몰랐던 박애의 투사. 우리 별에 머물렀던 서른두 해 동안 소리 소문 없이 사랑을 실천하다.(……)”
「서유기」의 화자 ‘나’(한민수)는 「제망매」의 화자와 비슷하게 한국의 기자 출신으로 프랑스 파리에 머물고 있는 인물이다. 두 사람이 완벽한 동일인은 아니고 그들이 등장하는 이 두 소설을 완벽한 자전 소설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두 소설의 화자 ‘나’에는 작가인 고종석의 면모가 어느 정도 투영되어 있다. 고종석 자신 한국에서 기자로 일하다가 가족과 함께 파리로 건너가 몇 해 동안 지냈던 경험이 있다. 「제망매」의 화자가 파리에 갓 도착한 신출내기인 데 비해 「서유기」의 화자는 파리에서 산 지 네 해가 되는 ‘베테랑’이다(그의 파리행에는 신문사 동료였던 아내와의 이혼도 큰 몫을 차지한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두고 ‘자발적 망명’이라는 말을 쓰는데, 소설집 『제망매』의 앞날개에 실린 짧은 소개글이 작가 고종석을 ‘자발적 망명자’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소설 화자와 고종석 사이의 상동성을 말해준다 하겠다.
이 소설의 전반부에서 화자는 파리에서 만난 아랍계 프랑스 여자 하스나와 동거하고 있는 중이다. 전날 마신 술 때문에 늦잠을 자고 있던 그에게 이혼한 전처가 전화를 해 온다. 지금 파리에 와 있으며, 북역에서 다른 도시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얼굴이나 볼까 한다면서. 그렇게 해서 4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이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은 뒤 다시 헤어지는 것이 전반부의 얼개를 이룬다.
그렇다고 해서 화자 ‘나’를 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서쪽에서 놀(거나 유람하)고 있는 인물이 ‘나’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그렇게 전처와 헤어진 ‘나’가 북역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 ‘정태하씨’라 할 수 있다(소설의 후반부에만 등장하는 인물이 주인공 자리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이 소설의 구조가 보이는 독특한 측면이다). “한 무역 회사의 파리 주재원으로 일하던 지난 79년 한국에서 터진 어떤 좌익 조직 사건에 연루된 뒤 귀국을 포기하고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던 정태하씨란 다름 아니라 ‘파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소설에는 “그가 자신의 대학 시절과 망명 생활을 에세이 형식으로 기록해 서울의 한 출판사에서 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설명도 나온다). 소설 제목이 가리키는바 서쪽에서 유람하고 있는 주인공이 바로 정태하/홍세화다. 요컨대 ‘서유기’라는 제목은 반어적 뉘앙스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 가회동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를 종로구에서 다녔”던 정태하씨는 소설 속 현재 시점으로부터 17년 전인 1979년 이후 고국과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와 화자는 그 17년 사이에 서울이 겪은 변화―주로 경제적 발전과 풍요로운 외관―를 놓고 제법 심각한 논쟁을 벌인다. ‘나’가 박정희 시대가 이룬 경제적 성과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는 쪽인 데 반해 정태하씨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박정희가 그 쿠데타 방식으로 내세운, 하면 된다는 그 성장 제일주의가 지금에 와서는 백화점과 다리를 무너뜨린 것”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가 박정희주의자인 것도 아니다. “박정희와 맞서 싸우다 30대 초에 국제 미아가 되어버린 뒤 50줄에 이르도록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박정희 시대라는 걸 긍정적 맥락에서 거론하는 것은 일견 잔인한 짓일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의 상식을 그는 갖추고 있다.
“한형의 서울은 아름다운 서울이군.” 박정희식 개발의 세례를 받은 서울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한민수에게 정태하씨는 이렇게 힐난하듯 말하는 것인데, 사실 서울을 더 그리워하는 것은 정태하씨 쪽이지 한민수 쪽이 아니다. 평소와 달리 술도 적잖이 마신 그는 취기의 힘을 빌려 마침내 이렇게 고백하지 않겠는가. “서울이 그리워.” 그렇지만 그렇게 고백하는 정태하씨인즉 어떤 처지였던가. “그가 여권 대신 지니고 있는 여행증명서 행선지 난에는 ‘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라는 문구가 선명히 박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망명자의 운명이다. 제가 태어나 자란 고향과 고국에 갈 수 없는 운명.
그 운명을 타개하고자 정태하씨가 생각해 낸 방도가 귀화다. 귀화를 해서 프랑스 시민권자가 되면, 비록 외국인의 신분으로일망정, 고국을 방문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 말미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정태하씨의 귀화의 가능성과 타당성을 둘러싸고 이어진다. 그러나, 한민수가 보기에, “그는 근본적으로 프랑스 사람이 될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그는 이식해서는 잘 재배가 안 되는 재래종 식물이었던 것이다.” 소설이 끝나도록 정태하씨의 귀화 문제에 대한 딱부러지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한민수의 판단대로 정태하씨는 자신이 먼저 꺼냈던 귀화 이야기를 쓸쓸하게 거둬들인다. 적어도 소설 속에서는 그의 ‘서유’가 끝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이제 세 작품 중에서 가장 놀라운 「찬 기 파랑」에 대해 살펴볼 차례다. 충담사가 지은 향가 「찬기파랑가」는 기파랑(耆婆郞)이라는 이름을 지닌 화랑 우두머리의 고결한 인격과 기상을 노래한 작품이다. 고종석의 소설 역시 ‘기 파랑’이라는 인물을 찬양하는 내용이지만, 이 기 파랑이 그 기파랑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기파랑’이라는 이름을 지닌 또 다른 화랑? 이런 추측 역시 여지없이 배반한다는 데에 고종석 소설의 묘미가 있다. 여기서 찬양의 대상이 되는 기 파랑은 뜻밖에도 프랑스 국적의 언어학자다. 소설에서는 ‘기 파랑’ 식으로 ‘기’와 ‘파랑’ 사이가 띄어져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기’는 ‘기 드 모파상’이나 ‘기 라로슈’ 같은 프랑스 사람들의 퍼스트네임으로서의 ‘기’이며 ‘파랑’은 그의 패밀리네임, 즉 성(姓)인 것이다(기 파랑을 알파벳으로 표기한다면 ‘Guy Parent’이 될 것이다).
“기 파랑이 죽었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길게 씌어진 부음기사(오비추어리)라 할 법하다. 1901년생인 기 파랑이 1997년 새해 벽두에 숨을 거두었다는 <르 몽드>의 기사를 접한 서술자가 자신의 관점에서 기 파랑의 생애를 재구성해 들려주는 형식을 소설은 취한다. “기 파랑의 죽음은 예외적으로 품이 널렀던 어떤 육체와 정신의 소멸을 뜻할 뿐만 아니라 그 정신과 육체를 품었던 한 세기의 종말을 뜻하기도 하다”는 것이 서술자의 판단이다.
<르 몽드>에 기사가 실렸다고는 하지만 기 파랑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순전히 작가가 창안해 낸 인물이다(「찬 기 파랑」이 허구의 장르인 소설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도록 하자. 신라 화랑의 이름에서 프랑스 사람의 이름을 연상해 낸 작가의 상상력이 기발하지 않은가). 그는 역사비교언어학을 전공한 언어학자로서 로만어와 중세 프랑스어, 동아시아어 등에 관한 연구서를 남긴 사람이다. 그러나 한국어 사용자로 짐작되는 이 소설의 화자로 하여금 프랑스 학자 기 파랑에 관해 이렇듯 정성 들인 오비추어리를 작성하도록 만든 까닭은 따로 있었다. “언어학자 기 파랑은 한국어에 관한 아주 중요한 책을 남겼고, 문필가 기 파랑은 그의 한국 체류기를 일부로 포함하는 에세이를 남겼다.(……)그는 개항 이래 조선을 가장 잘 이해하고 가장 사랑한 서양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런 인물이 있었단 말인가, 라고 의아해하거나 궁금해하지는 말기 바란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기 파랑은 허구의 인물이니까. 「찬 기 파랑」의 놀라운 점은 이 가상 인물의 이력과 업적, 그리고 한국[조선]과의 관련성을 썩 그럴듯하게 꾸몄다는 데에 있다. 그 과정에서, 그 자신 대학원에서 언어학을 전공한 작가의 내공이 보란 듯이 발휘되었음은 물론이다(비록 제목에는 한자를 사용했지만 이 소설에서 작가가 한자와 알파벳은 물론 아라비아숫자도 배제한 채 한글 표기로만 오로지하고 있는 것 역시 그의 언어학적 내공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작가가 작성한 허구의 이력에 따르면 기 파랑은 1928년부터 1933년까지 4년 반 남짓 현지 언어 연구를 위해 중국과 한국과 일본에 머물렀다. 특히 1928년 8월 기 파랑이 아내와 함께 처음 서울에 도착했을 때 그의 아내는 만삭의 몸이었기 때문에 부부는 아이의 출산에서 산모의 산후조리에 이르는 두 달 반 가량을 서울에 머물러야 했다. 그는 이듬해인 1929년은 온전히 조선에 머물며 조선어를 연구하게 되는데, 1928~9년에 걸친 조선 체험은 그의 동아시아 체류기 『봄 샐러드』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 책에서 기 파랑은 조선어와 일본어의 놀랄 만한 상동성을 지적하고, 일본의 식민 치하에 있는 조선 작가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조선어 글쓰기를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해 걱정스러운 추측을 내놓으며, 서울 거리에서 마주치는 일본인들의 어둡고 비장한 표정과 조선인들의 밝고 낙천적인 표정을 대비해서 묘사하기도 한다. 특히 『임꺽정』의 작가인 벽초 홍명희의 아들이자 걸출한 언어학자인 홍기문과의 만남을 그린 대목이 인상적인데, 홍기문이 1927년 잡지 『현대 평론』에 연재한 논문 「조선문전요령」을 매뉴얼로 삼아 기 파랑이 조선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든가, 1933년 조선어학회가 조선어 철자법 통일안을 발표하는 데에 그의 조선 체류가 일정한 흔적을 남겼으며, 그가 자신의 조선어 연구 성과를 담아 1950년에 펴낸 책 『한국어의 기원』이 서양 사람에 의해 쓰여진 가장 수준 높은 한국어 관련 저술의 하나라는 등의 서술에 언어학과 국어학에 관한 작가의 지식은 밀도 높게 스며들어 있다.
기 파랑은 1930년 2월부터 1932년 말까지 중국에 머물면서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임시정부 편에서 일을 했으며, 1936년 스페인 내전에는 국제여단의 일원으로 참전해 전투를 벌이다가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의 서술자는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나 혁명가는 아니었노라고 밝힌다. 그렇기는커녕 그는 20세기를 풍미한 두 사상, 즉 마르크스주의 및 프로이트주의와 거의 무관한 학문적 경향을 보였다. 그는 “한 사람의 이데올로그로서는 절충주의자, 아마추어, 딜레탕트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절충주의니 아마추어니 딜레탕트니 하는 말들은 흔히 부정적인 함의를 지닌 채 사용되지만, 이 글의 서술자에게는 사정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그가 보기에 기 파랑의 학문적 태도와 세계관은 ‘중용과 균형의 철학’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절충주의라고 부르든 아마추어리즘이라고 부르든 딜레탕티슴이라고 부르든, 바로 그런 균형과 중용의 세계관이야말로 기 파랑의 삶을 일관했던 미덕이었고, 우리가 상속받아 다음 세기로 이월시킬 값어치가 있는 철학이기도 하다.” 여기서 들리는 것을, 온갖 종류의 도그마에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자유주의자 고종석 자신의 목소리라 이해해도 크게 어긋난 짐작은 아닐 테다.
20세기의 후반부, 그러니까 기 파랑의 생애의 후반부에 그는 한국과 관련해 두 가지 중요한 체험을 추가로 하게 된다. 1928년 부모의 첫 조선 방문 때 서울에서 태어났던 그의 외아들 장-프랑수아가 군의관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으며, 기 파랑 자신이 사월혁명 이후의 한국에 한 달 가까이 체류한 것이다. 기 파랑은 이후 소르본 대학에서 가르치며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정책을 비난하고 알제리 독립과 쿠바 혁명을 옹호하는 지식인의 대열에 합류하는가 하면 1968년 학생시위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등 적극적인 참여적 지식인의 면모를 보인다. 1970년 은퇴한 뒤에도 한국의 김지하와 김대중을 비롯한 전 세계 정치범들의 석방 탄원서에 서명하고 베트남의 보트 피플과 팔레스타인 사태, 그리고 유고 내전과 인종주의에 관련한 집회와 시위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등 지식인으로서 그의 참여와 실천은 시들 줄을 몰랐다. 마침내 1996년 11월 9일 국제여단의 스페인 내전 참전 60주년 기념 행사에서 스페인 총리가 한 감사 연설에 대해 국제여단 생존자들을 대표해서 답사를 한 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공개 석상에 모습을 나타낸 일이었다.
「제망매」와 「서유기」, 그리고 「찬 기 파랑」 등 고종석의 ‘고전 삼부작’은 고전을 재해석하는 참신한 접근법을 보여준다. 특히 「찬 기 파랑」은 파천황의 상상력으로 패러디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젖힌 문제작이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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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최재봉
<한겨레> 문학전문기자이다. 지은 책으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간이역에서 사이버스페이스까지-한국문학의 공간탐사』, 『최재봉 기자의 글마을 통신』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드거 스노 자서전』, 『클레피, 희망의 기록』, 『에리히 프롬, 마르크스를 말하다』 등이 있다. 지금은 시와 소설 속 사랑의 명장면들을 찾아가는 '사랑의 풍경'을 신문에 연재하고 있으며, 한국문학 작품의 제목들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정리해 책으로 낼 준비를 하고 있다. 문학과 대중의 거리를 좁히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있다.